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를 죽인 부처 - 깨달음의 탄생과 혁명적 지성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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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법의 추천사

인간과 삶과 수행하는 자의 도리에 대해, 짧지만 논리적이고 명징하다. 


서언은 박노자가 생각하는 불교교리에 대한 핵심요약정리다. 해방불교의 관점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 불교가 국가 또는 지배계급과 유착한 역사가 이미 2,000년을 훌쩍 넘은 만큼 우리 의식속에 남아 있는불교는 현실을 따라가며 인정하는 식이거나 지극히 개인 중심적이고 보수적이다. 개인의 문제들을 모조리 개인의 악업으로 설명하는 등 탈 사회화, 개별화되었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또한 개인적 차원의 '업장의 소멸'에 그친다. 


게다가 불교의 대 사회적 측면 역시 현실을 무조건 긍정하고 재확인하는 '국가수호', 즉 소위 '호국'에 국한되고 만다. 


불교의 목적은 일체중생의 이고득락인데,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고통을 영구화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원적 목표와 상반된다. 


불교적실천이란 국가와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과 부정, 해체의 작업이다. 이것이야말로 중생이 겪는 수많은 고통의 상당부분을 덜어줄 수 있는 집단 치유의 길이며 집단적 선업을 쌓아가는 길이라 할수 있다. 개인의 해탈과 병행될수 있는 '더불어 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지구와 사회의 세포를 하나하나 갉아먹는 암과 같은 자본주의, 제국주의의 폐해에 대항해 혁명적 투쟁을 벌이는 것고 집단 전체를 위한 해탈의 결험이 될수는 있을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집회에 참석한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구체화하여 발표하고 읽는 등의 지적 작업 역시 집단적 해탈을 향한 수행의 일종이라 하겠다. 


하화중생이 따르지 않으면 그 어떤 깨달음도 이기적인 정신의 유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중생의 모든 고통이 나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 불교의 영혼은 동망가고 없다. '해방불교'에는 사찰도 불상도 기도도 없거나 이차적이다. 해방 불교는 부처님에게 비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이다. 


자아의 경계선을 넘는 자비의 정신은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좀 길어도 맥락을 따라가며 옮겼다. 

서언이 가장 좋고, 본문은 서언만 못하다. 반성은 하는대 두리뭉실 술에 물타듯 처리하기 때문이다. 



2. 

박노자는 석가모니를 고대의 위대한 변증론 철학자라고 소개한다. 

법륜스님의 책, 법정 스님의 책도 좋았지만, 답답하던 차에 박노자의 해석이 반갑다. 

중생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유마경의 문장이 비수처럼 가슴을 찌르더니 

사회주의자의 삶은 대중의 바다, 인민의 고통과 함께 살며 함께 싸우는, 수행자라는 생각을 긍정해주는 

박노자의 불교해석이 내 어깨를 두드려준다. 


불교의 본질로 따지자면 내 아들이 서울대 입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보다는 내 아들, 네 아들 구분없이 입시 지옥헤 시달리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으로 물심양면 학벌 타파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어렵지 않고 보편적인 상식수준의 질문과 답은 명쾌하다기 보다 순하다. 



3.

징병제가 승려들에게까지 적용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가끔 중들도 군대가나, 궁금하기는 했지. 

왜 중들이 군대가서 뭐하는지에 대한 책은 없을꼬. 총들고 사람죽이는 중이라니, 거시기 하다. 

군대에가서 살인을 훈련하는것에 동의하면서 그 얘긴 쏙 빼고, 늘 산사에서 청정하게 사는 척했던 거쟎아. 가증스런 것들.

만일 징병제에 동의하지 않았으면 예로부터 권력과 밀착하지 못했을테니까. 

외적의 침입에 승병으로 나선 스님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고, 마치 장수 같았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생을 막기위해 노력하는 것과 살인훈련하며 전쟁을 학습하는 징병에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 같아. 

징병제에는 동의해주고, 세금은 안낼뿐 아니라, 사찰마다 절집 구경하는 값을 돈으로 받으시는것에 꼼꼼하시니, 참. 


