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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진정한 영웅은 누구인가
러일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의 화폐에도 등장하는 일본의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영웅일지언정 모든 이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화학자이며 『신화의 힘』의 저자 조셉 캠벨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영웅일 수는 있어도 인류의 보편적인 영웅은 될 수 없다고 단언하며 어릴 적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이렇게 말한다.
<어릴 때 읽은 인디언 이야기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기억나는군요.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던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죽기에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들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끊임없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현재의 ‘나’를 버림으로써 더 크고 높은 ‘나’를 성취한다는 생각, 이것이 신화가 전하는 중요한 메시지라는 것이다. 현재의 나를 버리는 행위는 곧 죽음이다. 그러나 죽음은 죽음으로써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고차원적인 삶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신화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역설(逆說)이다. 이 역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신화에 등장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 Passage Rite)’다.
프랑스 인류학자 아르놀트 반 헤네프는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새로운 장소, 지위, 신분, 연령 등을 거치면서 치르는 갖가지 의식을 통과의례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삶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거치는 것이 통과의례다. 이 의식에는 반드시 고통이 수반된다. 죽음에 근접하는 극심한 고통은 죽음 그 자체는 아니지만 죽음에 버금가는 ‘유사한 죽음’이다. 이 유사한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은 더욱 고귀한 존재로 거듭난다고 하는 것이 영웅신화가 말해주는 신화적 진실이다.
민간인의 신분을 버리고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군대에서는 ‘신고식’이라는 혹독한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신고식을 마친 초주검이 된 신병들은 비로소 새로운 집단의 일원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 예전에 대학의 신입생들도 커다란 바가지에 담긴 술을 모두 마셔야 하는 혹독한 ‘신고식’을 치렀다. 지금도 범죄집단에서는 신참이 들어올 때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치르게 한다.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것에 의연하게 맞서 늠름하게 고통을 겪어내는 자, 그들만이 새로운 집단으로 편입될 수 있다는 것이 신고식에 함축된 논리였다. 구태의연한 과거의 껍질을 벗고, 집단의 일원으로 다시 태어나려거든 고통을 피하지 말고 맞서라는 것이 곧 신고식에 함축된 재생(再生)과 부활의 논리다.
고대사회에서는 신체적으로 성숙한 사춘기 남녀에 대해서 일정한 시기에 이제 어른이 되었음을 사회적으로 승인하는 의식이 행해졌다. 이른바 성인식(成人式), 성년식(成年式)이 그것이다. 성인식 과정에는 죽음에 버금가는 엄청난 고통이 주어진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성기의 일부를 자르는 할례의식도 성인식이라의 일부로서 치러졌다. 심지어는 멀쩡한 송곳니를 뽑기도 하고, 쇠를 불에 달구어 피부를 찌르기도 하는 신체를 변형을 감행하기도 했다.
인간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는 성인식에 인간의 잔혹 취미가 나타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 즉 ‘유사한 죽음’을 통해서 한 인간이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믿음은 상생(相生)과 우애(友愛)를 강조하는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고등종교에서도 결코 낯선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