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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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스트 제니퍼 마굴리스는 잡지 마더링에 쓴 기사에서 신생아에게 B형 간염 백신을 맞히는 관행에 분개하면서, 왜 자신이 자기 딸이 '걸릴 가능성이 없는 성 매개 감염병에 대한' 백신을 딸에게 맞히도록 권유받아야 하느냐고 물었다. B형 간염은 섹스뿐 아니라 체액을 통해서도 전달되므로, 신생아가 B형 간염에 걸리는 제일 흔한 경로는 산모를 통해서다.

 

 

 자연주의 출산으로서 아주 중요하고 애를 살리느냐 죽이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게 병원이다.

 

 옛날에 (육아의 여왕 저자 부모님처럼) 백병원같은 큰 곳에서 아이를 낳았고 그걸 자랑으로 여겼다면, 지금은 좀 더 세분화되었고 좀 더 자본화되었다. 결국 남들이 다 하는 출산이나 백신을 거부하는 행위들도 자본의 여유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 마치 마트에서 파는 채소를 먹느냐 유기농 채소를 먹느냐 고민하는 것처럼. 물론 돈과 시간이 없어서 이 모두를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자연요법'도 있을 것이다. 근데 난 2박3일 동안의 진통 끝에 나왔다는데 대체 그 시간동안 애가 나오길 진득이 기다릴 수 있는 산부인과가 어딘지 물어보고 싶다. 서울 외곽인거 같던데.

 내가 상당히 면역이 약해서 뭘 했냐면
 1. 가루영양제
 2. 요구르트
 3. 죽
 4. 한약
 5. 호두, 잣, 밤 등.
 한약은 특히 한 번 먹는데 당시 4~50만원이었다. 지금 가격으로는 150 정도...? 잘못 먹으면 죽는다고 할아버지 한의사가 경고했던 걸로 기억함.

 여기다 살짝 면역에 대한 내 의견을 말하자면, 백신을 거부하는 건 아나키즘과 비슷하다 본다.
 나는 또한 그 둘이 어리석다고 보는데,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보기 때문이다. 죽음을 극도로 무서워하고 죽으면 내가 세상에서 살았다는 표식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그렇게 불안하면 헌혈을 하고 장기기증에 서명하라 권유하고 싶다. 일단 신기하게 마음은 편해진다. 사실 그것도 어리석은 짓이지만. 애초에 '내'가 아닌 것들로 이루어진 몸뚱이를 내 소유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에 난 내 정신도 온전히 내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뭐 어쨌든,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

 

 이 세상에서 중도인 척하는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에게, 아니 그녀를 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녀는 말 잘하는 저널리스트이며(왜 이들은 자꾸 시인이란 타이틀을 달고 싶어할까? 신춘문예는 합격했나?) 면역학자의 편을 들며 카슨을 신랄하게 공격하는 책을 썼다. 이원론 어쩌고 해봤자 소용없다. 이 책을 출간한 이후부터 당신은 이미 저쪽의 사람이니까. 이 책을 마크 주커버그와 빌 게이츠 같은 기업인이 추천했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세상에, 이 책이 빌 게이츠의 여름휴가 추천도서라고? 이걸 읽으면서 그는 얼마나 이 시대 엄마들을 놀림거리 삼으며 낄낄거리고 있을까?

 비합리적 합리주의자라는 괴랄한 단어를 쓰며 미쳐 날뛰는 시인들의 단점이 뭐냐면, 인구 통계가 집계되면 그 속에 숨어 있는 함정은 검토해볼 생각도 안 하고 그걸 십계명처럼 믿으며 마치 자기네들이 신인 것처럼 IF로 남을 죽이고 살린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흔히 하는 븅신탈춤이다.

