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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가난한 자에게 필요한 것은 빵이 아니라 정치적 삶이다
희망의 인문학/ 얼 쇼리스/ 이매진/ 2006
가난한 계층일수록 이혼율이 높고 가난한 집일수록 가정 폭력이 빈번하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집은 사실상 동화 속의 현실이다.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 City Of God>를 보라. 그곳은 행복의 땅이 아니다. 아이들이 어른처럼 시가를 물고 총질을 한다. 마약과 술에 찌든 곳, 절도와 폭력이 빈번한 곳이 슬럼가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예절도 형이상학도 배고픔의 해결보다 먼저일 수는 없다.
노숙자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괴테를 가르친다면 어떨까. 얼빠진 짓이라고 할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그들에게 빵과 우유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며,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지, 자선과 기부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반박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얼 쇼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인문학이 가난과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믿었다. 『희망의 인문학』은 그런 믿음에 관한 기록이다.
얼 쇼리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속적인 빈곤 상태로 묶어두는 메커니즘을 ‘무력(force)의 포위’라고 분석한다. 굶주림, 범죄, 소외, 타인의 시선 등의 무력은 이들을 ‘공적인 삶’이 이뤄지는 자유로운 공간에서 생존에만 급급한 ‘사적인 세계’로 내몬다. 가난은 자신을 성찰할 기회도 앗아가며 남들과 연대할 공적인 삶의 기회도 앗아간다. 사적인 세계에만 매몰되어 있는 ‘무력의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성찰적 사고가 필요하다. 저자는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라고 말한다. 이 인문학의 힘이 고대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과연 민주주의와 인문학이 서로 관련이 있을까. 그는 이 가설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1995년 노숙자, 빈민, 죄수 등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프로그램 ‘클레멘트 코스’의 개설이 그것이다. 뉴욕타임즈의 예술 칼럼니스트, 메사스추세츠공대의 논리학 교수 등 클레멘트 코스에는 이 취지에 공감하는 최고 수준의 교수진이 모였다. 가히 ‘백만 달러 교수진’이었다. 최고 수준의 교수진이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철학과 문학과 미술을 강의했다. 17명이 끝까지 강의에 참여했고 졸업 후 6개월이 지났을 때 16명이 정규 대학에 진학하거나 전일제 일자리를 얻었다. 이 코스에 참여했던 이들은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됐다. 시험은 성공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클레멘트 코스는 현재 미국, 캐나다, 멕시코, 아르헨티나, 호주, 한국 등 6개국 57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클레멘트 코스가 운영되고 있다. 성공회대가 운영하는 성프란시스코 대학은 2005년 9월 첫 입학식을 열어 12월 가을학기를 마쳤다. 20명 중 17명이 이 과정을 수료했다. 광명시 평생학습원이 운영하는 광명시민대학에서도 2005년 인문학 강좌가 운영됐다. 16명의 기초생활 수급권자가 창업 강좌와 더불어 ‘동양고전을 통한 삶 읽기’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이 강좌에 높은 만족감을 표시했다.
얼 쇼리스가 클레멘트 코스를 구상한 것은 교도소에서 만난 한 여죄수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사람들이 왜 가난할까요?"라는 쇼리스의 질문에 할렘가 출신의 비니스 워커라는 죄수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정신적 삶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 워커가 말한 ‘정신적 삶’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정신적 삶이라고 해서 형이상학적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 삶은 사적인 세계에만 매몰되어 있는 ‘무력의 포위망’에서 벗어나 공적인 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적 삶을 의미한다.
『희망의 인문학』에서 저자가 말하는 빈곤계층은 단순히 경제적 차원의 약자만을 일컫지 않고, 성별, 인종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로 취급받는 사회적 소수를 일컫는다. 저자는 가난한 사람들이란 능력이 부족하거나 별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편견에서 벗어나라고 주문한다. 이 같은 편견을 바탕으로 빈민을 위한 복지정책은 ‘교육’이 아닌 ‘훈련’에만 의존해왔다고 비판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훈련은 가난한 사람들을 계속 순종적인 사람들로 묶어놓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성찰적 사고를 통해 가족에서 이웃과 지역사회로, 나아가 국가로 이어지는 공적인 세계에 참여하는 정치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가난이 계속되는 이유는 빈민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만들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이다. 저자는 정치적 삶은 빈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강력한 대안이고 인문학은 정치적 삶으로 들어서는 입구가 된다고 주장한다.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시민적 자유와 책임과 권리의 의미를 깨닫게 될 때 가난한 사람은 비로소 기존체계를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얼 쇼리스는 단적으로 윤리적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합법적이고 정당한 힘을 가짐으로써 위험한 존재가 되는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인문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수동적인 존재에서 능동적인 존재로 변모시킴으로써 그들을 '위험한 시민'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쇼리스는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가 위험한 존재가 됨으로써 획득된다.”라고 말한다. 위험이란 자신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지불해야할 비용인 셈이다.
