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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가 기어간 자리는 왜 은빛으로 빛날까
하재일 지음 / 다리미디어 / 2006년 5월
평점 :
절판
즐거운 사무실
하재일
창밖에 새들이 전깃줄을 뜯어먹고 있다
푸른 전봇대를 뿌리째
뽑아 서로 나눠 먹고 있다
사이사이 태양을 컵에 따라
콜라처럼 부글거리는 오후의 햇살을 잘라
가득 부어 서로 마시고
있다
흰 백묵이 학생 하나를 죽이고 있다
노란 백묵이 이어서 한 여학생을 죽이고 있다
빨간 백묵이 염색을 한 남학생을 다시
죽이고 있다
오래 묵는 책들이 의자를 뛰어넘어 갈색 들쥐로 변해
벽면을 물어뜯으며 주체할 수 없는
살의의 흔적을 여기저기에
찍는다
컴퓨터 자판이 사납게 뛰어다닌다
마포자루를 잡고 지나가는 행인을 마구 때린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은 한쪽
어깨를
필사적으로 방어하지만 피할 길이 없다
휴렛패커드 레이저 프린트기가 땀을 흘리며
온종일 벽돌을 져 허공에
나른다
그때마다 쾅쾅 심하게 내려치는 해머 소리
누군가의 대가리가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불의의 방문객이 계속
찾아온다
불에 단련된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 방문객을 자기가 맞겠다고 결투를 청한다
그러자 빨강 머리 여자가 지나갔다
그러자
노랑 머리 여자가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파랑 머리 여자가
잎이 다 진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뽑아
우둑우둑 씹어먹으며
지나갔다
증축 공사장에서 철근 두 개를 단숨에 먹어 치운
90킬로그램이 넘는 비만의 파리가 허기를 채우려
날쌔게 날아와
다시 가위를 먹는다
면도칼, 자, 테이블까지 잘게 썰어 먹는다
목이 타는지 이번에도 오후의 태양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킨다
철제 캐비닛이 도끼날에 찍힌 장작마냥 떨고 있다
천장에 붙은 붙박이 선풍기가 하얗게 질려 있다

일단 이 시에서 달팽이가 나온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집 없는 달팽이 중에서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진물 흘린 자국이 있다 맨몸으로 문질러댄 전신의 고통일까 아무 곳에도 제 몸
하나 숨길 데가 없어서 일찍부터 이런 흔적을 만든 것일까 나는 집 없는 달팽이일까
이전의 내용: 아내랑 반지하에서 사는데 여자가
곰팡이 퇴치에 매달리다 폐렴 걸려서 이사. 볕 엄청 잘 드는데로 가서 애를 낳았는데 너무 햇빛이 잘 들어서 황달 걸림. 급히 이사
생각중.
이렇게 시인은 자신의 신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위에 내가 마음에 드는 글을 보면 사회 이야기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아내가 살아온 길에 대해서도 아내의 침묵 속에서 열심히 유추해보고 있다. 그 모습이 정말 달팽이가 뿔을 잔뜩 치켜들고 교신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서 귀여웠다고 할까.(?) 대부분의 몽환적인 장면은 과거에 대한 회상에서 기인한다. 김사인이 진행하는 한 팟캐스트에서
'농촌 것들은 예전엔 이런 저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다 황폐해졌다는 회상에서 시를 쓴다'는 식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럴듯했다. 하지만 이
시인의 시는 평론가도 그렇게 말했듯이, 자신의 유년시절을 마냥 좋은 과거로만 그리지 않는다. 인간보다는 자신이 보았던 자연의 생물들만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강원도 속초에서 포켓몬고가 우연히 실행되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곳으로 가고 있다고 들었다. 자연 환경이
좋아져서 모바일상에서 뜨는 포켓몬보단 곤충들과 물고기가 많아졌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그랬다간 어차피 또 다시 멸종되겠지 생각되어 입맛이 쓰다.
모바일에서의 포켓몬은 사람들이 포획하고 또 포획되도 무한생산될까? 모바일에서의 자연은 인간의 횡포를 무한히 견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