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
리 듀거킨 지음, 이한음 옮김 / 지호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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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게는 문화가 없는가?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 걷기를 배우고, 말하기를 배운다. 그러나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아이들은 하품을 하고 기침을 한다. 기침과 하품은 자연적인 것이다. 매우면 눈물이 난다거나 모기에게 물리면 긁는 행위도 역시 자연적인 것이다.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말하기는 다르다. 아이들은 부모를 따라함으로써 언어를 배운다. 부모가 특정한 발음을 할 때, 입술과 이의 모양, 턱의 위치들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아이들은 발음을 익히고, 복잡한 문법구조들을 점차로 익혀나간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은 따라하기, 즉 모방을 통해서 문자를 배우고, 놀이를 배우며, 예술과 예절과 같은 복잡한 삶의 양식들을 하나하나 체득해간다. 만약 인간이 모방을 할 수 없는 존재라면 인간의 삶은 동물적인 삶에서 그치고 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우월한 이유는 모방을 통해 배우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많은 철학자들은 모방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중요한 요인으로 인식해왔다. 토머스 제퍼슨은 “인간은 모방적인 동물이다. 이 특질은 인간의 모든 교육의 근원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남이 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하기를 배운다.”라는 말로 모방이 인간의 문화에서 가지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루이빌 대학 생물학 교수인 리 듀거킨은 『동물에게도 문화가 있다(The Imitation Factor)』라는 책을 통해 동물의 진화가 유전자뿐 아니라 모방을 통한 문화적 전달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는 문화는 물고기에서부터 인간 이외의 영장류에 이르는 온갖 동물들의 모든 유형의 행동 속에서 그 영향력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작은 물고기들을 10여년 간 관찰한 저자는 뇌가 거의 없다시피한 물고기마저도 모방을 통해 문화를 전파하고 있고, 이런 모방은 동물의 진화에 유전인자 못지않은 영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모두가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인 유전자' 개념에 수정을 요구하는 도전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의 짝짓기와 같은 상황에서도 유전자와 문화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유전자가 동물의 모든 특성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반박하고 있는 셈이다.


리 듀거킨의 책이 소개하는 아마존몰리와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를 보자. 아마존몰리는 암컷뿐이다. 그리고 아마존몰리는 ‘자성발생'을 한다. 쉽게 말해 수정 후에 정자핵의 유전자는 배제되고 난핵만으로 발생이 진행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존몰리에게는 난자를 자극할 다른 종의 수컷 정자가 필요하다.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의 수컷이 아마존몰리를 위해 자신의 유전자를 낭비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데 세일핀몰리의 암컷은 다른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세일핀몰리의 수컷에 매력을 느낀다. 이런 암컷의 취향도 다른 세일핀몰리의 암컷이 짝을 선택하는 모습을 모방한 것이라고 한다.


다른 사례를 보자. 몸길이가 2㎝에 불과한 물고기인 거피 종의 암컷은 선천적으로 몸에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좋아한다. 그런데 수컷들의 오렌지색 양에 약간 차이가 있을 때면, 암컷들은 항상 오렌지색이 덜한 쪽을 선택했다. 그들은 그런 수컷 곁에 있는 암컷의 선택을 모방했다. 여기서는 짝 선택을 모방하는 경향이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선호하는 유전적 성향보다 우세했다. 문화가 유전적 성향보다 짝선택에 우월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수컷들의 오렌지색 양이 크게 다를 때는 암컷들은 칙칙한 쪽을 무시하고 오렌지색이 많은 수컷을 선택했다. 여기서는 유전적 성향이 문화적 성향을 가린 셈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짝의 선택에도 문화적 성향과 유전적 성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일본의 ‘이모’라는 마카쿠 원숭이는 사람들이 던져 준 고구마를 개울물에 씻어 먹어 주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 몇년 뒤 사람들이 모래 바닥에 밀을 던져 주자 이 원숭이는 더 큰 꾀를 부렸다. 모래가 섞인 밀을 물 속으로 던졌던 것이다. 그러자 모래는 가라앉고 밀만 물에 떴다. 그러고 나서 약간의 세월이 흐르자 그 지혜는 마카쿠 원숭이 사회에 쫙 퍼져나갔다. 이는 원숭이도 인간처럼 모방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배운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각기 다른 유전적 특성과 노래 습관 등을 지닌 사우스다코타와 인디애나의 탁란찌르레기를 놓고 실험한 결과도 동물의 모방능력을 보여준다. 인디애나 새끼들을 인디애나와 사우스타코타 어른 새들에게 나눠 키운 결과, 새끼들은 유전적 특성과 무관하게 양육자의 노래 습관을 따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으로 젖먹이 때 입양된 아기가 자신을 낳아준 혈연적인 부모의 언어보다는 자신을 길러주는 양부모가 속해 있는 문화권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카쿠 원숭이와 세일핀몰리라는 물고기의 예에서 보듯 단 하나의 개체가 무리 전체의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리 듀거킨은 모든 동물이 모방의 고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리 듀거킨의 주장은 문화적 전달이 동물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유전자와 성공적으로 상호작용한 문화는 유전자에 각인돼 다음 세대에 전달된다고 그는 설명한다.


물론 동물과 달리 인간은 모방을 통해 학습을 하며, 교육을 통해 복잡한 상징체계를 후대에 전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모방에 그치고마는 동물과 비교할 때 모방의 정도와 깊이에서 훨씬 더 세련되고 정교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방이 문화 습득과 전달의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한 인간만이 문화를 소유했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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