불교가 구가적 살생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가 십자군전쟁을 중세부터 21세기 오늘까지 수백년 하고 있는것보다 더 이상하다. 

기독교의 신 야훼는 애초에 인격신이라 복수의 신이고 적들을 죽이고 벌하는 신이다. 

불교는 연기, 공에 대한 깨달음이 논리적인 생활철학인대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명분으로 사람죽이는 것조차 허용하는 것은 과하다. 

그때그때 다르다는 융통성을 마구마구 밀어붙여 코에걸면 코걸이 귀에걸면 귀걸이, 오로지 국가권력을 위해 춤춘다. 더러워.

 


4. 

아쉬운것은 참으로 소심한 해방불교의 실천지침이다. 

배타적 학벌집단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명문대중심의 입시제도를 거부하고, 살인을 가리키는 군대를 거부하지는 못해도, 

알고는 살아야 하지 않냐고 말한다. 내 참. 

그렇게 알거면 아는거랑 모르는 거랑 뭐 다른가. 


이천년전에 국가권력과 만나 세속화된 불교가 인민들을 자유롭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커녕 

인민에게 재앙이 되는 것에 대한 분석이 무디다. 

이천년전 말고, 오늘현실의 분석은 그나마 없다. 뭐야, 박노자 실망이다. 


박노자의 불교성찰과 비판적 고찰도 이미 흐리멍텅한대 불교내부의 쟁점에 대한 도법스님과의 대화는 더하다.

도법은 이도저도 아니다. 

불교를 비판하지도 않을뿐 아니라 중립적인입장에서 객관을가장하여,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조심하는 것처럼

두리뭉실, 구렁이 담넘듯이 현실불교를 긍정한다. 


불교는 붓다처럼 혁명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서언에서는 큰소리치더니 각론의 본문으로 들어가며 뭐하나 시원한 것이 없다. 

한국불교의 문제가 딥다 많고 고질적이고 시스템상 고치기도 어렵다는 거다. 거기서 끝이다. 

어려우니 어째, 기양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며 인민의 고통을 빌미로 사기치며 중들이나 잘먹고 잘사는 거지.

영혼을 팔아 제 배를 채우는 탐욕스런 것들.

당장 구체적인 실천지침을 내놓지는 못하면 당장 붓다처럼 살자고, 선동이라도 시원하게 하든지. 답답이. 


도법은 비폭력을 강조한다. 

최소한 양심적병역거부자들을 가두는 것은 옳바르지 고 군대도 총칼도 전쟁도 거부한다는 운동을 하며 비폭력을 말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니 세련되게 파렴치하다. 

더 큰 폭력을 용인하기위해 작은 폭력을 참으라는거지. 폭력이란 더 크지도 작지도 않으니까. 다 폭력이니까. 

결국 힘없이 당하며 고통스럽게 살라는 거지. 평화적으로. 죽임당하는 자는 죽고, 아픈사람은 계속 아프라고, 평화적으로. 

아, 이런 논리 식상해. 

이게 아니라면 도법은 설명을 더 해줘야 한다. 

국가폭력에 빌붙어 엄호하며 그 결실을 나눠먹고 살아온 불교의 오랜 탐욕이 인민을 고통스럽게 하는것에 대해, 

그 폐해와 극복방법에 대한 언급없이 비폭력을 말하니 인민들의 숨찬 고통을 외면하는 뻔뻔함이다. 


불교에서 아힘사는 자본주의적 국가 사회의 제도화된 폭력을  무저항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아힘사는 제도화된 폭력의 장벽을 무너뜨리기 위한 투쟁이다. 

기껏 어영부영 진빼고 마지막 결론부분에 이렇게 썼다. 면피하자는 거야, 머야. 

그리하여 박노자는 초기 불교의 정신에 근거해 재가자 위주의 새로운 민중적 불교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꼬.

쌍차투쟁에 연대하는 불자들의 모임, 이런것은 아직 못보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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