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탄생 - 소설이 끝내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
이재은 지음 / 강단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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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랑은 허기지만 섹스는 음식이다, 이게 저의 모토에요. 인간이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늘 허기지고 외롭고, 그게 사랑의 욕구라면 섹스는 허기를 채워줄 수 있는 음식이고 먹는 건데, 그게 일상적인 거죠. 삶의 에너지를 주는 거고. 그래서 저는 섹스를 건강한 에너지라고 봐요. 이것을 이상하게 보는 게 사실 이상한 거죠. '왜곡된 성'이 이상한 거지, 섹스는 인간의 이상이고 본능이에요. 먹어야 사니까요.

 

 

 

이 책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영문학 공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계문학을 좋아해서 영어영문학과까지 가고 거기서 영미시와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나보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소설가들을 모아놓고 있다. 심지어 젊은이들 사이에선 오래 전부터 악명높은 이문열씨까지. 이전에 보았던 소설을 쓴 권여선 씨를 소개하는 책이라서 쭈욱 봤었지만, 이문열을 보니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다가 내가 문학작품을 보면서 감동했다가 저자를 알면 알수록 실망하게 되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문열은 보수 특유의 오만함 때문에 싫어했다. 백석은 기생과의 끈적끈적하고 질척질척한 관계 때문에 싫어했다. 일본의 기시 유스케는 권위적인 면이 있단 소리를 들어서 실망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영미문학의 저자에 대해서 그런 기분이 들었던 적은 없는 것 같았다. 왜 그럴까. 영미문학에 대한 지식이 미숙해서 그럴까. 아니면 서양의 오픈된 문화이려니하고 그냥 넘겼기 때문일까. 내가 보기엔 둘 다인 듯하다.

 기시 유스케는 그렇다치고 왜 한국문학에는 멋대로 기대를 하다가 그렇게 실망을 한 것일까. 그리고 비난하기는 왜 그리 쉬웠을까. 한국문단계열이 너무 좁아서 작가에 대한 소문이 나면 금방 퍼지는 탓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나라는 작가도 일종의 공인으로 생각해서 그들이 성자처럼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대중들에게 유명해지는 문학가들도 몇 안 되지만 말이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한 하성란 씨의 말씀이 생각난다. '인간에게 편함과 이로움을 가져다준 것들이 인간을 공격하는 것 같아요.' 댓글의 인신공격 측면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세계의 전쟁 직전 분위기가 생각나기도 하고, 환경오염에 따른 이상현상이 생각나기도 하고, 다방면으로 해석하기 좋은 문장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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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가 기어간 자리는 왜 은빛으로 빛날까
하재일 지음 / 다리미디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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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즐거운 사무실

하재일

창밖에 새들이 전깃줄을 뜯어먹고 있다
푸른 전봇대를 뿌리째 뽑아 서로 나눠 먹고 있다
사이사이 태양을 컵에 따라
콜라처럼 부글거리는 오후의 햇살을 잘라
가득 부어 서로 마시고 있다
흰 백묵이 학생 하나를 죽이고 있다
노란 백묵이 이어서 한 여학생을 죽이고 있다
빨간 백묵이 염색을 한 남학생을 다시 죽이고 있다
오래 묵는 책들이 의자를 뛰어넘어 갈색 들쥐로 변해
벽면을 물어뜯으며 주체할 수 없는
살의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찍는다

컴퓨터 자판이 사납게 뛰어다닌다
마포자루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을 마구 때린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한쪽 어깨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지만 피할 길이 없다
휴렛패커드 레이저 프린트기가 땀을 흘리며
온종일 벽돌을 져 허공에 나른다
그때마다 쾅쾅 심하게 내려치는 해머 소리
누군가의 대가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불의의 방문객이 계속 찾아온다
불에 단련된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 방문객을 자기가 맞겠다고 결투를 청한다
그러자 빨강 머리 여자가 지나갔다
그러자 노랑 머리 여자가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파랑 머리 여자가
잎이 다 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뽑아
우둑우둑 씹어먹으며 지나갔다

증축 공사장에서 철근 두 개를 단숨에 먹어 치운
90킬로그램이 넘는 비만의 파리가 허기를 채우려
날쌔게 날아와 다시 가위를 먹는다
면도칼, 자, 테이블까지 잘게 썰어 먹는다
목이 타는지 이번에도 오후의 태양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킨다
철제 캐비닛이 도끼날에 찍힌 장작마냥 떨고 있다
천장에 붙은 붙박이 선풍기가 하얗게 질려 있다

