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 - 서암(西庵) 큰스님 평전
이청 지음 / 북마크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1.
서암스님 평전이다. 잘 씌어진 평전을 오래간만에 읽는다.
큰스님이라는 호칭에 어울리게 조계종 총무원장과 종정도 지냈던 스님이지만 그보다는
봉암사를 속인들에게 개방하지 않아 청정도량으로 지킨것이 더 큰 업적으로 보인다. 
단지 문을 닫아 관광객을 물리친것이 아니라 
바위를 개발하겠다고 지게차로 밀고들어오는 토목공사를 물리치고 
케이블카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려는 자본을 물리쳤으니 멋지다. 
이름난 절들이 물건 장사도 하고 영가 천도하며 장사하느라 돈냄새 풀풀 풍기는것에 비하니 더욱이 그렇다. 

그러나 가장 큰 업적은 종정을 그만두며 조계종 종단을 뛰쳐 나온것이다. 
노인이 다되어 평생 놀던 물에서 나와 더 자유롭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출가하여 다만 절집에서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깨쳤다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하물며 그런 사람들이 도인 행세를 하고 나아가 그것으로 가풍을 감하 문중을 형성하고 당파를 만들고, 그렇게 생긴 당파의 덩치가 커지니 서로 부딪쳐 이해관계로 싸우게 되니 이는 불교 집안 의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우환이 된다.  

어느 문중에도 속하지 않았고 따로 제자를 키우지도 않았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예민한 시기에 종정으로 추대되고
얼굴마담만 잘하면 되는대 진짜 개혁을 하려하니 문중들이 다 못마땅하여 종정직을 내놓고 나오며 조계종에서도 나와
홀로 갈곳없는 노인이 되어 인연이 되는대로 떠돌다 80고개를 넘어 집을 마련하였다.

어릴때부터 집도 없이 남의 집 곁방살이로 연명해왔고, 자라서는 절집을 돌며 '내 것' 이라고는 잿물 들인 바랑 하나가 전부였던 노인이 80고개를 넘어서서 비로소 '내 집' 하나를 마련한 것이었다. 조립식 건물로 암자라고 이름 붙이기도 어려운 임시 건물이었으나 비바람을 피하고 겨울에는 따듯한 온기가, 여름에는 서늘한 봉창과 구들장을 가졌으니 이만하몀 더 바랄것이 없는 살림이었다.


2.
지금까지 읽어온 스님들의 이야기는 보통 현대사와 맥락이 잘 안 닿았었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듯 모를듯 한채 대체로 바람부는 중생들의 땅과는 멀었다.

이청이 쓴 서암스님의 평전은 출가하여 중으로 사는 기록을 남기면서 한국 현대사, 그 질곡과 격동의 시간속에
한국불교는 어떤길을 어떻게 걸어왔고 변화되어 왔는지를 성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식민지 조선의 불교를 제압하여 친일불교로 만들려는 계획에 의해 대처승들이 판을처 비구승들이 뒷방으로 밀려나고
해방되자 이번에는 비구승들이 국가권력의 힘을 얻어 대처승들을 쫓아내며 숫적으로 열세이니 깡패까지 동원하여 밀어낸다.
그리하여 비구승들이 조계종으로 한국불교계를 평정했는대
이번에는 조계종 안에서 집안싸움 밥그릇 싸움으로 진흙탕 개싸움을 수십년 한다.
한번 들어온 깡패가 어딜가겠는가.

이와중에 서암스님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고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다 진흙탕 싸움의 한복판으로 초대되기도 하고 밀려나기도하고
그러나 스스로는 문중도 제자도 말년에는 종단도 없이 홀로 수행하였다.

