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사 특별편 해를 좀 먹는 그늘
우루시바라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1. 요괴이야기라기보다는 초자연현상이나 허깨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곤충이라고 하는 것들의 생김새를 봐서는 정말로 그냥 '곤충'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듯하다.

 2. 백귀야행같은 요괴물은 친근하고, 귀절도는 무섭고도 슬프며, 충사는 조용하면서도 어딘가 스산하다.

 3. 교훈.
 존재 자체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사라졌을 때 사람은 얼마나 무섭고 허전한가.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여 평소에 잘하고 잘 살자. 헤어질 때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4. 일식의 무서움.
 옛날엔 세상의 기이한 현상들을 신기하다고 보기보단 무섭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음.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세계적으로 행하는 종교적 의식은 무궁무진했음. 황금가지라는 책을 참조하면 사람을 먹거나 죽여서 바치는 행사도 있었다 함. 카니발과 봄축제에 한정되는 설명들이지만, 일식같이 보기 드문 현상이 발생하고 인간들이 집단멘붕에 빠졌을 때 그러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좋은 의식이던 끔찍한 의식이던간에 과학이라는 최근의 현상으로 인해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사라졌음. 그러나 간혹 과학을 이겨내면서 세상에 드러나는 초자연현상들로 인해 과학을 맹신하던 현대인들이 당혹스러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초자연현상들을 무시했다간 큰코다친다.
 
 5. 이 애니는 줄거리도 재미있지만,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일식의 연장으로 인해 점차적으로 무기력해지는 군상들의 변화. 시간으로 볼 때 현상은 몇 주밖에 유지되지 않은 걸로 짐작되는데, 히스테리와 신경질과 서로간의 불신과 여자들의 우울증 등등이 연달아서 줄줄이 사탕으로 표출되는 게 재미있다. 구스타프 융의 집단무의식 현상에 대한 예시로 사용가능할 정도. 몸의 사정으로 인해 거의 히키코모리가 된 소녀가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게 되는 과정도 어쩜 그렇게 섬세하게 그려졌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블루레이]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 LE Vol.1 - 한정판 (Blu-ray+CD) - Blu-ray + CD + 12p 해설집 + 클리어 케이스
신보 아키유키 감독 / 미라지엔터테인먼트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남친과 속초평생교육원에서.

 여태 저질 화면으로만 보다가 DVD가 나와서 풀화질로 보게 되니 적응이 안 되었다. 이번이 세번째로 보는 건데 마미의 기술 피날레가 저렇게 멋있는 줄 몰랐다(...) 저래서 꼴랑 3화에서 개죽음 당해도 시청자들이 마미마미하는 건가.
 
 일단 DVD는 6화에서 끝나며 이후 7화는 현재 애니플러스 유투브에서 무료상영해주고 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프로 중 하나이니 꼭 보길 바란다. 내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극장판도 있다.

 우로부치 겐을 알게 된 건 그 전이었지만 좋아하게 되고 그 사람이 쓴 소설 Fate Zero를 구입하겠다 결심한 계기가 마도카 마기카였다. 마법소녀(보다는 마녀물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를 다루고 있지만 내용은 많이 무겁다. 사실 그 무거움이 우로부치 겐 작품의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전개는 빠른데 결말은 뭔가 사람을 찝찝하게 만드는 게 포인트. 그렇다고 용두사미는 아니며 마무리는 깔끔한데 다만 내용이 그럴 뿐; 약간 처진 순한 눈을 한 여주인공이 기막힌 일을 당하는지라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스토리의 개연성에 대해선 호불호가 갈리지만 일본에서 한 때 유행했던 타임워프의 개념을 계속 이어주는 연결선이었다 하겠다. (이거 스포일런가?)