 솔직히 DDT 이야기 나올 때 책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DDT가 좋으면 당신 아이 입에나 집어넣던가. 지금은 21세기다. 어디서 '나 어릴 시절엔 DDT 다 먹고 살았어~.' 같은 고전적인 개수작을 부려? 그러나 그 이야기 빼고는 제법 괜찮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왜곡될 수 있는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계속 연달아 나오는지라 도저히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러고보면 아이의 건강에 신경이 날카로운 이 어머니의 감정에 내가 이입된 건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침묵의 봄은 읽지도 않았지만, 그 책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듯이 공격하는 말투가 나는 심하게 거슬렸는지도 모르겠다. 면역에 관한 책을 이것말고도 더 읽고 싶다면 이 저자의 의견과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 있는 후나세 슌스케의 백신의 덫을 추천한다. 원래 논쟁은 극단과 극단의 지점에 있는 책 두 권을 다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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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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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에 완전한 문맹인 제일한국인 할머니의 리포트를 읽었는데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시나 전후의 혼란 속에서 한국어도 일본어도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해외에 나갔을 때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는 세계 어디에 가도 '이향'일 뿐입니다. (...) 자기가 사는 집 문에 페인트로 인종차별적인 낙서가 쓰여 있는데도 그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아직 소녀였다고 하는데, 그날부터 도로 표지판이나 시내의 간판이 모두 자신을 차별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인 병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어릴 때는 신경질적인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고질라라고 놀림받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통통했는데 외양으로 놀림받았다. 20대 초반에 남친을 사귈 땐 있지도 않는 상상의 '커피 나르는 일만 하는 회사원 여성' 이야기를 줄곧 들어야 했다.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가정주부 하지 말고 직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소리는 수없이 듣는다. 지금은 남자가 나를 밀쳐서 옆의 상자에 다리를 부딪쳤는데 내가 피하는 모습이 발레리나 같다고 추근대며 내 옆에서 발레리나 흉내를 줄창 냈다. 근처에 그의 여친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전부 별것도 아니란 사실을 안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광적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면,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페친이 있었을까? 직장동료들의 이지메가 이 정도로 끝났을까? 직장상사는 내가 고졸이었으면 내가 실수할 때마다 내 멱살을 들고 목을 졸랐을 거다. 정신병력이 없는 여자를 찾는 페친이 있다. 정신이 멀쩡한 여자? 존재할까? 이런 정신나간 사회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잘 수 있는, 정신이 멀쩡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요즘은 동성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겠다. 불쌍해서.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문맹에서 대부분 벗어난 게 언제인지 이 책에선 다루지 않는다. 책의 분량을 짧게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쩌면 책을 읽는 여성이 너무나 최근에 많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못지 않게 미친 제목이 있었는데. 박원순이 썼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였나. 어디에 다리 잘라달라거나 자르라는 제목은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섹스와 공포라는 책까지 있으니 확실히 그런걸 진열하는 서점과 '주인장이 선택할 여지도 없는' 도서관은 사사키 아타루 말대로 중2병의 소굴일지도...

 서른살 먹은 요즘 와서 알게 된 게 있는데, 시나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은 내 주위에 한 명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문학책을 읽은 수만큼 월급이 많은 경우도 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지만, 그래도 죽어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어라. 빚을 내서라도 판타지 소설을 시리즈째 사서 읽어라. 아무리 어릴 때부터 읽어도 시간이 없는 게 소설 읽기다. 그리고 무한 반복해서 읽는 소설책 한 권은 구해둬야 한다.
 맨날 블로그에서 책문답 올리는 걸 보고 '조회수 올리려고 그러시나봐요?'라고 하는 사람 자주 본다. 뭐래니? 내 인생 잘 되려고 올리는 거다. 담배는 물었는데 라이터 불이 안 켜져서 계속 땡기고 있는 거랑 똑같다. 제발 소설 좀 읽으세요. 뭐 여기 이 책에서는 문학의 의미를 좀 더 넓게 생각하지만.

