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 다윈 의학의 새로운 세계
랜덜프 네스.조지 윌리엄즈 지음, 최재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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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물리쳐야만 하는 인간의 적인가?



  원시인들은 굶주림과 항상 대결해야만 했다. 어쩌다가 운 좋게 사슴이라도 한 마리 사냥한다면 배불리 먹는 호사를 누렸겠지만 배부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고작 한 나절이면 끝이었다. 그런데 그 시절 먹이 속의 영양분을 체내에 축적해둘 수 있게 해주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남들은 먹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이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마음껏 먹고 체내에 지방으로 영양분을 축적시켜두고 필요할 때에 분해하여 쓸 수 있으니 생존에 훨씬 유리했을 것이 틀림이 없다.

 

 ‘다윈의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바로 이 유전자가 수렵시대의 원시인들에게는 꼭 필요했던 유전자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유전자의 이름은 무엇일까. 고마운 유전자? 영양축적 유전자? 답은 ‘비만유발 유전자’다. 대체 인간의 생존에 유리했던 이 고마운 유전자가 왜 ‘비만유발 유전자’라는 아름답지 않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다윈의학자들은 먹을거리가 풍부해진 환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초콜릿, 햄버거, 콜라, 피자, 감자칩… 풍요의 시대가 도래하자 수만 년 동안 인간의 몸에 존재하면서 영양을 축적해주고, 필요한 때에 에너지를 꺼내어 쓰게 해주던 기능을 하던 이 '고마운 유전자'가 이제는 '뚱보 유전자'니 '비만유발유전자'니 '성인병 유발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기침이나 통증, 발열, 빈혈 등과 같은 증상들을 질병으로 여긴다. 그런데 다윈 의학은 이 증상들을 적응에 의해 진화된 우리 몸의 방어 체계라고 주장한다. 기침은 허파에서 이물질을 제거해 준다. 허파에서 이물질을 제거함으로써 자칫 폐렴으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을 예방한다.

 

  아픔을 느끼는 능력 역시 몸에 이롭다. 가령 자연계에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하는 종과 고통에 민감한 종이 있다면 어떤 종이 선택될까를 생각해보라. 고통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빨간불, 일종의 경고요 신호인 셈이다. 고통에 민감한 사람은 그 신호를 빨리 알아차리지만 고통에 둔감한 사람은 그 신호를 간과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일종의 방어체계였다.

 고열은 세균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체가 세균에 반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높은 체온은 면역 반응을 촉진하여 병원균의 파괴를 쉽게 한다. 차가운 피를 가진 도마뱀도 병에 걸리면 따뜻한 곳으로 가서 본래보다 높게 체온을 유지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 도마뱀은 감염으로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빈혈은 세균으로 하여금 필요 영양분을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 인체를 방어하는 수단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성적인 간염에 시달리는 환자는 병을 앓는 동안에 세균이 철분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혈액 내에 정상적으로 순환하고 있는 철분의 많은 양을 회수하여 간장 안에 보관해 두기 때문에 빈혈 증상을 보인다는 것이다.

 

 다윈 의학의 주장대로 자연 선택이 신체의 방어 체계를 진화시켰다면 우리가 상용하는 약은 도리어 우리 몸의 방어 체계의 기능을 약화시킬 가능성도 있다. 가령 이질에 걸려 설사를 멎게 하는 지사제를 먹은 환자는 합병증에 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종길의 시 <성탄제>에는 사경을 헤매는 아들에게 해열제인 산수유 열매를 찾아 한밤중에 눈길을 헤매는 아버지가 등장한다. 깊은 밤 아버지는 어둠 속의 눈길을 헤치고 붉은 산수유 열매를 따오신다. 아들은 그 산수유 열매를 먹고 점차 열이 내린다. 간을 졸이시던 할머니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고 피로하신 아버지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돈다.

 

 병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을 묶어준다. ‘아버지는 나를 싫어하는 것이 틀림이 없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박정하게 대할 수 있지.’ 라고 생각했던 아들도 아버지가 자신의 병을 걱정하며 한밤중에 추위 속을 헤치고 약을 구해오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깨닫게 된다. 혈육이란 이렇게 같이 아파해주고, 아픔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존재임을 아들은 자신의 병을 통해 저절로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은 아프면서 자란다고 말씀하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그만 증상이라도 엿보이면 당장에라도 병원에 가서 항생제나 해열제 주사라도 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오늘날은 아이들이 제대로 아플 틈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No Pains, No Gains라는 말도 있고, 한 인간의 크기는 그가 겪어야 했던 시련의 깊이에서 온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퇴치해야만 하는 부정적인 존재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픔을 통해서 아이들은 세상을 보는 더 맑은 눈을 갖게 된다. 그것이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아봐야 그 병에 걸린 사람의 처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는 법이다. 병은 퇴치해야만 할 적만은 아니다. 병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도 있다면 병은 타인에게로가는 사랑의 통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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