 

 여담으로 백합설정도 잘 나오긴 하지만 훈훈한 결말이라거나 직접적인 씬이 나오는 건 아니니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평행과 역설 - 장벽을 넘어 흐르는 음악과 정치, 개정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3
에드워드 W. 사이드·다니엘 바렌보임 지음, 노승림 옮김 / 마티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이드: 아도르노는 이렇게 말하지요. 음악에 벌어진 일은 음악이 가령 피델리오의 트럼펫 소리에서 알 수 있다시피 굉장한 부르주아지인 베토벤에서는 사회를 재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의 시대로 오면 음악은 대신 사회 속에서 아무런 기능도 담당하지 못하는 무능력만을 대변하게 됩니다. (...) 오늘날 음악이 혼을 빼놓을 정도로 복잡해져, 음악으로 하여금 사회의 반대축이나 균형축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도록 강요하는 비인간적인 사회를 고발하는 것이 현재 음악이 갖는 의미라는 것이지요.

요즘에는 자꾸 클래식만 듣게 된다. 일단 가사가 있으면 집중력이 엄청 떨어지는데 (요새 일어 중국어 영어 러시아어 왠만하면 다 알아들음.) 아예 모르는 이태리어 불어 이런거 나오면 그나마 일하는 데나 책 읽는 데 칩중이 되거든.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내 모든 시간이 독서모임, 책 읽는 시간, 아니면 팟캐스트 듣는 시간이라.

사이드를 보고 싶어 샀는데 자꾸 나는 바렌보임에게 눈길이 간다. 대단한 사람이다. 제목 평행과 역설도 저 분의 말에서 따온 듯. 다니엘 바렌보임이 다른 사람들에겐 좀 괴짜로 보이고 레비가 성자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만은 반대로 보인다. 그렇다고 레비가 히틀러에 대해 노골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니다. 그 분도 자신이 배운 만큼 침착하게 처신을 하고 있다. (혹은 그러려고 노력하는 게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서 명백히 드러나는 인종차별이 나에겐 무척이나 불편했다. 왜 인종차별을 받았으면서 다른 인종을 인종차별하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본 책에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분이 쓴 다른 저서를 읽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 점에선 '음악을 하는데 훌륭한 음악가가 무슨 인종이던 성격이 괴팍하건 어땠단 말이냐, 난 내 발전을 위해 음악을 하고 있고 니가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되지 왜 나보고 음악하지 말라 그러냐, 너보고 프라이버시를 아무렇지 않게 침해하는 양키놈이라 하면 넌 좋냐?'라고 쏘쿨하게 말씀하시는 다니엘 바렌보임이 존내 내 취향이다. 개인적으로 유태인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의 글귀를 하나하나 새겨보면 볼수록 그가 너무 좋아 미치겠다. 이런... 이렇게 보수가 되어 가나 ㅠㅠ 그렇지만 나도 애를 때린다거나 여자를 성희롱 하지 않은 이상 성격을 따지지 않고 음악이나 문학을 좋아하는지라.

팔레스타인 이야기가 간간히 나온다. 간단히 말하자면 보수주의자들이 세련되게 멍청한 소리를 한다는 건데, 멍청한 이야기인 걸 알면 비웃으며 스쳐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첫째, 겉모습은 싸움 없이 깔끔하게 가는 듯하니까. (사이드가 이 말을 꺼냈을 때 대체로 바렌보임은 대화를 회피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소 성숙하지 않아 보이긴 하다.) 둘째, 그게 멋져 보이니까. 셋째, 나만 아니면 된다는 인간의 본성. 넷째, 반박하면 내가 싸움꾼으로 보이니까. 다섯째, 주로 나이든 꼰대들이 투쟁하자고 외쳐대는 것 같으니까. 나는 참 젊은이들이 힘들어보인다. 앞으로 점점 더 힘들어질 텐데 이에 굽히지 말아야 하겠다.