 

 그러고보니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는 다 함께 죽거나 다 함께 사는 건 행복한데, 다 사는데 나만 죽거나 혹은 다 죽는데 나만 사는 건 슬프다고 했던가. 특히 맨 끝의 상황은 그게 사는 동안 지속되서 최악이라 했던가.
 주인공은 '세상이 다 망해도 이리야만 살면 돼' 라고 했고 그를 체포했던 군인 아저씨는 '세상의 끝에서 나는 네 손에 죽고 싶었다'라고 절규했었다. 그럼 세카이계는 종말이 아니라, 종말 이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뭐랄까 그러고보니 인류 멸종이 아니라 그건 단순히 대재앙이잖아.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을 소개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책을 보고 또 감동받았다. 페미니즘이란 양념을 참 적절하게 뿌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독서모임에서 다루는 면역에 관하여를 읽는다. 그 다음엔 구별짓기 하를 읽고 염무웅의 자유의 역설을 빌리고 내여귀를 읽는다. 그러다보면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이 또 정해지겠지. 요즘은 이런 시간이 즐겁다. 정말로. 그리고 다행이다, 내가 책을 읽는 여성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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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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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다시 프리랜서 조사원으로 약 7개월을 일했다. 하지만 결국 이 사무소를 그만두었다. 그 안에는 동성연애자 여성들만 있었고, 연인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일을 주었기 때문에 나는 사직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a859gBkeZ4&feature=youtu.be

사진을 클릭하면 정의의 바보 폴나레프와 악의 정점 디오가 만나는 죠죠 3부의 장면이 나온다. 디오는 폴나레프에게 '안락함'을 약속한다. 계층 구분을 하면 지배계급은 안락해진다. 자본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일단 결점을 까는 것부터 시작하겠다. 인류 문명 시작 때부터, 아니 어쩌면 인간이 둘 이상 모여 살기 시작할 때부터 생겨나 멈출 줄 모르고 자본주의랑 짝짝꿍하며 폭주하는 구별짓기를 자제시킬 수 있는 방법을 이 책은 간간히 제시하고 있다.
 - 모든 생활에 정치가 꼬여 있음을 알자.
 - 최대한 객관화된 시선으로 감정을 자제하고 부르주아 즉 지배층의 위선을 지적하자. 어쩌면 아주 드물게 그들 자신들도 모를 수 있다.
 - 지배층이 쁘띠 부르주아들의 상승욕구를 끌어내리면 그들의 분노가 폭발하여 자기네들의 위선을 보기 시작할 거다.
 내가 지적할 부분은 3번이다. 만약 2번에서 말한 것처럼 지배층들 자신들도 그들의 위선을 모른다면, 쁘띠 부르주아들 또한 그들의 '열등감'을 모를 수 있다. 혹은 '내가 성공하겠다는데 잡것들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너도 저 위에 있는 높은 것이라서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무시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게 그 사람에겐 가장 현명한 길이다. 그리고 뒤르켐 다음으로 마르크스 이론을 자주 거론하는데, 마르크스는 쁘띠 부르주아들이 절대 혁명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한다. 그것도 현명한 발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 구별짓기의 끝없는 악순환에 해결책은 있는가?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런 거 없다고 부르짖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지켜보는 것밖에 없는가? 그렇다. 박근혜는 부정부패로 인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다. 아마도 그 다음 대통령은 문재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 많다. 그리고 문재인'의 팀'은 서울대학교를 폐쇄하고 대학을 프랑스의 그랑 제꼴처럼 만드는 방법을 검토하는 중이다. 그렇다. 구별짓기 상에서 거의 400페이지를 써 가며 지배층들의 스포츠와 '자연'스러운 매너를 키우는 문화적 '능력'의 온상이라 지적했던, 그 그랑 제꼴 말이다.

 사립 정책은 사실 세종대왕에서부터 나왔다. 지방 각자 서당을 세우고 너네 알아서 하라는 건데 이것 때문에 유림이 생겨서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어 존중 안해? 너 숙청이란 흐름이 되었다. 또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보면 우리나라와 공감되는 게 참 많은데 프랑스는 유럽의 그 어떤 곳보다도 귀족명문사립학교가 잘 되어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대학교를 프랑스 학교화 한다는 것은 곧 이 나라를 사립학교 천국으로 세워놓고 민중들의 생활에 엘리트주의가 영향을 주게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세종대왕의 예에서도 봤듯이 서울대학교를 없애면 다른 대학교들이 설칠 뿐이지 결코 그걸로 사립학교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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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샘터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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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chemy

Sara Teasdale

I lift my heart as spring lifts up
A yellow daisy to the rain;
My heart will be a lovely cup
Altho' it holds but pain.

