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물의 나라 1 박범신 문학전집 13
마더북스(마더커뮤니케이션)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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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씨발
ㅡ2012년 12월 19일

조용명

다수에 대한 미련을 버리자.
다수가 되고 싶어
숨겨왔던 말들.
참아왔던 행동들.
왜 숨겼을까.
왜 참았을까.
그걸 부끄러워하자.

인간은 멸종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가난해져야 한다.
노인들은 빨리 죽어야 한다.
너희는 독재다.
너희는 부정부패다.
너희는 야합이고 병신들이다.
우리가 옳다.

눈 동그랗게 뜨고
주먹 쥐고
손가락질하며
큰 소리로 말하자.
에이 씨발
죽일 테면 죽여라.
니들 맘대로 해 봐라.

  

조용명 씨의 시집이다. 나이가 들어가서 그런지 몸이 썩어들어가서 그런지 안 그래도 별로 없는 머리칼이 점점 가느다래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최근 나이에 관한 책 자주 본다. 저자가 그래도 양양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같이 살고 그 분들에 관한 시도 쓰고 하는 거 보면 부럽다. 나이 들어서 삶의 낙이라 할 만 한게 인테리어랑 친구와 같이 사는 것이라던데 시인은 이 둘을 다 이룬 것 같다. 농사 지으면서 녹색 속에서 소박하고 깔끔하게 사는 게 최고의 인테리어 아니겠는가.

 

 직설적인 문체가 좋다. 그러나 왜 나이가 들수록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는 시에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우파가 정권을 잡았던 당시의 통분은 드러내지만, 정말로 사적인 일은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 안 좋은 일은 더욱. 친구들의 이름을 죽 나열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삶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을 뿐, 쓰여져 있는 건 그들의 현재 삶이다. 그리고 먼저 죽은 그의 동료들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왜 죽었는지는 더욱 안개에 드리워져 있다. 하얀 거짓말은 어쩌면 그런지 아닌지를 명백히 말해주지 않아서 말을 듣거나 글을 읽는 상대방을 추론에 빠지게 만드는 기법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짓말은 좋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박성진 님의 숨이라는 책도 잘 썼다 생각하지만 내 취향은 확실히 이런 책이다. 뭔가 단순하고 갑갑하다는 느낌도 들지만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꿈에 가득찬 눈으로 막힘없이 설명하는 그의 말투엔 아직 희망이 배어 있다. 나이를 초월한 건강함이라 할까. 사실 이 시들은 아직 출간이 안 되었고 잡지에 연재한 시들을 책 비슷한 형태로 엮으셨다고 한다. 이왕이면 출판사에서 소속을 밟아서 정식으로 출간하셨음 하는데...

 

 물의 나라 (인상적인 시들+음악.): http://vasura135.blog.me/220967089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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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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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밤마다 초콜릿과 라면을 깨먹고 잠이 들지. 냉장고에 차갑게 식은 콜라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어쨌든 나는 옛날로 돌아가지는 못해 너는 요즘도 털이 젖은 고양이처럼 새벽에 돌아오니?

정육점에서 경품으로 받은 독일제 식칼 세트가 맘에 들어. 검고 매끈한 칼자루를 잡으면 가슴이 뛰지 그러나 이 많은 칼들은 다 어디에 쓰는 걸까 나는 다만 맥주가 마시고 싶을 뿐인데

이 밤에 협주곡은 정말 어울리지 않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차가운 물결, 스커트 아래로 너의 다리가 시릴 거야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칼자루를 놓쳐본 적이 없고

나는 괜찮아, 나는 돌아갈 수가 없어, 스탠딩 코미디를 보며 키득거리고 오늘은 두 시간이나 요리를 했지 언젠가 빛나는 저 독일제 마크를 너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너는 지금쯤 화물열차 마지막 칸에서 까만 눈을 빛내고 있을 거고 그 강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려준 건 너였던가? 너는 계속 달릴 거고 나는 초콜릿과 땅콩을 씹어 먹어, 안녕

 

 

요리왕 비룡하면 다들 미미를 떠올리는데
나는 그 만두명인 천봉 이야기가 떠오르고
(웃는 만두가 나옴. 그 화 보고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만두 던진 그 장면 찾아서 유심히 봤었음.)
그 다음으로 무시무시하게 큰 칼 들고 야채를 마구 썰고 있는 비룡이 떠오름.


