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
리 듀거킨 지음, 이한음 옮김 / 지호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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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는 문화가 없는가?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걷기를 배우고, 말하기를 배운다. 그러나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아이들은 하품을 하고 기침을 한다. 기침과 하품은 자연적인 것이다. 매우면 눈물이 난다거나 모기에게 물리면 긁는 행위도 역시 자연적인 것이다.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는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함으로써 언어를 배운다. 부모가 특정한 발음을 할 때, 입술과 이의 모양, 턱의 위치들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아이들은 발음을 익히고, 복잡한 문법구조들을 점차로 익혀나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따라하기, 즉 모방을 통해서 문자를 배우고, 놀이를 배우며, 예술과 예절과 같은 복잡한 삶의 양식들을 하나하나 체득해간다. 만약 인간이 모방을 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의 삶은 동물적인 삶에서 그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는 모방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많은 철학자들은 모방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해왔다.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은 모방적인 동물이다. 이 특질은 인간의 모든 교육의 근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남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하기를 배운다.”라는 말로 모방이 인간의 문화에서 가지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루이빌 대학 생물학 교수인 리 듀거킨은 『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The Imitation Factor)』라는 책을 통해 동물의 진화가 유전자뿐 아니라 모방을 통한 문화적 전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문화는 물고기에서부터 인간 이외의 영장류에 이르는 온갖 동물들의 모든 유형의 행동 속에서 그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작은 물고기들을 10여년 간 관찰한 저자는 뇌가 거의 없다시피한 물고기마저도 모방을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있고, 이런 모방은 동물의 진화에 유전인자 못지않은 영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모두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 개념에 수정을 요구하는 도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짝짓기와 같은 상황에서도 유전자와 문화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유전자가 동물의 모든 특성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리 듀거킨의 책이 소개하는 아마존몰리와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를 보자. 아마존몰리는 암컷뿐이다. 그리고 아마존몰리는 ‘자성발생'을 한다. 쉽게 말해 수정 후에 정자핵의 유전자는 배제되고 난핵만으로 발생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존몰리에게는 난자를 자극할 다른 종의 수컷 정자가 필요하다.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의 수컷이 아마존몰리를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낭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세일핀몰리의 암컷은 다른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세일핀몰리의 수컷에 매력을 느낀다. 이런 암컷의 취향도 다른 세일핀몰리의 암컷이 짝을 선택하는 모습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례를 보자. 몸길이가 2㎝에 불과한 물고기인 거피 종의 암컷은 선천적으로 몸에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좋아한다. 그런데 수컷들의 오렌지색 양에 약간 차이가 있을 때면, 암컷들은 항상 오렌지색이 덜한 쪽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런 수컷 곁에 있는 암컷의 선택을 모방했다. 여기서는 짝 선택을 모방하는 경향이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선호하는 유전적 성향보다 우세했다. 문화가 유전적 성향보다 짝선택에 우월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수컷들의 오렌지색 양이 크게 다를 때는 암컷들은 칙칙한 쪽을 무시하고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선택했다. 여기서는 유전적 성향이 문화적 성향을 가린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짝의 선택에도 문화적 성향과 유전적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일본의 ‘이모’라는 마카쿠 원숭이는 사람들이 던져 준 고구마를 개울물에 씻어 먹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몇년 뒤 사람들이 모래 바닥에 밀을 던져 주자 이 원숭이는 더 큰 꾀를 부렸다. 모래가 섞인 밀을 물 속으로 던졌던 것이다. 그러자 모래는 가라앉고 밀만 물에 떴다. 그러고 나서 약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지혜는 마카쿠 원숭이 사회에 쫙 퍼져나갔다. 이는 원숭이도 인간처럼 모방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배운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각기 다른 유전적 특성과 노래 습관 등을 지닌 사우스다코타와 인디애나의 탁란찌르레기를 놓고 실험한 결과도 동물의 모방능력을 보여준다. 인디애나 새끼들을 인디애나와 사우스타코타 어른 새들에게 나눠 키운 결과, 새끼들은 유전적 특성과 무관하게 양육자의 노래 습관을 따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젖먹이 때 입양된 아기가 자신을 낳아준 혈연적인 부모의 언어보다는 자신을 길러주는 양부모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카쿠 원숭이와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의 예에서 보듯 단 하나의 개체가 무리 전체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리 듀거킨은 모든 동물이 모방의 고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리 듀거킨의 주장은 문화적 전달이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유전자와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한 문화는 유전자에 각인돼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물론 동물과 달리 인간은 모방을 통해 학습을 하며, 교육을 통해 복잡한 상징체계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모방에 그치고마는 동물과 비교할 때 모방의 정도와 깊이에서 훨씬 더 세련되고 정교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방이 문화 습득과 전달의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만이 문화를 소유했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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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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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의 화폐에도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영웅일지언정 모든 이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화학자이며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일 수는 있어도 인류의 보편적인 영웅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어릴 적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 읽은 인디언 이야기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기억나는군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죽기에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들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재의 ‘나’를 버림으로써 더 크고 높은 ‘나’를 성취한다는 생각, 이것이 신화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버리는 행위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으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역설(逆說)이다. 이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화에 등장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 Passage Rite)’다.
프랑스 인류학자 아르놀트 반 헤네프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장소, 지위, 신분, 연령 등을 거치면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거치는 것이 통과의례다. 이 의식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죽음에 근접하는 극심한 고통은 죽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죽음에 버금가는 ‘유사한 죽음’이다. 이 유사한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고귀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 영웅신화가 말해주는 신화적 진실이다.
민간인의 신분을 버리고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군대에서는 ‘신고식’이라는 혹독한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신고식을 마친 초주검이 된 신병들은 비로소 새로운 집단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예전에 대학의 신입생들도 커다란 바가지에 담긴 술을 모두 마셔야 하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지금도 범죄집단에서는 신참이 들어올 때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치르게 한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것에 의연하게 맞서 늠름하게 고통을 겪어내는 자, 그들만이 새로운 집단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것이 신고식에 함축된 논리였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껍질을 벗고, 집단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려거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맞서라는 것이 곧 신고식에 함축된 재생(再生)과 부활의 논리다.