For I shall learn from flower and leaf
That color every drop they hold,
To change the lifeless wine of grief
To living gold.

연금술

새러 티즈데일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제목 때문인지 장영희가 뽑은 시 중에서도 김점선의 그림 중에서도 유달리 봄이 좋았다.

 하지만 시보다도 더 빛나는 게 있었으니 바로 장영희 씨의 평론이었다. 시를 읽고나서 벅차오르는 마음을 깨뜨리는 몇몇 평론들에 실망했던 나로서는 그저 멍해질 따름이었다. 장영희 씨는 힘든 시대에 몸도 아파서 고통을 달래는 시들만 유독 눈에 보였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나는 그녀가 문학 속에 존재하는 사랑을 믿기 때문에, 그 사랑이 세상을 환히 밝혀주는 때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글을 썼기 때문에 그토록 훌륭한 문장을 남겼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 깜짝 놀라게 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조선시대가 끝나고 근현대사가 시작될 때부터 한 번도 남자가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될 날이 없었다는 점이다. 안 그래도 한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청춘인데, 군인과 그를 기다리는 고무신 사이에는 얼마나 먼 강물이 놓여져 있을까. 요즘에는 페미니즘이 대세가 되고 사회정의가 강조되면서 남녀간의 대립이 심해져서 그런지, 대학생 커플 이야기조차 굉장히 줄어든 추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신이 외롭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귄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요즘 사회에 살짝 불만이 있지만, 도깨비라는 드라마라거나 방송매체에 시가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특히 연시가 유행하는 것 같다. 삶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시로 옮길 때, 그 시는 '아름답고 쉽다'. 연시로 인해서라도 사람들이 사랑을 추억하거나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감수성을 찾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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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묘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4
발레리 지음, 김현 옮김 / 민음사 / 197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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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포도주 중에서

어느 날인가 나는 대양에
(허나 어느 하늘 아래선지 모르겠다)
던졌다, 허무에 진상하듯,
귀중한 포도주 몇 방울을.

누가 너의 유실을 원했는가, 오 달콤한 술이여?
내 필시 점쟁이의 말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술을 따를 때 피를 생각하는
내 마음의 시름을 쫓았던가?

 

 

  

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불명확하게 사실을 전달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판타지 소설에서도 그러하듯이, 한번 가상세계의 글을 잡으면 우리는 제법 그 흐름에 우리의 의식의 대부분을 던져넣는 편이다. VR같은 영상은 육체에 상당한 피로를 느끼게 하지만 오감이 동시에, 비교적 신속하게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게 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은 작가의 마음대로 독자가 그 세계에 빨려들어가는 걸 늦출 수 있다. 지금이야 삽화를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해당되지 않지만 일부러 등장인물의 묘사를 최대한 줄여 독자들이 스스로 다양한 팬아트를 그리게 한 판타지작가도 있었다. 만일 그게 작가의 무신경함이나 불친절이 아니라, 최대한 의식을 집중한 끝에 이룩한 절제의 극치라면? 최근 그런 기법을 사용한 소설은 오와리모노가타리(특히 오우기) 정도겠다.

  

이 시인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이 있다면 시 자체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물론 인물과 배경을 따로 떨어뜨려 가면서 서서히 묘사하는 시들도 많지만(특히 여자가 많다.), 자신에 대한 프로필이라던가 시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 같은 상황을 상정하여 시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왠지 그런 시들이 훨씬 끌렸다. 시로 철학적 성찰을 했다고나 할까. 자신을 시의 젖을 빠는 아기라거나 자신을 너무 사랑해 물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 순수 이성만 생각하는 기계장치에 비유하면서도 그에 대한 긍지를 표현해낸 점 또한 독특했다. 보통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번역되는 해변의 묘지 시 부분을 그렇게 단순히 번역하지 않은 것도 좋았다. 번역가가 단어 하나하나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해서 번역해나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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