 나 아직도 야채 썰다가 손을 썰거든. 진짜 존경스러움.
 그러고보니 어떤 병원에서 짤리고 나서 울면서 채칼 쓰다가 손을 갈아버려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손가락에 붕대를 휘감고 있었다. 

 그 꼴로 약속을 지킨답시고 내가 살던 연세대 앞까지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그 만나기로 약속한 어떤 분이 약국을 찾으러 뛰어다녔었지. 그 분은 내가 곁에 없는데도 잘 지내고 있을까.

 

  

영원한 것은 둘째치고 무엇 하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없다.

 우리 몸에 있는 피부세포는 수없이 많지만, 바람만 불어도 조금씩 밀려나간다. 내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구름은 조금씩 움직인다. 내가 보았던 왼쪽의 구름과 지금 보고 있는 오른쪽의 구름은 같은 구름이다. 구름이 이동해갔을 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구름과 지금의 구름은 정말 같은 구름일까? 정말 나는 오 분 전에 구름을 보았을까? 기억은 특수한 장애가 있지 않은 한 자동적으로 흐릿해진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은 힘든 일이 있어도 그걸 잊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얄궂은 일은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점점 기억하는 자에게 유리하게끔 왜곡된다는 것이다. 화자인 그녀는 느릿하게 뛰어가는 주자이다. 모두들 그녀를 제치고 저 앞을 뛰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이 나쁘기 때문에 쉽게 그를 잊어간다. 적어도 그 기억을 시로 담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 속의 당신들은 화자의 콜렉션으로 남아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할 수도 없을 만큼 흐릿하게 증식해나간다. 화자인 나도 증식해나간다. 화자들과 당신들을 너는 보고 있지만 쉽게 그 안에 개입할 수 없다. 시 속의 구절이 너무나 담담하게 진행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그런 시들로 뒤덮여있다.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시인은 그 예감을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 시집에는 부당한 시스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어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그래서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노래한다. 당신과 그녀 자신만 알고 있는 특정한 날짜들을 거론하며.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당신이 노래로 모든 걸 전달하기엔 요원하다. 길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정물화처럼 더할 나위없이 깔끔한 시집의 이미지엔 고양이도 너무 잘 어울리지만, 아무래도 너무 곳곳에 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신 난 그녀가 쓴 영어단어들이 좋다. 마치 가사는 간단하지만 음색은 단조롭고 음울한 팝송노래같다. 영어에서는 헬로와 굿바이가 분명한데 한국말엔 왜 애매한 안녕이라는 한 마디밖에 없을까. 네가 말한 안녕은 내가 말한 안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가. 시집에 갇힌 당신은 그 시집 안에 가만히 서 있고, 화자인 나는 다음으로 이동해간다. 화자 안에서는 항상 이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던 그가 처음으로 이동하지 않는 순간이다. 화자는 반복해서 노래함으로서 주술을 건다. 그를 무한히 자신의 아래로 추락시킨다. 안녕. 안녕히.

 

사계절의 상인

하재연

드러그 스토어
약병들은 알록달록하고 잡지들은 아주 얌전히 포장되어 있지 누군가 탕,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고 동그란 거울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감시하네 음악은 비밥 신경안정제들은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꽃밭 같아 카우보이 꽃 한 송이 들고 스윽 사라지네 빗소리 사이로

사계절의 상인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바꿀 수 없네 형체를 바꾸는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 흘러가는 사람들 이 거리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발견되고 나는 기분 좋은 공기야 윤기 나는 파프리카를 한 봉지 담아주면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그들은 저녁 식탁을 차리러 돌아가고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바꿀 수 없네

2인용 볼록 무늬 소파
14인치 TV, 포터블 시디피, 덴마크로의 비행, 눈 내린 잣나무들, 닭고기덮밥, 도시락, 단단한 머그컵, 높은 창문 광장의 빗소리, 2인용의, 흰색 볼록 무늬 소파, 자명종 시계, 야광 시침과 분침의 우주, 어둠 속에서 숫자판은 보이지 않아 짧은 바늘과 긴 바늘이 조용히 움직이고 우주를 가로질러 건너편에서 푸드득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원형 도서관
천장의 공기가 1층까지 떠돌고 있는 도서관에서 아이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고 있다 책장에는 백년 전 아이의 지문이 남아 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도서관 천장은 하늘로 뚫려 있다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때까지 도서관 사서는 바코드를 찍는다 그리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때까지 아이는 발을
꼼지락거린다 탕, 누가 나간 흔적이 있다

 

설명이 필요한가?
그냥 시가 전반적으로 다 카우보이 비밥 이야기 아닌가 싶다.