고대사회에서는 신체적으로 성숙한 사춘기 남녀에 대해서 일정한 시기에 이제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른바 성인식(成人式), 성년식(成年式)이 그것이다. 성인식 과정에는 죽음에 버금가는 엄청난 고통이 주어진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성기의 일부를 자르는 할례의식도 성인식이라의 일부로서 치러졌다. 심지어는 멀쩡한 송곳니를 뽑기도 하고, 쇠를 불에 달구어 피부를 찌르기도 하는 신체를 변형을 감행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성인식에 인간의 잔혹 취미가 나타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즉 ‘유사한 죽음’을 통해서 한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믿음은 상생(相生)과 우애(友愛)를 강조하는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도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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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사회 (반양장) -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
울리히 벡 지음, 홍성태 옮김 / 새물결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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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ich Beck)은 거대기술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불완전성에 주목하여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1986년 울리히 벡이 발표한 위험 사회라는 저서는 20세기 말 유럽인이 쓴 사회 분석서들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저서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위험 사회에서 울리히 벡이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이 위험 사회를 너머 '새로운 근대'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조직은 고도로 복잡하게 체계화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도의 조직화, 체계화는 두 가지 차원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고도의 인공적 조직물이나 체계는 반드시 그것이 창출된 의도 외의 부수적 효과(부작용)를 발생시킨다. 문제는 이 체계화된 조직이라는 것이 발생시키는 다양한 효과들은 완전한 예측이 거의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의도나 바람과는 전혀 무관하며, 일단 작동하기 시작하면 대부분 인간의 능력으로는 통제 불가능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현실에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대로, 화학 공업과 화석 연료의 대량 사용으로 인한 환경오염은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 고도로 조직화된 인공물은 그 자체로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인데 그 위험은 그 체계가 어떤 우연한 사고나 인위적 조작에 의해 순간적으로 와해될 때 발생할 수 있다. '폭탄'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가장 적절하고 유효한 비유가 될 수 있다. 모든 폭탄이란 말하자면 인공적으로 구조화된 사물인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그 구조와 조직이 와해됨으로써 치명적인 위험을 발생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것은 애초에 그러한 목적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위험을 발생시키는 것이 그것의 '순기능'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인공적 구조물들과 차별화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도시는 이러한 위험을 '부수적'으로 안고 있다.