 

 

일단 이 시에서 달팽이가 나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집 없는 달팽이 중에서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진물 흘린 자국이 있다 맨몸으로 문질러댄 전신의 고통일까 아무 곳에도 제 몸 하나 숨길 데가 없어서 일찍부터 이런 흔적을 만든 것일까 나는 집 없는 달팽이일까

 이전의 내용: 아내랑 반지하에서 사는데 여자가 곰팡이 퇴치에 매달리다 폐렴 걸려서 이사. 볕 엄청 잘 드는데로 가서 애를 낳았는데 너무 햇빛이 잘 들어서 황달 걸림. 급히 이사 생각중.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신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위에 내가 마음에 드는 글을 보면 사회 이야기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도 아내의 침묵 속에서 열심히 유추해보고 있다. 그 모습이 정말 달팽이가 뿔을 잔뜩 치켜들고 교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고 할까.(?) 대부분의 몽환적인 장면은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기인한다. 김사인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농촌 것들은 예전엔 이런 저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다 황폐해졌다는 회상에서 시를 쓴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럴듯했다. 하지만 이 시인의 시는 평론가도 그렇게 말했듯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마냥 좋은 과거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간보다는 자신이 보았던 자연의 생물들만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강원도 속초에서 포켓몬고가 우연히 실행되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들었다. 자연 환경이 좋아져서 모바일상에서 뜨는 포켓몬보단 곤충들과 물고기가 많아졌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랬다간 어차피 또 다시 멸종되겠지 생각되어 입맛이 쓰다. 모바일에서의 포켓몬은 사람들이 포획하고 또 포획되도 무한생산될까? 모바일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횡포를 무한히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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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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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난 언제나 감자의 다양한 조리법에 감탄하곤 했지. 굶고 삶고 찌고 볶고 튀기고 데치고 으깨고 부치고 끓이고 죽이고 묵히고 익히고 말리고 밀리고 울리고 불리고 부수고 밀치고 망치고 뭉치고 상하고 멍들고 짓누르고 짓무르고 회피하고 보류하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묻고 답하고. 그것이 싸구려 인생을 대변한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 흘러넘친다는 건 이미 전락했다는 말이니까. 어디에서 어디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느새 떠내려왔다는 거지. 원치 않는 어떤 곳에 놓여 있다는 거지. 그날의 우리가 그랬었지.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때 넌 어쩌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니. 맛없는 포테이토샐러드를 먹으면서. 하릴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테이블 위로 일렁이는 희미한 불빛을 남모르게 좇으면서.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황금알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무당들을 모아놓고 방송을 했는데 어떤 사람이 트랜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음이 반복되면서 고양되는 무아지경의 경지가 집중력을 키운다나.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이 시집도 그런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시인은 항상 시를 지을 때 단어를 약간 바꿔가면서 문장을 반복하는데 소리내서 읽으면 정말로 노래를 하거나 굿을 하는 느낌이었다. 맘에 드는 시구도 정말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고심 끝에 이 시를 베스트로 꼽았다. 시에서 의미를 찾는 걸 싫어한다는 시인과 독자들에게는 심심풀이 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에서 (여성) 시인분이 전남친의 시각에서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서로가 지긋지긋해지는 그 상황을 설명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들은 죽은 검은 개의 기억과 겹쳐서 마치 서로 손을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젊었던 때의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강한 사람에겐 강하고, 약한 사람에겐 약해야 참으로 바른 인생이라는 생각이 요즘에 자꾸만 든다. 시 뒤에 있는 평론에서 그렇게 말했듯이, 소통의 강요는 마음이 섬세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의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얼마나 강할 것인가. 사이코패스만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힘을 빼도록 만드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고, 대부분의 여자는 그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걸 두려워할 것이다.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웃는 얼굴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으므로, 그녀가 상처받아서 우는 얼굴은 진작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모든 상황에 처했을 때 냈던 모든 목소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말이다. 눈에 병이 들었던 개의 어둠을 상상하는 시인의 머릿속에 간헐적으로 찬란했던 빛의 시절이 비치는 현상은 그런 필모그래피이다.