 

시인의 말

너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비틀스의 노래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음악일까?

2006년 초겨울
하재연

 

 이전에도 블로그에 소개했었던 Beatles의 Hello, goodbye 가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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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쓰세영 - #너에게_말하는_대신_시로_썼어
김세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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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말이지만

항상 생각하곤 해
너의 이름이
사랑이었다면,

예쁘다는 표현을
이 세상에서
너한테만 쓸 수 있다면,

흔한 표현이지만
마음은 흔하지 않기에
예쁜 너를 나는 사랑해

 

 시쓰세영은 시집인가?

 

 근데 이거 쓰면 다시 내가 일하는 곳은 동네서점인가?로 돌아가는데...
 게다가 왠지 자꾸 시쓰세영이 시집이 아닌 이유를 위주로 찾게 된다. 아... 복잡해지네.
 김세영 님은 나한테 모든 사람이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치만 내가 시를 쓸 수 있나? 그리고 시와 글의 차이는?
 소설가와 작가의 차이인가.
 내가 뭐 읽어보시집 같은 책들을 즐겨보는 것도 아니고 되려 현대시 미래파 시들을 즐겨 보는 편이다만 가끔씩 보면 좋은 걸 알고 있기에, 최대한 사랑시집 같은걸 구석에 들여놓고 시를 찾는 고객들에게 말한다. "이게 시집 코너입니다. 시에요." 난감한듯 안색을 찌푸리며 좀 더 고급스런 시를 원한다고 말하는 고객들을 보면 나도 속상하다. 알고 싶어진다. 왜 이들은 제대로 시 취급을 받지 못할까? 읽기 쉬운 시들을 좋아한다면서 왜 시쓰세영은 시집이라고 부르기 꺼려할까? 다시 시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째 '그들이 말하는' 시란 무엇인가? 로 되물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많다.

 

 이 책을 보다보면 일단 한남들이 연애에 너무 매진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게 마치 자신의 남성적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음도 없는데 솔로인 게 싫어서 어떤 여자와 사귀자고 해놓고 카톡도 별로 주고받지 않다가 다른 여자가 생기면 헤어지는 경우를 최근 너무나 많이 보았다. 낭만주의 귀족들이 아! 내가 사랑에 빠졌다니! 사랑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에서 배덕감을 느끼니 내가 이렇게 그리스 영웅 같다!라는 자뻑에 가까웠다면, 한남들의 그런 특유의 행동은 사회적 인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랑도 뭣도 아닌 가장 최악의 케이스로 보고 있다. 일단 (이성애를 하고 있다면) 남자는 사귀는 여자를 정말로 사랑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는지 잘 생각해볼 일이다. 이 책은 소시민의 연애를 강조한 데서 현실을 드러내준다는 의미가 있지만, 강조하느라 문학적 깊이가 너무나 얇게 드러났다.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지적으로 수준이 낮아지면, 자본주의라는 달콤한 꿈에게 쉽게 지게 되고, 그저 공장에서 찍어낸 인간이 되어 살 수밖에 없다. 확실히 애니메이션에서도 일상물이 상당히 인기를 끌고 있으며, 판타지도 중세 영웅들이 현대 사람들의 일상에 감탄하는 내용이 많다. 그러나 정말 그들이 현대 문명에 그렇게 감탄하기만 할까?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보잘 것 없는 것들은 아무리 내세워봤자 점점 비참해질 뿐이라는 걸.