하나의 상황을 가정하여 위험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2010년의 인텔리전트 빌딩 (Inteligent Building). 이 건물은 모든 것이 컴퓨터 브레인에 의해서 작동된다. 자동으로 온도와 습도가 조절된다. 햇볕의 강도를 창에 부착된 센서가 감지해서 조명등의 조도를 조절한다. 냉장고에는 모니터가 부착되어 냉장고 안에 어떤 식품들이 있고, 그 양은 얼마인지를 보여준다. 식품이 떨어지면 자동으로 인터넷으로 주문이 완료된다.


2010년 어느 일요일 오후 4시, 아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점심을 먹을 때 잠깐 컴퓨터 앞을 뜬 것을 빼면 종일 컴퓨터다. 온라인게임, 인터넷 채팅, MP3, 아바타, 사이버 애완동물, 인터넷 쇼핑, 모든 것이 컴퓨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이버 수족관에서 키싱구라미, 레드베타 등의열대어를 기르고, 사이버머니를 주고 구입한 식물들을 온라인상에서 재배한다. 하루라도 컴퓨터가 먹통이 되는 날이면 이 모든 것이 끝이다. 아버지는 인터넷으로 주식시세와 신문과 잡지를 보고, 업무관련 이메일을 열어 본다. 손목에 부착된 컴퓨터는 매일 혈압과 맥박과 당뇨수치를 무선 e메일로 주치의에게 통보한다. 이상이 있을 때는 휴대폰으로 병원에 한 번 들러 달라는 연락이 온다.


자, 이 모든 시스템이 멈춰 섰다고 가정해보자.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냉장고 안의 음식물이 썩는 냄새도 냄새지만 50층 건물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불편이 여간이 아니다. 병원마다 환자들의 상태를 체크하려고 커다란 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인텔리전스 빌딩은 온도조절 시스템이 비정상이니 실내는 후텁지근하고, 채광시스템이 이상이 생겨 한낮에도 실내가 캄캄할 수도 있다. 정수공급 장치가 고장이 났으니 물도 안 나오고 정화조는 막히고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사회 조건 속에서 전산 시스템의 순간적 와해나 정지는 단순히 컴퓨터의 고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 전체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전산망에 의해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생긴 편리만큼의 위험성이 그 체계 내에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기술은 인간의 편리성을 증대시켜주지만 인간이 기술에 의존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 또한 그만큼 불안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속도보다는 안전을, 결과보다는 과정을 생각하자


유전자 조작 기술은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준다. 가령 바닷물에도 재배할 수 있는 벼를 개발한다면 인류의 식량난은 곧바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벼가 인체에 알레르기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로 인한 피해는 엄청난 것이다. 벼와 같은 기본적인 식량은 커피나 아이스크림과 같은 기호식품과는 달리 그 영향과 파급의 범위가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울리히 벡 교수는 결과를 보지 못하고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맹목적인 '근대화'를 비판하고 있다. 근대화의 과정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기관차처럼 인류의 의지나 목적과 상관없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반성적 근대화가 초래한 위험성을 인류가 인식하게 되면, 인류는 더 이상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반성적인 근대화'로 전환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울리히 벡 교수의 '위험사회'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은 '선택'이다. 지금까지의 근대화는'위험을 감수하는 선택'에 의존해왔다. 곧 기술의 발전이 가져다 줄 수도 있는 위험을 우리는 통제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거나, 그 위험이라는 것도 결국 안전기준치 범위 내일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기술을 '선택'해 왔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식품의 겉봉에 쓰여 있는 식품 첨가물이 허용기준치 이하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그 음식물을 선택했고, 도심의 대기오염을 나타내는 전광판에 아황산가스의 농도가 안전기준치 이하라는 사실에 안심하고 살아왔다. 그러나 적은 양이라도 그것이 지속적으로 자연 생태계와 인체에 축적된다면, 그 결과로서 나타날 수 있는 위험은 적은 것이라고 할 수 없다 .