 사람은 항상 웃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내 밑에도 위에도 좌에도 우에도 사람들이 둘러싸서 속으로 울음을 삭히고 있음을 이젠 조금 알 수 있다. 나는 그 감정에 민감해지고 싶다. 점점 메말라가고 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그들의 절망에 같이 분노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고 싶다. 내 감정에 특별한 색깔을 부여하고 싶다. 이름을 붙이지 않거나 다중의 이름을 붙이고 싶다. 우리는 울면서 웃거나 울면서 웃을 수 있다. 심리학 혹은 과학을 종교처럼 맹신하는 사람들이 사물에 이어 감정에 함부로 기준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에 저항하는 삐딱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우리의 심장을 굳게 만드는 회색 콘트리트를 몽땅 부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네가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컴퓨터와 문명이 없어지는 때, 아무 욕망이 없는 미답의 영역에서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꿈 속에서 너를 보았던 것처럼. 아니면 내가 아무리 손을 뻗어 빛을 비추어 주려고 해도 나의 뜻이 닿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칼을 닦고 있을까. 추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구상만 주장하다 결국 괴물이 되어버린 현실의 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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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난리를 당하매 - 임진왜란에 조국을 지킨 아홉 의병장 작품집 겨레고전문학선집 9
곽재우 외 8인 씀, 오희복 옮김 / 보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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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필마 단신 강릉 땅 찾아드니
황량한 옛 역마을 차마 보기 어렵구나.
계속되는 가물이라 밭곡식 타 버리고
불어 대는 센바람 창문을 뒤흔드네.

온 해를 밭에 산들 덕 볼 것이 무엇이랴.
이해가 다 갔지만 살아갈 길 막연하네.
날마다 오고 가는 하 많은 저 관리들
백성들을 구제할 방책이나 생각하오.

 

 

뭔가 공부를 한다는 기분이었지만 흥미로운 점이 굉장히 많았다.

 

 첫번째가 책 말미에 의병을 '뭇다'라는 말이 많이 등장하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묶다의 오타인 줄 알았는데 계속 반복되어 나오길래 이상하게 느껴져 검색을 해보았다. 그런데 두레를 뭇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어떤 목표를 위해 배경환경이나 성격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서로 엮어서 조직을 이룰 때 쓰는 동사가 아닌가 싶다.

 확실히 의병장들의 시와 산문을 한데 모아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신분계 사회인지라 지방의 유력 인사라던가 정치에 많이 관여한 승려가 대다수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술을 굉장히 좋아해서 술이 등장하는 시구만 20편 중에서 다섯편 정도 차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위의 시구에서처럼 관리들이 술 마시며 유람하고 다니는 걸 사정없이 질타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연히 스님들에게선 불교에 관한 시가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자연 경치라던가 술에 대한 시가 공통적으로 상당히 많았다. 술의 도수를 높이는 그릇인 술두루미라던가 탁주같이, 그 시대의 음주 문화가 잘 드러나서 흥미로웠다. 그들의 자연 경치에 대한 찬미는 아무래도 힘든 일을 겪은 자신들에 대한 스스로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유람 도중에도 나라를 걱정하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장 흥미로운 건 고경명이 의병을 모으면서 호남 지역을 상당히 찬미하는 글을 썼다는 점이다. 다른 책에서 본 안동에 관한 글인데, 서울에서만 선비를 뽑다보니 지방에서 선비 한 명만 나와도 굉장히 좋아했던 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고 말했었다. 언젠가는 그 지방을 오랫동안 여행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경명과 그의 아들들, 호남 지역민들이 그렇게까지 자부심을 가지는 그들의 애국 활동이란 것들이 대체 무엇일까. 그 흔적을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문득 박지원이 떠올랐다. 나는 그가 결국 국민의당을 점령하고 서서히 호남당으로 개조시키려 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고경명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호남 사람들을 모아서 용감히 싸우다 결국 아들 하나를 나라에 바치고 자신도 전사했다. 하지만 요즘의 호남 사람들은 권력에 눈이 멀었던가, 호남 토박이의 성공에만 초점을 두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호남 토박이 조상들이 어떤 심정으로 활약을 떨쳤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또한 이제부터라도 이 후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살펴서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우리나라가 되었으면 한다. 대부분은 윗대가리들에게 찍혀서 시골로 반은 쫓겨나고 나머지 반은 생계에 곤경을 겪으면서 사는 듯했다. 내 외할아버지도 현충원에 계신다. 국가유공자가 국가유공자인지 의심되고 공이 아니라 계급을 가지고 성과를 왈가왈부하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P. S 본인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화장하고 현충원에 모셔짐. 근데 이놈의 국가가 예전에 장교이셨던 분을 계급을 슬쩍 내려서 표기한 거임. 나도 그렇고 우리집 외가 핏줄이 성격 좀 더러우니까 어지간히 군대에서 미움받았나 봄. 근데 전남친이랑 현충원 갔었는데 계속 무덤 위치랑 계급 거론하면서 거품물어대는 거임.
니 양심에 펙트를 따져. 멀쩡한 사람 사기꾼 만들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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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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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는 안 믿어요. 하지만 우리 관주는 믿었어요."

