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 - 인물과 건축 시리즈 2
승효상 / 서울포럼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불편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건축가 승효상



  워싱턴 호수와 유니언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일명 ‘호수 위의 집’은 마이크로소프트사 회장인 빌 게이츠의 저택.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연어들이 알을 낳는 호수가 집 안 어디에서나 한눈에 들어온다. 배를 타고 호수를 가로질러 1층 현관에 들어서면 1층 현관 오른쪽에 리셉션 홀이 있고, 왼쪽 복도를 따라가면 극장이 나오고, 더 나가면 가로 5m, 세로 15m 규모의 수영장이 있다.

  이 집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누구나 전자핀을 옷깃에 꽂아야 한다. 이 핀은 방문객이 누구인가, 그가 지금 저택의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준다. 방문객이 복도를 걸어갈 때마다 몇 발자국 앞에서 전등이 저절로 켜지고 꺼진다.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면 어디를 가든 그 음악이 귓가를 따라다닌다.

  저택 안의 도서실의 중앙에 빌 게이츠의 책상이 놓여있다. 도서실의 시스템은 각종 정보를 취합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집안에는 곳곳에 대형 비디오 모니터가 설치돼 있고, 집 안의 모든 컴퓨터에는 사무자동화용 소프트웨어가 깔려있다. 

  빌 게이츠는 그의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집은 우주의 중심’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는 “내 목표는 편안하고 즐거우면서도 쾌적한 분위기로 창조성을 자극하는 집을 짓는 것이며 ‘집이란 미래의 비전을 만들고 사업구상을 위한 창조의 터’라는 집에 대한 철학을 말한 바 있다. 


  미국의 컴퓨터라이프 잡지와 인텔이 주최한 ‘사이버홈(CyberHome) 2000’  전시회는 인텔, IBM, 컴팩, 휴렛팩커드 등 첨단기술을 이끄는 회사들이 참가해 사용자들의 생활을 보다 안락하게 해주는 PC 기술을 보여줬다.

  컴퓨터라이프 편집장 매기 캐논은 사이버홈 2000은 “단순히 미래의 가정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기술이 미래에 실현되는 현실적인 방법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가령, 저녁 무렵 PC와 연결된 부엌의 평면 스크린은 음성 명령에 따라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온 비디오 메시지를 보여준다. 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저녁 식사는 어디서 할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팩스나 전자메일, 전화 메시지도 들려준다. 

  귀가하면서 차에 있는 PC를 통해 저녁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주방 카운터에 있는 스캐너로 식품보관소에 들어 있는 몇 가지를 선택하고 PC로 접근하면 몇 가지 조리법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조리를 시작할 수 있다.

  사이버홈 2000에서는 PC로 아이들이 어떤 게임을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못된 동영상을 보았다가는 부모님께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부모들은 pc로 아이들이 영화를 보는지, 숙제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는 아이들이 어떤 웹사이트를 검색하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청결한 흰 침대에서 눈을 뜬 링컨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서 소변을 본다. 이때 소변을 분석한 변기 내 장치가 말을 한다. “몸에 이상이 발견돼 주치의를 연결할 테니 만나보라” 이는 영화 <아일랜드>의 한 장면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최첨단 디지털 의료장비를 생활 속에서 마는 것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다. 바로 눈 앞의 현실이다. 이미 혈압이나 혈당 등 신체와 관련한 각종 정보가 병원에 갈 필요도 없이 시시각각으로 점검되는 시대다.


  이쯤 되면 가히 디지털 혁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등을 발명했다는 에디슨이 살아난다 해도 이런 첨단기술에는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편리만이 능사일까.


『장자』의 <소요>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자공이 초나라를 유람하다 진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 남쪽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한 노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자공이 용두레라는 기계를 소개합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분연히 낯빛을 붉히며 이야기한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장자에 등장하는 노인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에 등장하는 산티아고라는 노인과 너무도 흡사하다. 노인은 엄청나게 거대한 청새치와의 사투 끝에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에게 청새치를 빼앗기고 뼈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산티아고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죽는 일은 있을 망정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고. 노인이 얻고자 했던 것은 물고기가 아니다. 만약에 그가 물고기를 원했다면 탁월한 성능을 가진 기계를 사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티에고가 원한 것은 물고기 그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원한 것은 물고기를 잡는 분투의 과정이었다. 산티에고 노인이 기계를 사용했다면 그는 물고기라는 결과는 얻었을지언정 고통스런 과정은 잃어버렸을 것이다.