달에 홀린 피에로 처음 들었을 때 너무 혼란스러웠는데 사이드가 베르그와 베베른까지 합쳐서 이방인의 음악이라고 간단히 정리해 버린다 ㄷㄷㄷ 좀 허무하긴 한데 이 이상 적절한 말을 찾을 수 없을 듯하다. 조성음악 이후로 쉰베르크의 무조 말고도 여러가지 조성에 대한 대안들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다 현대음악의 초석들이지만 그렇게 사이드로 빠져버린게 많이 아쉽다.

지휘자와 연주자의 역할 문제로 싸우기도 한다. 지휘자는 엄밀히 말해 현재의 음향 엔지니어링 역활을 사람이 도맡아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강세라던가 고음 중음 저음 영역대의 분포가 안정 되도록 신경 쓰는게 지휘의 기본 방침이니까. 표현의 역량은 연주자들의 몫이다. 음악에 있어 공연이란 개념을 완성시키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음악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단 나는 수학적, 공학적 접근을 우선시하는 편이다. 소리 자체가 일단 물리적인 현상으로 시작하니까. 실제로 프로듀싱도 그래프+수치로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여기서 나오는 결과물은 이런 정교함보단 더 감정적인 무언가를 이끌어낸다는게 음악의 양면성 아니겠나.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그렇지 음악에 대해 기대 이상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음악 때문에 산 책이 아니라서 굉장히 의외인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바그너가 멘델스존을 욕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어본다. 하기사 쓸데없이 국뽕만 강한 극보수주의자란 느낌은 있지만 나름 음악은 괜찮은데 ㅋㅋㅋ

한편 알면서 생각도 못해봤던, 바이로이트의 성과 폭력에 관련된 것들이 점점 심해진다는 문제도 제기된다. 좋아하는 오페라는 춘희 아니면 카르멘이고, 못지않게 고어가 나오는(?) 장르를 선호하는지라 정말 심각하게 고려해 본 적이 없다(...) 이건 앞으로 페미니즘이 뜨면서 자유로이 제기될 문제 중 하나라고 보긴 하는데 워낙 요새 오페라의 인기가 저조해서 말이다. 사이드의 말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어서 이 사람 존경할만 한가 긴가민가했는데 이 글 보면서 갓사이드로 인정한다. 사실 음악사 공부해보면 나오는 거지만 음악만큼 성 역활을 견고하게 잡아놓고 운영된 예술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미술이 표현의 분리라는 느낌이라면 음악은 역활의 분리라는 느낌..

갑자기 고전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읽는 방법을 실패할 수 없기 때문이란 명구가 떠오른다. 결국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닦아놓은 해석의 가이드라인과, 그 가이드라인과 다른 해석을 내놓아도 고전이라는 거대한 가치는 그마저도 무차별적으로 포용하기 때문인데, 고전의 문학가치적 정치력은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일면 사이드의 볼멘소리가 많이 공감간다. 그러고 보면 문단계가 그렇게 지키려 하는 순수문학도 고전에서는 그 입지가 뚜렷하니ㅋㅋㅋ

 

바렌보임: 모난 것에서 둥근 것으로, 남성성에서 여성성으로, 영웅적인 것에서 서정적인 것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음악에서는 경험할 수 있지요.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개념들을 총체적으로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경험할 수 있기에 음악이 더 좋다라는 걸 말하는 거 아닐까 싶다.


