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데이즈 문학과지성 시인선 327
하재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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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밤마다 초콜릿과 라면을 깨먹고 잠이 들지. 냉장고에 차갑게 식은 콜라가 있으면 더욱 좋지만 어쨌든 나는 옛날로 돌아가지는 못해 너는 요즘도 털이 젖은 고양이처럼 새벽에 돌아오니?

정육점에서 경품으로 받은 독일제 식칼 세트가 맘에 들어. 검고 매끈한 칼자루를 잡으면 가슴이 뛰지 그러나 이 많은 칼들은 다 어디에 쓰는 걸까 나는 다만 맥주가 마시고 싶을 뿐인데

이 밤에 협주곡은 정말 어울리지 않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차가운 물결, 스커트 아래로 너의 다리가 시릴 거야 나는 아직까지 한 번도 칼자루를 놓쳐본 적이 없고

나는 괜찮아, 나는 돌아갈 수가 없어, 스탠딩 코미디를 보며 키득거리고 오늘은 두 시간이나 요리를 했지 언젠가 빛나는 저 독일제 마크를 너에게도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너는 지금쯤 화물열차 마지막 칸에서 까만 눈을 빛내고 있을 거고 그 강물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알려준 건 너였던가? 너는 계속 달릴 거고 나는 초콜릿과 땅콩을 씹어 먹어, 안녕

 

 

요리왕 비룡하면 다들 미미를 떠올리는데
나는 그 만두명인 천봉 이야기가 떠오르고
(웃는 만두가 나옴. 그 화 보고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만두 던진 그 장면 찾아서 유심히 봤었음.)
그 다음으로 무시무시하게 큰 칼 들고 야채를 마구 썰고 있는 비룡이 떠오름.


 나 아직도 야채 썰다가 손을 썰거든. 진짜 존경스러움.
 그러고보니 어떤 병원에서 짤리고 나서 울면서 채칼 쓰다가 손을 갈아버려서 한 달인가 두 달인가 손가락에 붕대를 휘감고 있었다. 

 그 꼴로 약속을 지킨답시고 내가 살던 연세대 앞까지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그 만나기로 약속한 어떤 분이 약국을 찾으러 뛰어다녔었지. 그 분은 내가 곁에 없는데도 잘 지내고 있을까.

 

  

영원한 것은 둘째치고 무엇 하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게 없다.

 우리 몸에 있는 피부세포는 수없이 많지만, 바람만 불어도 조금씩 밀려나간다. 내가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구름은 조금씩 움직인다. 내가 보았던 왼쪽의 구름과 지금 보고 있는 오른쪽의 구름은 같은 구름이다. 구름이 이동해갔을 뿐이다. 하지만 과거의 구름과 지금의 구름은 정말 같은 구름일까? 정말 나는 오 분 전에 구름을 보았을까? 기억은 특수한 장애가 있지 않은 한 자동적으로 흐릿해진다고 한다. 그래야 사람은 힘든 일이 있어도 그걸 잊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얄궂은 일은 기억이 흐릿해지면서 점점 기억하는 자에게 유리하게끔 왜곡된다는 것이다. 화자인 그녀는 느릿하게 뛰어가는 주자이다. 모두들 그녀를 제치고 저 앞을 뛰어간다. 그러나 그녀는 기억이 나쁘기 때문에 쉽게 그를 잊어간다. 적어도 그 기억을 시로 담기 전까지는 그랬다. 시 속의 당신들은 화자의 콜렉션으로 남아 누가 누구인지도 구분할 수도 없을 만큼 흐릿하게 증식해나간다. 화자인 나도 증식해나간다. 화자들과 당신들을 너는 보고 있지만 쉽게 그 안에 개입할 수 없다. 시 속의 구절이 너무나 담담하게 진행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그런 시들로 뒤덮여있다. 불길한 느낌이 들지만 시인은 그 예감을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 시집에는 부당한 시스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들어있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그래서 환한 가로등 불빛 아래서 노래한다. 당신과 그녀 자신만 알고 있는 특정한 날짜들을 거론하며.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어서 당신이 노래로 모든 걸 전달하기엔 요원하다. 길은 걷잡을 수 없이 꼬인다. 정물화처럼 더할 나위없이 깔끔한 시집의 이미지엔 고양이도 너무 잘 어울리지만, 아무래도 너무 곳곳에 등장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대신 난 그녀가 쓴 영어단어들이 좋다. 마치 가사는 간단하지만 음색은 단조롭고 음울한 팝송노래같다. 영어에서는 헬로와 굿바이가 분명한데 한국말엔 왜 애매한 안녕이라는 한 마디밖에 없을까. 네가 말한 안녕은 내가 말한 안녕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인가. 시집에 갇힌 당신은 그 시집 안에 가만히 서 있고, 화자인 나는 다음으로 이동해간다. 화자 안에서는 항상 이동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던 그가 처음으로 이동하지 않는 순간이다. 화자는 반복해서 노래함으로서 주술을 건다. 그를 무한히 자신의 아래로 추락시킨다. 안녕. 안녕히.

 

사계절의 상인

하재연

드러그 스토어
약병들은 알록달록하고 잡지들은 아주 얌전히 포장되어 있지 누군가 탕,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고 동그란 거울들은 카우보이 모자를 감시하네 음악은 비밥 신경안정제들은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꽃밭 같아 카우보이 꽃 한 송이 들고 스윽 사라지네 빗소리 사이로

사계절의 상인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바꿀 수 없네 형체를 바꾸는 구름처럼 느리게 흘러 흘러가는 사람들 이 거리에서 나는 누구에게나 발견되고 나는 기분 좋은 공기야 윤기 나는 파프리카를 한 봉지 담아주면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 그들은 저녁 식탁을 차리러 돌아가고 아무것도 나의 세계를 바꿀 수 없네

2인용 볼록 무늬 소파
14인치 TV, 포터블 시디피, 덴마크로의 비행, 눈 내린 잣나무들, 닭고기덮밥, 도시락, 단단한 머그컵, 높은 창문 광장의 빗소리, 2인용의, 흰색 볼록 무늬 소파, 자명종 시계, 야광 시침과 분침의 우주, 어둠 속에서 숫자판은 보이지 않아 짧은 바늘과 긴 바늘이 조용히 움직이고 우주를 가로질러 건너편에서 푸드득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원형 도서관
천장의 공기가 1층까지 떠돌고 있는 도서관에서 아이는 발을 꼼지락거리며 책을 읽고 있다 책장에는 백년 전 아이의 지문이 남아 있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도서관 천장은 하늘로 뚫려 있다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때까지 도서관 사서는 바코드를 찍는다 그리고 아무도 태어나지 않을 때까지 아이는 발을
꼼지락거린다 탕, 누가 나간 흔적이 있다

 

설명이 필요한가?
그냥 시가 전반적으로 다 카우보이 비밥 이야기 아닌가 싶다.

 

시인의 말

너는 안녕이라고 말하고,
나는 안녕하냐고 말하지.
비틀스의 노래가 생각났다.
언제부터 알고 있던 음악일까?

2006년 초겨울
하재연

 

 이전에도 블로그에 소개했었던 Beatles의 Hello, goodbye 가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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