  산악인들도 마찬가지다. 첨단의 기술에 의존하면 쉽게 정상을 정복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겪어야 할 고통스런 과정은 사라진다. 그러나 산악인의 영광은 오히려 고통스런 과정에 있는 것이다. 똑같이 에베레스트를 올랐다고 할지라도 더 험한 시즌에, 더 힘든 코스를 택한 산악인에게 최고의 영광이 돌아간다. 최고의 영광은 가장 큰 고통을 이겨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법이다. 그러므로 <장자>의 노인에게 있어서나, 산티아고 노인에게 있어서나, 산악인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고통은 당당히 맞서야할, 물리쳐야 할 초극의 대상일 따름이다. 장자의 노인이나 산티아고 노인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편리만이 인간적 진실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편리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시대에 불편함의 미덕을 강조하는 건축가가 있다. 승효상이 바로 그다. 그는 아름다운 집이란 어떤 집일까에 대해서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우선 내 견해로는 다소 불편한 집이다. 소위 동선도 길어서 좀 걸어야 하고 대문도 나가서 열어줘야 하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를 훔치며 가족의 살내음을 맡을 수 있는 그런 집이 건강한 집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다소 불편한 듯한 집에서의 삶이 궁리를 만들고 생각하게 하고 사유케 한다. 다시 말하면 사유할 수 있어 우리의 삶을 다시 관조하게 하는 집, 이 집이 아름다운 집이며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집이다.”

  거실에 앉아서 리모컨 하나로 문도 열고 에어컨도 작동하고 밥도 짓고 창문도 여닫을 수 있는 것이 홈오토메이션일지 모르지만 그런 식의 자동화는 오히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살가운 관계를 방해한다는 것이 승효상의 생각이다. 기능성, 편리성이 다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승효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건축에서 배우라는 것이 그가 말하는 이른바 ‘빈자의 미학’이다. 장식과 치장으로 집을 채우려만 하지 말고 담백하게 비우라는 것이 그가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빈자의 미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충고다.

  사람이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공간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승려들이 지내는 검소한 방은 승려들로 하여금 검소한 태도를 몸에 지니게 한다. 엄숙한 분위기의 사원은 사람을 진중하게 한다. 채움의 미학보다는 비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건물이 소박한 인간성을 만들어낸다는 것이 승효상의 건축철학이다. 편리성과 기능성을 추구하는 첨단의 건축기술만이 다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는 『지혜의 도시 지혜의 건축』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름다운) 집들은 홀로 서 있지 않으며 더불어 있고 밖으로 열려있다. 폐쇄회로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지 않고 철조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으며 담장은 낮아서 바깥의 풍광이 넘나들고 골목소리가 쉽게 들리는 집이며 어떻게 보면 만만히 보여 쉽게 이웃하도록 만드는 집이다. 이런 집에서의 삶은 집 속에만 갇혀 있지 아니하고 이웃으로 이어져서 서로서로에 애정을 쏟아 결국 우리의 공동체를 건강하게 한다.”

  빌 게이츠의 저택은 그에게 ‘사업구상을 위한 창조의 터’일지는 몰라도 우리네 마당과 같이 혼례도 치르고, 같이 일도 하고, 잔치도 여는 그런 인간적인 터는 아닌 듯싶다. 첨단의 건물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 점점 인간적인 공간은 축소되어 간다. 인간이 인간을 만나 살내음을 맡고, 때로는 고독하게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공간은 없을까. 일찍이 조선시대 유학자 송순은 이렇게 노래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여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 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멋과 낭만이란 곧 스스로를 비워낼 줄 아는 여유일 것이다. 정전이 되고 컴퓨터 시스템에 혼란이 생긴다면 이내 엉망이 되는 그런 집이 아니라 다소 불편하더라도 여유 있는 집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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