카르마의 바다 문예중앙시선 20
문정희 지음 / 문예중앙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바람속에 악공이 살고 있다


선착장에 나가니 뱃사공들이 모두 파업이다

베네치아 건달들이 휘파람을 부는 날이다

강바람에 머리카락 휘날리던 곤돌리에들이 

짐승 털 냄새를 풍기는 강가에

노를 세워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님이여, 저 강을 건너지 마오

고조선 땅 백수광부 아내처럼 

나는 한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술병을 들고 바다로 뛰어든 신랑이 그리워 

홀로 발 뻗고 앉아 있다

아내의 흰 치마가 물결에 떠내려간다


베네치아 바람 속에 악공이 살고 있다

악공이 돌아오면 어디로 데려다 달라고 할까

저 강을 건너 진정 내가 닿고 싶은 곳은 어디인가

휘파람인가, 신랑의 흰 머리카락인가

바람 속에 슬픈 악공이 살고 있다 


문정희가 늙는다. 이럴수가. 

그녀는 아무리 나이들고 몸이 축나고 병으로 모두 벗고 알몸으로 수술실을 들락거린다해도 

그녀는 늙지 않을 줄 알았다. 

그녀는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뜨겁게 빛나길 바랬다. 


노 젓는 일


침묵의 물결 위로 노 젓는 일 가혹도 하지

흰나비처럼 물 위를 걷는 일 장엄도 하지


건너편 섬에는 

죽은 자들이 벗어놓은

뱀 허물 섬


시간이라는 수갑 속으로 자라는

소톱을 바라보다

홀로 돌아간 탈주병들이 잠든 

비로소 영원한 허공


누구도 왕복표는 가질 수 없어

편도표뿐이야


침묵을 저어 저어

시를 쓰고 

고통을 저어 저어

촛불을 켜고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알 수 없는 시간의 수갑을 차고 


그녀는 아마도 이제 더 미루지 못하고 삶과 죽음을 느끼고 있나부다. 

밀리고 밀려 그러니 공허한것 말고는 사랑밖에 할말이 없나부다.  

더운 열기가 확확 오르도록 머리채를 휘날리며 바람처럼 달리며 

오만한 눈빛으로 세상을 곁눈질 했었다.  

이제 그녀는 잘 모르겠다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늘 그랬듯이 슬픔과 눈물 뿐 이라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뭐 다른게 있냐고 


신과 짐승사이

이리도 슬픈 온기를 가진 떠돌이 

나는 어느 혈족인가


나는 또 길을 나선다

(유랑 일기 中)


화산의 기억을 담은

시집 한 권 머리맡에 두고

불면을 독배처럼 끌어안고

피를 찍어 석 달 열흘 상소문을 쓴다 

(유배 선물 中) 


이런 언어가 내가 아는 문정희 다운 언어다.

그녀가 나이들어 어쩔수 없이 성숙하고 노련하고 심지어 초월하고 해탈하고 비워서 득도한듯이 

이제 삶과의 불화란 더이상 없이 누구나 그러하듯이 살다가 죽음을 준비하는 

그러나 어찌하여 이것은 문정희 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명민한 시인은 요절하거나 특히 여시인은 정신병원이라도 들락거려야 어울린다는 것이냐. 

번개처럼 번쩍이고 날카롭게 살아냈으니 

언제까지 화산처럼 폭발하기 직전의 부글거림으로 뜨거울건가. 

그녀도 이제 서서히 식어 흙어로 돌아가지 않겠나. 


이것이 슬픔이고 눈물이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평등하여 식싱한 삶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