 

사랑한단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하루를 마감하며 나는 기대했어

너와 시시콜콜하지만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길

 

그렇지만 기대와 달리

5분에 한 번, 10분에 한 번

성의 없이 오던 그 답장들

 

나에 대한 귀찮음과

나에 대한 무관심을 말해주는 것 같아

 

서운한 마음에 사랑하냐고 물을 때면

언제나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너

말론 사랑한다면서 행동은 그렇지 않은 너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단 걸 나는 알아

항상 니가 하던 말처럼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항상 니가 하던 말처럼 나를 대해주길 바래

 

 

 

 

 

사랑을 하면 좋다. 몹시 좋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삶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나쁜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고칠 생각을 하지 말고 당장 걸러내야 하고, 집안의 반대가 심하다거나 그 집안이 나와 인생 설계가 맞지 않는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성애의 경우) 남자 쪽이 굉장히 똑똑해야 한다. 세상에 인간관계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그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병 걸려 죽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들리지 않은가. 근데 정말 과학도 발전했다는데 인간관계 해결해주는 로봇은 왜 안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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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키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332
신대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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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중에서

2. 바이칼에선 누구나 한 영혼?

우리는 허공으로 숨 몰아쉬고
높은 데로 오르고 오르다가
수심으로 푸르게 숨쉬다가
그대 눈으로 알혼 섬을 보고
내 눈으로 후지르를 생각하고
한 영혼이 되어 호수를 건넜습니다.

 

 

나름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은 건 학창시절이었는데, 그 시기가 끝나갈 무렵인 고3시절 팬픽을 쓴 적이 있다. 강철의 연금술사 하보로이 커플 중심 BL소설이었는데, 전쟁 이야기였다. 나는 내 빈약한 상상력을 넘어 가장 끔찍한 전쟁 장면을 그려내려 노력했었다. 결국 졸작이었겠지만 당시 쓴 많은 팬픽 중에서 그나마 무난한 작품으로 통했었다. 다른 팬픽들은 개그물만 제외하면 정말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당사자인 나만 알고 있는 내용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처음 시 부분에서는 잘 티가 안 난다. 약간 난해하지만 평범하게 러시아를 여행하는 이야기로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의 군데군데마다 죽음의 분위기가 어려 있는 건 숨길 수 없었다. 평온하고 따뜻한 벌판에서 잔혹한 전쟁이 펼쳐졌을 때 군인이었던 시인은 그 언밸런스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달아나듯이 춥고 거친 황야로 뛰쳐나온 그는 자연의 척박함에 자신을 온통 맡겨버린다. 아주 늑대소년이 되어버린다. 그의 마음 속에 물이 차오를 때였던가. 그는 신나게 자연을 예찬하는 시를 쓴다. 그러나 인간일 때의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고 속박되어 있는 그는 자꾸만 자연을 사람으로 본다. 다시 과거의 사람을 찾고 싶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여 제대로 부르고 싶어 알래스카 벌판에서 천지를 부여잡고 백두대간을 미끄러져 내려가 한계령에 걸터앉았다가 지리산을 향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긴다. 러시아에서 배운 주문을 읊는다. 아이두세 요하르 아이두세 헤이부룰라. 기적같이 그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번은 전의 독에 가득찬 회상과 다르다. 기억 속 영혼들은 시인을 빙 둘러싸고 강강술래 춤을 추며 정화된다. 이 시는 PTSD를 극복하는 과정이며, 또한 늑대아이가 늑대인간이 되었다가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시집 자체가 대형 서사시다.

 그러나 영혼들이 모두 떠났을 때 그의 마음 속에 소년만 남은 건 아니었다. 전쟁에 마음이 쪼글쪼글 말라붙어 전쟁이라는 현실 생각밖에 없던 시인. 그의 마음에 물이 차오르고 젖어들자 돌연 할머니가 나타난다. 할머니는 벌하고 꽃한테만 일 시키지 말고 골도 파고 물도 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페미니즘이 뭐 별건가. 남자들의 전쟁과 피로 얼룩진 과거를 용서하고 여성들이 대신 앞으로 바르게 나아가겠다는 사상이다. 그 사상은 할머니의 눈주름을 타고 내려 시인의 아내에 이르고 또 그 다음 딸이나 며느리로 계속 이어지리라. 그리고 그들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겠다는 시인의 다짐이 사이라는 훈훈한 시 두 편에 들어있었다. 내가 시에서 받은 기타 느낌들은 죄다 황광수라는 사람이 시집 뒤 평론에서 썼다. 제법 솔직하고 뛰어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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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시의 목록 - 블랙리스트 시인 99명의 불온한 시 따뜻한 시
안도현 엮음 / 걷는사람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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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라