운전자가 굽은 길에서 속력을 줄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측하지 않은 위험'(danger)이 아니라, '예측할 수 있는 위험,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한 위험'(risk)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측할 수 있는 위험'을 양산하고 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서, 또는 정책적 선택에 의해서도 양산되고 있다. 승용차가 내뿜는 배기가스, 합성세제나 일회용품, 전자파, 폐수, 농약과 비료, 동·식물의 남획, 간척지의 개간, 댐의 건설, 핵발전소 등이 부정적인 결과를 감수한 위험한 선택이다.


정부나 기업, 일반국민 모두에게 위험을 무릅쓰는 태도가 보편화된 이유는 안전이 비용이 많이 드는 대안이라는 데 기인한다. 가령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안전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다면 공사기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고, 비용은 그만큼 증대될 수밖에 없다. 결국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안전을 뒷전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공사기간을 단축하고, 비용을 줄이자는 태도를 울리히 벡 교수는 무반성적인 태도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근대화를 달성해야 했던 대한민국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추구'를 영웅시하는 태도다. 1969년 9월 11일 착공한 지 290일 만인 1970년 7월에 경부고속도로 428km가 개통되었을 때, 언론은 세계의 기적이라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기술과 속도가 국가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술의 위험성이 눈에 보일 리 없다. 과학적으로 신중하게 설계되지 않은 졸속공사의 결과로 오늘날 경부고속도로는 고속도로 사망율 세계1위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다.


지난 세기는 성장의 크기와 속도를 지향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속도'보다는 '안전'을, '외형'보다는 '내실'을, '결과' 보다는 '과정'을 중시해야 한다면 과연 이런 속도추구가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차분한 성찰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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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이인식 해설 / 김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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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의 최신작 ‘본성과 양육’(원제 Nature Via Nurture, 김한영 옮김, 김영사 펴냄)은 이 같은 본성­양육 논쟁의 뿌리와 배경, 발전 과정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특정 유전자가 각각 특정 부위의 형질 또는 생명현상과 일대일 대응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지나치게 생명현상을 단순화시키고 있으며 유전자의 기능과 생명현상이 인과적이기는 하지만 그 인과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관계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복잡한 형질이 유전자와 일대일 대응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옳다고 보기에는 인간의 유전자 수 3만 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 개의 유전자와 한 개의 형질이 정확히 대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 생물학적 상식이다. 『본성과 양육』의 저자 매트 리들리의 또 다른 저서『게놈』에 ‘1998년 중반에 천식 유발인자는 5번 염색체에는 무려 8개의 후보가 있고 6, 12번에도 천식 유전자의 후보가 2개 씩 그리고 11, 13, 14번 염색체에도 그 후보를 발견하였다.’라고 밝힌 바 있듯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 개의 유전자가 여러 형질의 발현에 관여하거나 (多面發現, pleiotropy), 여러 개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의 발현에 관여(多因子發現, polygeny)하기도 한다. 이는 유전자 상호간에, 또는 각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 단백질 상호간에 다양한 영향의 주고받음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전자가 어떤 형질 발현의 한 원인일 수는 있으나 둘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유전자 공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에 대한 믿음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매스컴에서는 특정암을 유발하는 특정 변형유전자를 발견하면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중들의 희망을 부풀리고 있다.