음악 내에서 저런 '표제'들은 언어 의미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모두 하나로 녹아드니까. 하지만 마지막 빼고는 이 모든 것을 과학으로 해결하는 지금은 음악을 재정의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긴 한데. 또한 너무 음악을 서사적으로만 바라본다는 점이 나랑은 안 맞는 듯 하다 ㅋㅋ 보수인사로 알고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반면 사이드는 책을 읽어나갈수록 호감도가 높아지는 측면이 있다. 특히 우리나라 음악평론가란 사람들이 들으면 개거품 물것같은 말을 많이 하는데 ㅋㅋㅋ 무슨 음악가 관련 자료라던가 국가상황 등등 이거저거 덧붙여서 더 클래식이라거나 이름 그럴싸하게 지어서 가격을 무지막지하게 한 뒤 책을 팔던데. 특히 음악 혐오던가. 제목도 참 그럴싸하지요? 솔직히 실망했음. 소설이나 계속 쓰실 것이지. 그들에게 옛날부터 에드워드 W. 사이드가 날렸던 일침이란 느낌이랄까. 아마 사이드가 주장하는 음악의 다양성이 현재 음악계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미술은 딱 한번 보면 인상이 전달되기 때문에 화력(?)이 빵빵한데 음악은 시간의 예술이다보니... 청자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릴 듯. 아직은 라이온킹 OST에 아프리카 음악을 쓴다거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게 현실이긴 하다.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몇 안되는 세상 것들 중 하나가 음악이다보니 희망을 가져본다.

 

팔레스타인 사람에서 이집트인으로, 다시 미국인으로 표찰을 바꾸어야 했던 사이드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그런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강원도 촌놈에서 서울 대학생으로, 다시 주변국 출신의 미국 유학생으로 신분을 바꾸면서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한 나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큰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여기서 강원도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맞은 편 벽에는 검정색, 흰색, 빨강색으로 그린 거대한 이 한 마리가 '이 한 마리는 너의 죽음'이라는 구호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2행시도 있다.

용변을 본 후나 식사하기 전에
손 씻는 것을 잊지 말 것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제목은 참 잘 썼다고 생각한다.


나도 책 내용 안 보면 파닥파닥 낚일 듯한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부제 '아유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에 주목하길 바란다.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태인 프리모 레비는 이과의 우등생이어서 실험실 일꾼으로 발탁당해 살아남게 된다. 그 과정을 적은 이야기다. 실상 다른 유태인 수용소에 대한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제목만 거창할 뿐. 하지만 독일어가 쓰여져 있는 게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번역자가 어감을 살리기 위해 그대로 냅둔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보는 독자들도 알겠지만 페북에서 문의한 사람이 있으니 설명을 붙여보겠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 유태인이지만 독일로 끌려갔고 독일은 그 당시 선진국(?)이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독일어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분의 다른 책들엔 다시 이탈리아어가 나온다.

 

여자를 못 본 게 몇 달이나 되었지? 부나에서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여자 노동자를 만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녀들은 바지와 가죽점퍼를 입었고 남자들처럼 크고 거칠었다. 그녀들은 여름에는 땀에 흠뻑 젖었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었으며 겨울에는 솜을 넣은 두꺼운 옷을 입었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일을 해서 옆에 있어도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르다. 실험실의 여자들 앞에서 우리 세 사람은 깊은 수치심과 당혹스러움을 느낀다.


 

그나저나 내가 읽은 건 그나마 여자를 존중해주는 책이었군요.
여기서는 완전히 여자를 눈 달린 물건 취급하네.

 

 

1944년 아우슈비츠에 오래 수용되어 있던 유대인 포로(다른 포로들은 언급하지 말도록 하자. 그들의 상황은 또 달랐으니까) 'kleine Nummer'(낮은 번호)는 15만 명이 조금 안 되었는데, 그중 수백 명만 생존했다. 그들 중 일반 코만도에서 정상적인 배급을 받으며 무기력하게 살았던 일반 해프틀링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의사, 재봉사, 구두 수선공, 음악가, 요리사, 매력적인 젊은 동성애자, 수용소 권력자의 친구거나 동향 사람이었다.


아예 생판 이해할 수 없는 문구도 많았다.