최세운

흰 말들이 달려 나갔다. 오르간은 비어 있었다. 라라는 예배당 가운데에 앉아, 달리는 말들을 세고 있었다. 말들이 사람들을. 차례차례 밟아 쓰러뜨리는 것을. 라라는 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라라는. 긴 호수가 되고 있었다. 라라 옆에서 라라가 말을 했다. 강림을 알리는 차임벨은. 확고해간다. 성전의 커튼은. 죽은 이교도의 튜닉을. 떠오르게 한다. 라라 옆에서 라라는 들었다. 성호를 그으며 사라지는. 놀이터와 수몰된 마을과 비대칭이 되는 망루를. 사람들은 라라가 펄럭거리지 못하게. 손목에 밧줄을 감았다. 교부가 줄을 당겨 거대한 향로를 흔들 때. 라라가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들의 귓속에서. 모래가 흘러나왔다. 라라는 죽지 않는 라라. 라라는 죽지 않는 라라. 라라를 처음 본 것은 손등이었다. 창밖에서. 해변의 윤곽들이 재로 질 때. 라라는 춤을 추었다. 라라는 폐가의 창문. 라라는 생크림. 라라는 웃고. 라라는 벽에서 들린다. 믿음에 가까이 있거나 황홀경에 휩싸인 칼과 포크를 쥐고서 흘러내리는 낙원. 라라는 껍질. 라라는 화산재가 쌓이는 복도. 얼굴을 쓸어내리는 목동. 혹은. 목공. 믿음에 가까이 있거나 황홀경에 휩싸인. 라라는 단 위에 서서. 울고 있는 내 얼굴을 매만졌다. 라라 속에서 눈이 그쳤다. 흰 말들이 강대상을 돌아. 차례차례 사람들을 밟아 쓰러뜨리는 것을. 라라는 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불을 당겨 내가 정신없이 태워질 때. 나는 라라의 이름을. 불렀다.

  

이 책이 지어진 계기는, 지금은 누구나 알겠지만 블랙리스트로 시작되었다. 문단계에 정치와 관련된 모임에 참가했거나 수상한 어조로 시를 짓는 문인들의 이름이 정부에 리스트로 올려져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다들 설마했지만 전 대통령이었던 박근혜의 비선 실세였던 최순실이 JTBC 사장에 의해 끄집어내지면서 있을 수도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리스트가 상세히 공개되면서 분노는 극에 치달았다. 자신도 그 리스트에 끼워 달라고(...) 조롱하는 가수들이나 아마추어 문인들도 반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으리라 생각한다. 몇몇 여성에게 추행을 보여 쫓겨난 문인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에 꽉 차있기 때문이었다. 금지된 것일수록 더욱 맛나 보인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문제는 아까 위에서 말했듯이, 여성에게 추행을 저지른 문인이 낄 만큼 리스트가 너무나 방대했다는 점이다. 처음엔 유명한 어느 시인이 이 시집을 편찬했다는 말을 듣고 구입하기를 조금 망설였다. 너무 메이저한 책이 아닌가. 그러나 생각보다 메이저하진 않았다. 지역 특색이 보수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밖에서 들고 읽으면 유독 사람들의 시선이 책등과 내 손등을 쿡쿡 찔렀다. 아버지에게 회식 때 말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어머니와 통화를 할 때,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던 시선보다 어찌보면 더 노골적이었던 것도 같다.

 책을 펴보면 독자들의 기대대로 시국을 걱정하는 우울한 시들이 많다. 하지만 그 분위기를 확 깨뜨리는 시도 많다. 예를 들면 박찬세 시인의 시를 들 수 있다.