『본성과 양육』에서 저자는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침실에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전구가 나갔을 수도 있고 퓨즈 때문일 수도 있고 스위치 고장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정전 때문일 수도 있다. 지난번에는 스위치 고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전구 때문이다. 스위치와의 연관성이 반복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당신은 화를 내며 그것이 잘못된 탐지였음을 인정한다. 결국 문제는 스위치가 아니라 전구였다. 그러나 둘 다 때문일 수도 있다. 훨씬 복잡한 뇌에서는 잘못된 곳이 수천 곳에 이른다.


매트 리들리는 유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질병과 유전자의 연관성이 반복되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본성과 양육』 저자는 매트 리들리는 인간 존재를 본성이나 양육 어느 하나로 규정지으려는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행동이 본성과 양육 모두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피력한다.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것, 즉 유전자는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동물행동학의 개념인 ‘각인’을 설명하면서 본성과 양육이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님을 설명한다. ‘각인’이란 어린 동물들이 처음으로 시각적·청각적·촉각적 경험을 하게 된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 그것을 쫓아다니는 학습의 한 형태를 말한다. 갓 태어난 새끼를 격리시켜 놓은 상태에서 특정한 사람과 접촉시키면 오리들은 그 사람을 부모로 각인한다. 심지어는 무생물에 대해서도 애착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각인은 조류, 특히 닭·오리·거위 들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이것과 비슷한 학습형태가 포유류·어류·곤충류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새끼 오리의 뇌는 어떻게 교수(사람)을 각인하는가? 이 문제는 아주 최근까지 완전한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새로운 베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베일은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가이다. 실험에 따르면, 새끼새가 부모를 각인할 때 새끼새의 기억이 최초로 가장 빠르게 저장되는 곳은 IMHV라는 뇌부위다. 이 부위에서도 오직 왼쪽 면에서만 그 모든 변화와 함께 각인이 이루어진다. 왼쪽 IMHV가 손상되면 새끼새는 어미를 각인하지 못한다.


이 사례는 새끼 오리의 환경적 변수 새끼 오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새끼 오리의 유전적 변수가 새끼 오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것, 즉 유전자는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책은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역설한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사춘기를 넘긴 최초의 야생아가 발견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된 13세의 소녀 제니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대받은 시각장애 어머니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편집적인 아버지 밑에서 제니는 어린이용 변기 의자에 묶이거나 우리 같은 침대에 감금된 채 독방에서 자랐다. 그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기형에 거의 완전한 벙어리였다.


그녀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인 문법은 물론 어순을 결정하는 구문법조차 배우지를 못했다. 결국 제니는 평생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이 사례는 언어 또한 단지 외부세계로부터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기에 각인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각인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고 한다.(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언어와 접하게 된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는 간단한 언어라든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등 끊임없이 언어를 접하게 된다. 인간은 일생동안 언어를 접하며 배우게 되지만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에릭 레너버그는 언어학습능력의 결정적 시기는 사춘기에 갑자기 끝나 버린다고 한다.) 이 결정적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풍부한 언어 환경을 제공해도 피학습자는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언어를 학습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유전자가 있다면 환경이 적절한 시기에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작동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론자인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와 같으며, 그 내용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 채워진다.'고 했다. 로크는 본성을 부정하고, 양육을 옹호한 셈이다. 한편 루소와 칸트는, 인간은 본성을 타고 난다.'고 주장했다.