아마 그 당시 자기 주변 사람들만 알아볼 수 있게 쓴 게 아닐까 짐작한다. 특히 오디세우스의 노래는 배경을 잘 알고 있는 나도 뭔 소린지 감이 안 잡히니 말이다. 차라리 여기에 적혀있는 것처럼 젊은 동성애자가 살아남는 '숨그네'라는 소설책도 있으니 그걸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보단 훨씬 아우슈비츠에 대한 이해가 잘 된다. 우리가 공감이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텍스트 중에선 소설만한 매개체가 없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향연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10
플라톤 지음, 강철웅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파이드로스, 이렇게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에로스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기에, 그 다음의 것으로 그가 남들에게 있는 이 비슷한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막 뭔가 운율을 넣어 말해 보겠다는 생각이 내게 들었네.

인간들 사이에는 평화를, 바다에는 바람 없는
잔잔함을, 바람들의 안식을, 또 근심 속에 잠을

만드는 자가 바로 이 신이라고 말일세. 이 신은 우리에게서 낯설음을 비우고 친근함은 채우네


읽어보니까 의외로 상당히 재밌는 술파티였다. 단순히 현대에서 말하는 사랑만이 아니라 영혼에서 발원하는 순수한 영적 정관을 다루는 이야기랄까. 아무튼 술자리에서 사랑이야기라니 멋지다.

 

그런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홀로 50대인 소크라테스 뭔데 ㅋㅋ 태양의 정점인 하렘이신 듯.
게다가 처음부터 아폴로도로스가 대뜸 친구 때리기를 시전한다. 자신은 철학 이야기를 말하거나 듣는 게 무척 즐거우며 부유하고 돈 잘 버는 너네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짜증과 동정심이 섞인 감정을 느낀다나 ㅋㅋㅋ

 


사실 할리퀸 소설은 남자 여자 전부 반말을 썼다고 한다.

 

영어문법을 보면 당연한 일이긴 한데, 번역에서 하도 여성들이 '당신 ~했어요?'라고 하고 남자는 '~했소.' 라고 말해대니 으레 상상도 그렇게 전개된다. 그러고보면 최근 방영된 러브라이브 뮤즈에서도 전부 반말 쓰자고 하는 게 등장하고 하는 게 젊고 새로운 듯이 보이지만,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50대고 20대고 전부 반말을 썼다는 점.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는 상식이 한동안 막혀있었다는 게 실감이 난다.

얼굴도 고운데 사랑하는 사람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는 아킬레우스 이야기는 역시 원전을 읽지 않으면 자세히 볼 수가 없는 요소이다. (동성애 이야기이니까.) 윤서인과 관련된 일이 생각난다. 보통 잘생긴 사람들은 옛날부터 뭘 해도 성공하고 잘 살게 되는지라,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누군가에게 잘해주는 게 정말 힘들다. 얼굴이 못생겼으면 인품이라도 아주 매우 고와야 중간이라도 가는 것이다. 얼굴이 잘생겼는데 인품까지 고운 사람들, 의외로 많다.

 


향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에서는 평민 남성의 권리를 상당히 인정해주었고 동성애도 공공연히 행했었다. 그렇지만 여성에 대한 차별은 엄청났고 마찬가지로 여성의 동성애도 자신들의 동성애와 달리 더럽다고 공공연히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러고보면 지금 남성의 동성애가 여성의 동성애와 같이 하등한 무언가로 추락했고 심지어 같이 권리를 주장하고 있으니, 그래도 세상이 많이 발전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랑 이야기들도 그럴듯했지만 위인이니만큼 역시 소크라테스의 발언이 가장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일단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 듯이 은유를 꾸며대는 데선 예수의 면모가 있다. 그러나 세속적인 유혹(행위자가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지만)에 넘어가지 않는 건 서경덕을 닮았다. 그의 말대로 인간적인 아이들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아이들을 낳는 게 사실 내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아무래도 출산보다 낫다 하는 걸 보면 임신이 이성간보다는 동성간의 교류를 뜻하는 듯하지만. 물론 난 이성으로도 충분히 출산 이상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 했는데, 보통 그런 생각하는 사람들은 걍 자기비하가 쩔어서 지랑 닮은 자식 낳기 싫어하는 것 같다 ㅋ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