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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리들리의 본성과 양육 - 인간은 태어나는가 만들어지는가
매트 리들리 지음, 김한영 옮김, 이인식 해설 / 김영사 / 2004년 9월
평점 :
영국의 과학저널리스트 매트 리들리의 최신작 ‘본성과 양육’(원제 Nature Via Nurture, 김한영 옮김, 김영사 펴냄)은 이 같은 본성양육 논쟁의 뿌리와 배경, 발전 과정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는 특정 유전자가 각각 특정 부위의 형질 또는 생명현상과 일대일 대응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지나치게 생명현상을 단순화시키고 있으며 유전자의 기능과 생명현상이 인과적이기는 하지만 그 인과관계가 매우 복잡하고 중층적이어서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쉽게 파악되지 않는 관계임을 강조한다.
인간의 복잡한 형질이 유전자와 일대일 대응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옳다고 보기에는 인간의 유전자 수 3만 개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한 개의 유전자와 한 개의 형질이 정확히 대응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이 생물학적 상식이다. 『본성과 양육』의 저자 매트 리들리의 또 다른 저서『게놈』에 ‘1998년 중반에 천식 유발인자는 5번 염색체에는 무려 8개의 후보가 있고 6, 12번에도 천식 유전자의 후보가 2개 씩 그리고 11, 13, 14번 염색체에도 그 후보를 발견하였다.’라고 밝힌 바 있듯이 대부분의 경우에는 한 개의 유전자가 여러 형질의 발현에 관여하거나 (多面發現, pleiotropy), 여러 개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의 발현에 관여(多因子發現, polygeny)하기도 한다. 이는 유전자 상호간에, 또는 각 유전자에 의해 생산된 단백질 상호간에 다양한 영향의 주고받음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유전자가 어떤 형질 발현의 한 원인일 수는 있으나 둘 사이의 직접적 인과관계를 상정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유전자 공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에 대한 믿음은 약화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매스컴에서는 특정암을 유발하는 특정 변형유전자를 발견하면 암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중들의 희망을 부풀리고 있다.
『본성과 양육』에서 저자는 형질과 유전자 사이의 결정론적 일대일 대응론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침실에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전구가 나갔을 수도 있고 퓨즈 때문일 수도 있고 스위치 고장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정전 때문일 수도 있다. 지난번에는 스위치 고장이었지만 이번에는 전구 때문이다. 스위치와의 연관성이 반복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당신은 화를 내며 그것이 잘못된 탐지였음을 인정한다. 결국 문제는 스위치가 아니라 전구였다. 그러나 둘 다 때문일 수도 있다. 훨씬 복잡한 뇌에서는 잘못된 곳이 수천 곳에 이른다.
매트 리들리는 유전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질병과 유전자의 연관성이 반복되기는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본성과 양육』 저자는 매트 리들리는 인간 존재를 본성이나 양육 어느 하나로 규정지으려는 이분법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의 행동이 본성과 양육 모두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피력한다.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것, 즉 유전자는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동물행동학의 개념인 ‘각인’을 설명하면서 본성과 양육이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 아님을 설명한다. ‘각인’이란 어린 동물들이 처음으로 시각적·청각적·촉각적 경험을 하게 된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킨 다음 그것을 쫓아다니는 학습의 한 형태를 말한다. 갓 태어난 새끼를 격리시켜 놓은 상태에서 특정한 사람과 접촉시키면 오리들은 그 사람을 부모로 각인한다. 심지어는 무생물에 대해서도 애착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각인은 조류, 특히 닭·오리·거위 들에서 집중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이것과 비슷한 학습형태가 포유류·어류·곤충류에서도 명백히 나타난다.
새끼 오리의 뇌는 어떻게 교수(사람)을 각인하는가? 이 문제는 아주 최근까지 완전한 미스터리였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신비의 베일이 벗겨지면서 새로운 베일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최초의 베일은 뇌의 어느 부위가 관여하는가이다. 실험에 따르면, 새끼새가 부모를 각인할 때 새끼새의 기억이 최초로 가장 빠르게 저장되는 곳은 IMHV라는 뇌부위다. 이 부위에서도 오직 왼쪽 면에서만 그 모든 변화와 함께 각인이 이루어진다. 왼쪽 IMHV가 손상되면 새끼새는 어미를 각인하지 못한다.
이 사례는 새끼 오리의 환경적 변수 새끼 오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새끼 오리의 유전적 변수가 새끼 오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것, 즉 유전자는 행동의 원인이자 결과라는 것이다.
책은 유전자는 양육에 의존하고 양육은 유전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풍부한 사례들을 통해 역설한다.
1970년대 미국에서는 사춘기를 넘긴 최초의 야생아가 발견된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발견된 13세의 소녀 제니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대받은 시각장애 어머니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편집적인 아버지 밑에서 제니는 어린이용 변기 의자에 묶이거나 우리 같은 침대에 감금된 채 독방에서 자랐다. 그녀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고 기형에 거의 완전한 벙어리였다.
그녀가 발견되었을 때 그녀에게 말을 가르치려 했지만 그녀는 기본적인 문법은 물론 어순을 결정하는 구문법조차 배우지를 못했다. 결국 제니는 평생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다. 이 사례는 언어 또한 단지 외부세계로부터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기에 각인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학자들은 각인이 이루어지는 시기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고 한다.(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언어와 접하게 된다. 엄마가 아이에게 말하는 간단한 언어라든지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등 끊임없이 언어를 접하게 된다. 인간은 일생동안 언어를 접하며 배우게 되지만 언어를 배울 수 있는 적절한 ‘시기’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시기를 놓치면 언어를 배울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시기를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라 할 수 있다.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에릭 레너버그는 언어학습능력의 결정적 시기는 사춘기에 갑자기 끝나 버린다고 한다.) 이 결정적 시기를 놓치면 아무리 풍부한 언어 환경을 제공해도 피학습자는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언어를 학습하게 하는 능력을 가진 유전자가 있다면 환경이 적절한 시기에 그 유전자의 스위치를 작동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론자인 로크는, '인간의 마음이 아무 개념도 담겨 있지 않은 흰 종이와 같으며, 그 내용은 오로지 경험에 의해 채워진다.'고 했다. 로크는 본성을 부정하고, 양육을 옹호한 셈이다. 한편 루소와 칸트는, 인간은 본성을 타고 난다.'고 주장했다.
‘환경이냐 유전자냐’를 결정하는 해묵은 논쟁에 대해서 매트 리들리는 "유전자는 자궁 속에서 신체와 뇌의 구조를 지시하지만, 환경과 반응하면서 자신이 만든 것을, 거의 동시에 해체하거나, 재구성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책의 서문 다음과 같은 구절의 의미를 깊이 있게 음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유전자가 꼭두각시의 주인처럼 우리 행동을 조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행동에 따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 세계는 본능이 학습과 대립하지 않는 세계이고, 본성이 양육을 위해 설계되는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