 

  

흥미로운 점이 세 가지가 있었다.

비극적인 전개는 제목부터 안녕 절망선생이 생각나면서 충분히 예견되었다. 

 

 하나는 이 단편에 출현하는 여성들이 대부분 술을 마시면서 담배도 피웠다는 점이다. 안 피우는 사람은 딱 실내화 한켤레에서 미모로 강남을 주름잡는 사모님 두 사람이었는데 둘 다 상당히 비극적인 전개로 끝났다. 한 명은 대부분 두 집 살림을 한다고 소문난 비행기 조종사와 결혼해서 아이 없이 살고 있고, 또 하나는 성병에 걸렸다는 암시로. 주변에 오로지 술에 빠져 사는 분과 성병으로 자궁을 다 들어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오는 이상 이 이야기도 남 일 같지 않다;;; 책을 유심히 보다보면 술도 적당히, 담배도 적당히, 연애도 적당히 해 본 독신 여주인공이 그나마 행복하게 오래 사는 듯하다는 느낌이 든다. (혹은 소설 중 하나인 이모에서처럼 그런 여자에게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기도 한다.) 다들 하나에만 중독되지 말고 골고루 해보며 삽시다.

 두 번째는 집요하게 작품들을 이어가지만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는 점이다. 비자나무 숲이란 소설집의 소설 중 하나인 길모퉁이라는 책에서 빚 때문에 위기에 몰리는 미용사 여자가 등장하는데, 실내화 한켤레에서 다시 그 미용사가 등장한다. 귀퉁이를 연상시키는 단어(원시)와 거울에 거꾸로 비치는 상도 다시 나와서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하지만 미용실은 길모퉁이 미용실보다 더 커진 느낌이고, 비자나무 숲을 보지 않았다면 전혀 그 친숙한 느낌을 알아보지 못할만큼 말을 아낀다. 제주도가 약간 우리나라 내의 일본 분위기를 풍긴다던 누군가의 말이 생각났다. 안녕 주정뱅이에서도 그런데서 미약하지만 일본 작풍의 냄새가 난다. 예를 들어서 일본의 이루마 히토마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가 쓰는 소설은 순문학 라노벨 느낌으로 계속 작품들을 연관지으려 한다. 예를 들어 이 블로그에서도 소개한 거짓말쟁이 미군과 고장난 마짱이라는 책에서 소녀와 탐정 소년이 아주 잠깐 나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나중에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이 나온다. 그리고 그 소설을 토대로 또 다른 장편소설을 쓰기도 하고...

 비자나무 숲에서 가지 않은 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그렸다면 안녕 주정뱅이에서는 가기 싫은 자리에 억지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선 비자나무 숲을 그려냈던 시절의 작가보다 어딘가 조금 더 성숙해 보인다고 할까. 그러나 확실히 그 날뛰는 비자나무 숲을 읽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좀 루즈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삼인행에서만 노골적인 분위기가 드러날 뿐이고, 나머지는 마치 제임스 조이스마냥 결정적인 장면에서 말을 숨기고 감춘다. 그러면서 그 모든 걸 '비밀스러운 여성'이란 단어로 얼버무릴 참인 듯한데, 사실 남성들 중에서도 그런 여우같은 인간들 꽤 있다. 비자나무 숲 중에서 꽃잎 속 응달에 나온 것과 같은 민첩한 인간들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왜인진 모르겠지만 이 소설에선 등장하질 않는다. 술을 마시고 나서 둔해진 주인공들이 그런 부류들을 제대로 캐치해내지 못한 건지. 토미노 감독처럼 나이가 드시니 약해지신 건지. 작가가 혹시 가까운 사람에게서 '넌 너무 예민하단 말야' 같은 지적을 듣고 수그러든 건지. 다음 작품은 이보다 조금 더 기민해졌음 하는 바이다. 나는 그녀의 자기비하가 아니라 그 안에 숨겨진 그녀의 날뜀과 노골적인 예민함이 좋았다. 어쩌면 내 성격이 날뛰다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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