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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60
이제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1월
평점 :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난 언제나 감자의 다양한 조리법에 감탄하곤 했지. 굶고 삶고 찌고 볶고 튀기고 데치고 으깨고 부치고
끓이고 죽이고 묵히고 익히고 말리고 밀리고 울리고 불리고 부수고 밀치고 망치고 뭉치고 상하고 멍들고 짓누르고 짓무르고 회피하고 보류하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묻고 답하고. 그것이 싸구려 인생을 대변한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 흘러넘친다는 건 이미 전락했다는 말이니까. 어디에서
어디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느새 떠내려왔다는 거지. 원치 않는 어떤 곳에 놓여 있다는 거지. 그날의 우리가 그랬었지.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때 넌 어쩌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니. 맛없는 포테이토샐러드를 먹으면서. 하릴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테이블 위로 일렁이는 희미한 불빛을 남모르게 좇으면서.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황금알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무당들을 모아놓고 방송을 했는데 어떤 사람이 트랜스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음이 반복되면서 고양되는 무아지경의 경지가 집중력을 키운다나. 만약 그 말이 맞다면 이 시집도 그런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 시인은 항상 시를 지을 때 단어를 약간 바꿔가면서 문장을 반복하는데 소리내서 읽으면 정말로 노래를 하거나 굿을 하는
느낌이었다. 맘에 드는 시구도 정말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고심 끝에 이 시를 베스트로 꼽았다. 시에서 의미를 찾는 걸 싫어한다는 시인과 독자들에게는 심심풀이 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에서 (여성) 시인분이 전남친의 시각에서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서로가 지긋지긋해지는 그 상황을 설명하려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시들은 죽은 검은 개의 기억과 겹쳐서 마치 서로 손을 놓지 않을 것처럼 손을 꼭 잡고 다니던 젊었던 때의 연애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은 강한 사람에겐 강하고, 약한 사람에겐 약해야 참으로 바른 인생이라는 생각이 요즘에 자꾸만 든다. 시 뒤에 있는 평론에서
그렇게 말했듯이, 소통의 강요는 마음이 섬세하고 연약한 사람에게는 이데올로기의 강요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해도 얼마나
강할 것인가. 사이코패스만 아니라면 거의 모든 사람에게 잠깐이라도 힘을 빼도록 만드는 건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대부분의
남자는 그녀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두려워하고, 대부분의 여자는 그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는 걸 두려워할 것이다. 그에게는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웃는 얼굴이 아니라면 가치가 없으므로, 그녀가 상처받아서 우는 얼굴은 진작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모든 상황에
처했을 때 냈던 모든 목소리를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말이다. 눈에 병이 들었던 개의 어둠을 상상하는 시인의 머릿속에
간헐적으로 찬란했던 빛의 시절이 비치는 현상은 그런 필모그래피이다.
사람은 항상 웃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나는 내
밑에도 위에도 좌에도 우에도 사람들이 둘러싸서 속으로 울음을 삭히고 있음을 이젠 조금 알 수 있다. 나는 그 감정에 민감해지고 싶다. 점점
메말라가고 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그들의 절망에 같이 분노하고 같이 눈물을 흘리고 싶다. 내 감정에 특별한 색깔을 부여하고 싶다. 이름을 붙이지
않거나 다중의 이름을 붙이고 싶다. 우리는 울면서 웃거나 울면서 웃을 수 있다. 심리학 혹은 과학을 종교처럼 맹신하는 사람들이 사물에 이어
감정에 함부로 기준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이에 저항하는 삐딱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져서 우리의 심장을 굳게 만드는 회색 콘트리트를 몽땅 부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네가 목숨을 걸고 매달리는 컴퓨터와 문명이 없어지는 때, 아무 욕망이 없는 미답의 영역에서 나는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언젠가 꿈 속에서 너를 보았던 것처럼. 아니면 내가 아무리 손을 뻗어 빛을 비추어 주려고 해도 나의 뜻이 닿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여전히 칼을
닦고 있을까. 추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구상만 주장하다 결국 괴물이 되어버린 현실의 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