‘환경이냐 유전자냐’를 결정하는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 매트 리들리는 "유전자는 자궁 속에서 신체와 뇌의 구조를 지시하지만, 환경과 반응하면서 자신이 만든 것을, 거의 동시에 해체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의 서문 다음과 같은 구절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음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가 꼭두각시의 주인처럼 우리 행동을 조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행동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 세계는 본능이 학습과 대립하지 않는 세계이고, 본성이 양육을 위해 설계되는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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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문화
C.P.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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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는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그런 단절이 인문학과 과학 모두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될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이는 영국의 C. P. 스노우다. 그가 말하는 『두 문화(The Two Cultures)』는 오늘날 인문학자와 자연과학자 간의 상호무지와 오해, 반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1959년에 스노우가 행한 강연 <두 문화와 과학혁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노우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실험과학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으나 이후 소설가 및 평론가로 방향을 전환했고, 2차대전기를 거치면서부터 행정관료와 민간사업체 대표를 지냈다. 그가 ‘두 문화’ 현상에 관심을 갖게 된 것 역시 상이한 문화를 접해본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스노우는 현대 사회에서 인문학적 문화와 과학적 문화는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그런 단절이 인문학과 과학 모두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요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몰이해, 때로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은 도무지 인문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고 스노우는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비과학자들은 과학자가 인간의 조건을 알지 못하며, 천박한 낙천주의자라는 뿌리 깊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며, 한편 과학자들은, 문학적 지식인들이 전적으로 선견지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자기네 동포에게 무관심하고, 깊은 의미에서는 반지성적이며, 예술이나 사상을 실존적 순간에만 한정시키려고 한다고 꼬집는다. 그는 과학자들은 대체로 인문학적 성향이 짙은 전통 문화를 얕보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러한 태도는 예술이나 전통 문화에 대한 과학자들의 소양 부족 때문이고, 그것이 결국은 인간으로서 과학자의 능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과학자에게 필요한 창조적 상상력을 억제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임을 지적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인문학자들은 전통 문화만이 문화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고, 현대 과학의 성과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부정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과학자들은 사회전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전문영역에만 갇혀 있는 ‘전문 바보’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스노우는 이런 인문학자들이 현대 사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근대 초창기만 하더라도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이거나 물리학자면서 사상가였던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 파스칼은 ‘파스칼의 원리’나 ‘계산기 발명’으로 유명한 수학자였으며, 데카르트 또한 수학자이면서 또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20세기에 들면서 학문의 분화현상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특히 인문학과 과학간의 간극은 현격하게 벌어졌다. 바로 이런 단절의 상황에서 스노우는 두 문화(Two Cultures)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인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자간의 문화적 이질감은 극심했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스노우경은 두 문화 사이의 단절은 진정한 문화발전이나 정상적인 사회발전에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고 진단하면서, 이런 분열의 해법을 그는 교육에서 찾았다. 그는 “물론 완전한 해답은 없다. 우리들의 시대, 또 우리들이 예측할 수 있는 시대에 있어서의 여러 조건 밑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을 찾는다 해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열려진 중요한 수단은 교육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핵전쟁, 인구 과잉, 빈부의 격차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새로운 과학혁명뿐임을 명백하게 지적하면서 그러한 과학혁명이 본질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문화의 분극과 단절이 먼저 해결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자와 과학자 모두에 대한 완전한 교육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 개혁의 목적은 인문학과 과학의 단절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미래 사회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을 지녀야 각 분야 리더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지금부터라도 문ㆍ이과 균형 감각을 지닌 인재양성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21세기 인재양성을 위해 고교의 경우 문ㆍ이과를 없애고 대학은 학과 전공에 상관없이 인문ㆍ자연과학 등의 기초학문을 이수하는 체제로 전환할 것을 주문하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과학이나 기술이 잘못된 방향에 빠지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에 와 있고, 유전공학이나 생명공학처럼 종교나 사회관습의 측면에서 수용하기 어려운 과학ㆍ기술이 있는 만큼 과학기술자는 철학, 사회학, 역사학 등 인문학적 기본소양을 길러야 한다는 것도 시대적 요청이다.


미국의 대학들은 순수과학과 인문과학을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통합해 학생들이 그 학문의 기초적인 배경이나 지식을 습득하는 교육을 하고 있으며 이공계 생이라도 인문학 중 일부과목을 필수로 이수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교육시스템은 아직도 문과 이과의 전통적 이분법에 사로잡혀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쫓아가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교육시스템으로는 사고의 유연성과 균형감각이 있는 인재의 양성은 요원하다. 인문학자라고 해서 시대적 대세인 과학을 무시할 수 없으며, 과학자라고 해서 과학의 사회적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감성과 이성의 조화로운 인격을 갖출 수 있는 교육시스템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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