이모든 것이 소박한 문장으로 편안하게 서술된다.
문장조차 손톱만큼도 잘난척이 없이 겸손하니, 이청이 서암스님을 잘 읽어낸것이고 그럴줄 서암스님이 알았던 게다.
기본 가닥은 소설가가 노인과 나누는 대화인대
소설가는 적절한 때에 결정적인 장면들에거 역사적 배경 설명을 친절하게 한다.
서암스님의 판단과 행보가 어떤 의미였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런 맥락이 좋다.
중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세속을 떠나 용맹정진하고 수행한들 세상의 흐름이든, 역사의 흐름이든, 인민의 삶이든
불교 집안 내부의 일들이든, 어찌 이세상과의 연을 다 끊고 홀로 청정할수 있단 말인가.
시대의 고통과 아픔이 있고 시대의 화두가 있는 법이다.
그 속에 한사람의 중으로 선택이 있고 삶이 있다.
서암스님은 견결하고 담백하다. 

열반에 들기전 시봉하던 제자들은 스님으로 부터 열반송같은 게송 한마디를 얻어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던 것 같다. 제자들이 집요하게 묻자 귀찮아진 스님이 한마디 했다. 
"그 노인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죽는 순간 까지 눈물겹게 견결하고 담백하다.  


3.
서암스님의 평전을 쓰기 위해 조계종에서 결코 반기지 않을 치부들을 솔직하게 담담하게 써내려간 것이 큰 장점이다.
세속의 다툼이든 욕망이든 업이든, 그런것에서 자유롭게 수행하기위해 중이되는 것이 아닌가.
중들은 마치 그런 모든 인간적인 다툼과 욕망에서 물러나 면벽수행하는것이 다인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부 밥그릇 싸움이 치열하고, 그것을 위해 권력과의 밀착과 음모가 치열하고, 이름있는 절마다 장사도 치열하다.
서암스님의 평전속에 자연스럽게 훌륭한 여러 스님들이 자연스레 소개되지만
이청이 기록하는 절집들의 현대사는 권력과 이권다툼으로 개판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실명을 모두 공개하며 써주니 신뢰가 간다.

서암스님의 삶을 더듬으며 한국 불교의 지나온 현대사를 예찬하기만 했다면 그것을 사기였을 테지.
절집의 천박한 수준과 속물스러움과 누추함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장점이다.
이렇게 솔직한 절이야기를 본적이 없다.

절집의 '문중'은 좌파 운동권의 '정파'와 생리가 많이 비슷해 보여.
혈연의 업조차 끊고 가볍게, 무겁게 절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안에서 다시 문중을 만들어 권력다툼에 날이 새는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나 어쩌면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들어간 절이기 때문에
그안에서 만난 스승과 벗들은 혈육보다 더 가깝고 더 애틋해질수도 있겠지.
아무것도 필요없고 모두 버린 자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욕망하니 그 욕망의 힘이 더욱 끈적끈적 할수도 있는 것 같아.
운동권도 비슷하다.
기득권을 스스로 버린자, 처음부터 가진것이 없는 자들이 정의의 이름을 앞세워 그 이름에 자신의 삶을 종속시키고
권력을 획득하겠다는 욕망으로 뜨거울때, 진흙탕 개싸움이 되는거다.
정파는 그렇게 움직이기도 한다.

절집도 운동권도 인민의 삶과 멀리 저혼자 청정하려고 속살을 은폐하면, 그곳에 비리와 욕망이 천박하다.
중생을 구원해야 할 수행자들인 중도, 평등한 세상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회주의자들도 
그 삶을 인민들의 눈앞에서 드러내 검증받지 않은채 인민들의 머리위에서 노는듯 잘난척 해봐야, 헛방이다.


4.
서암스님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는대
나도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고 싶다하면, 세상에 부처가 저마다의 마음에 있어 사람마다 다 부처인대
어찌 네 마음을 따라 살지않고 서암의 마음을 따라 살려고 하느냐 타박하실 듯하다.

달마 스님도 일찍이 "너에게 마음이 없으면 나에게 묻지도 못하고 내가 마음이 없으면 너에게 대답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그대가 나에게 묻고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면 이것이 곧 부처다. 그밖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나의 부처,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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