 

엄마의 초경

박찬세

열두 자식 중 열하나를 땅에 묻은 외할아버지는
하나 남은 엄마마저 열여덞이 넘도록 초경을 하지 않아서
말수 대신 술만 늘어갔다고 합니다
엄마가 초경을 하던 날
외할머니는 신발도 못 신고 외할아버지의 방앗간으로 달려갔다고 하는데
소식을 들은 외할아버지는 나르던 쌀가마니를 내던지고
친구들을 불러 술을 사셨다고 합니다
그날 꽉 취한 외할아버지는 붉게 물든 얼굴로
돼지고기와 브래지어를 양손 가득 사오셨다고 합니다
모든 게 더디기만 한 엄마에게
외할머니는 맞지도 않는 브래지어를 채워주셨다 하고
엄마는 그때만큼 맛있는 고기를 지금껏 못 먹어봤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의 제삿날이면 절을 하는 사 형제를 보며
엄마는 엄마의 초경 얘기를 하고 또 합니다

 

박찬세 시인은 파문 팟캐스트 방송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남들은 다 욕해도 나는 좀 동경했음 ㅋㅋㅋ 미치려면 저렇게 작정하고 미쳐야지.

 

 아무튼 박찬세 시인도 세월호와 관련된 시를 써서 올린 적이 있다. 그 자신은 기발했다고 생각했던지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그 시를 읽으면서 살짝 지루함을 느꼈었다. 딱딱함까지 느껴지는 그 시는 박찬세 시인 특유의 끼가 없었다. 이 책을 편찬한 시인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그의 시 중 가장 재밌던 부분이었던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 시를 올렸다. 이런 의외성이 독자의 긴장을 풀어주고 다음에 나올 시를 기대되게 한다. 아직 자신의 시집을 내지 않은 신인들의 시가 많은 것 또한 이 시집을 읽는 즐거운 요소 중 하나다.

 그러고보면 박찬세라는 시인이 참여한 책은 올해의 좋은 시 2011을 제외하고 전부 다 가지고 있는 편이다. 좋은생각이라는 잡지에 연재하고 있다는데 거기에 실린 에세이들은 좀 가식적이다 싶은 게 있어서 항마력 딸리고(...) 아무튼 보지 않는 중이다.
지금 한창 유행중인 황인찬이 나오는 책들은 좀 귀찮아서 중도에 포기했는데 박찬세 시인 책은 꾸준히 모으는 중. 그러면 나는 그 시인을 존경하고 있는건가? 무튼 시집 내셨으면 했는데 여태 소식이 없어서 아쉽다. 그리고 왜 박찬세 씨 이름 검색하면 검은 시의 목록 책은 안 뜨는 걸까...

 

거짓말에 대한 맛

서정원

거짓말에도 맛이 있다
세상 온갖 은어와 말들을 빛깔나는 그릇에 담아 매콤한 맛의 비빔밥처럼 무뚝뚝한 옹기그릇에 멀건 곰탕 국물과 뜨거운 밥 한 공기를 말아 먹은 후 허무함처럼 찌그러진 깡통에 코를 틀어막고 마시는 쓴 약사발처럼
어찌 거짓말엔 이 맛뿐이겠는가

 

  

꽤나 연세가 있으신 듯한 시인이셔서 죠죠를 알고서 이런 시를 쓰진 않으신 듯하다(...) 그러나 일단 죠죠의 기묘한 모험 5부의 제일가는 명대사와 키워드가 많이 비슷해서 올려봤다.

 이렇게 이 시집에는 시국의 불행한 사태 하나만을 딱 집어서 시를 쓰지 않았다. 세월호 사건, 정치와 기업의 부정부패, 제주 4.3 사건... 생각해보면 이 나라는 예전부터 바람 잘 날 없었다. 사람들도, 아이들도, 노인들도 많이 많이 죽었다. 단지 지금의 사건이 이전의 수없이 많은 사건들과 같이 덮일 수 없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과 같이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뻗어나간 덕분이다. 종편이 만들어져 일정 정도 언론이 국가의 오랏줄에서 풀려난 덕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어두운 구석을 굳이 불을 밝혀 보려고 하며 장막으로 가려진 모서리를 굳이 들춰보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 덕분이다. 나는 그게 우리나라 시인들의 특성이라 생각하고, 그렇기에 우리나라에서 시의 유행은 멈추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세상이 혼란스럽기 때문에 시가 유행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달하기만 했다면 아무리 집안이 부자라고 해도 사람들이 굳이 돈이 안 되는 시인이란 직업을 그렇게 선뜻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자들이 강제로 역사와 기억을 지우는 게 그들은 어느 정도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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