빈곤 퇴치에 대해 얼 쇼리스와 다른 입장을 견지한 학자는 2006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그라민 은행의 총재인 무하마드 유누스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나서, 대학공부를 하고 미국에서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누스는 귀국하여 한 대학 인근의 ‘조브라’ 마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당시 조브라 마을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대나무 제품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 여성들은 하루 종일 일해서 버는 돈이 고작 50페이샤 우리 돈으로 20원 정도였다. 시장에 직접 내다 팔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으나 대나무 의자를 만드는 재료 구입비 200원이 없어 고리대금업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유누스는 조사 결과 마을의 42명에게 27달러만 대출해 준다면 고리대업자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누스는 이들에게 27달러를 돈이 생기면 갚으라는 조건으로 빌려 주었다. 이것이 그라민 은행의 출발이었다. 확실한 빈민구제책이었던 셈이다.
『희망의 인문학』이 말하는 ‘부’는 유누스가 말하는 ‘부’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희망의 인문학』의 원래 제목은 ‘Riches for the Poor(가난한 자들을 위한 부)’이다. 과연 가난한 자에게 ‘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자는 말한다. “인문학이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줄까요?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단, 돈을 많이 벌게 해준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부자로 말입니다.” 쇼리스가 말하는 ‘부’란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창조하고 설계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멕시코 원주민 1400명이 거주하는 히스토키 마을에서 1997년부터 2년 코스로 운영된 클레멘트 코스가 어떻게 그들을 변모시켰는지를 보라. 주민들은 스페인어 대신 마야어를 쓰게 되었고, 지역 정치인과 교사도 배출했다. 변화된 이들의 의식을 고려하지 않고 물질적인 관점에서만 이들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속단일지도 모른다.
빈곤에 대한 해독제로서 많은 사람들은 ‘노동’을 꼽는다. 일하지 않고서는 주린 배를 채울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얼 쇼리스도 “노동은 지갑을 채우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영혼에 위안을 주고 정신을 안정시켜 준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동만으로는 가난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가난이 구조적인 문제요,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제하의 농민들이, 1970년대의 노동자들의 가난은 결코 그들의 무능 탓이 아니다. 얼 쇼리스는 미시시피 그린빌이라는 마을에 사는 위든(Weeden)씨의 가족을 예로 들면서 왜 그들은 밤을 새워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의식주마저 해결하기 힘드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노동이 가난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노동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특성을 시급히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얼 쇼리스는 미국 사회에서 부자와 빈민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를 소개한다. 사우스 브롱크스 빈민 지역에 테니스 코트가 하나 있다. 청소년가족 서비스 프로그램에서 나온 사회복지사가 이 들을 데리고 코트로 갔다. 아이들은 서로 라켓을 차지하려고 아우성이었다. 줄은 흐트러졌고 질서를 잡는 데만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반대로 중산층 이상이 거주하는 북쪽의 교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아이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았고. 질서를 지켰으며,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경기를 진행시켰다. 얼 쇼리스는 이를 두고 말한다. “가난한 아이들은 정치적이지 않다. 그들은 질서와 자유 사이의 중도를 발견할 수 없다. 대신 그들은 끄집어낼 수만 있다면, 아무리 보잘것없는 무력이라도 행사하려고 했다. 테니스 배우기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무력의 무질서 속에서 잃어버렸다. 가난한 아이들은 테니스 코트에 자신들의 상황을 비추어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정치에 무관심한 자신들의 행동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들은 정치적 규칙보다는 무력의 법칙에 따라 반응한다.” 얼 쇼리스는 빈민들의 삶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치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 ‘빵’으로 상징되는 ‘필요’의 지배를 받게 되면 정치적 삶을 살 수 있는 시간도, 열정도 사라지게 되며, 그 결과 ‘힘 있는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어진다. 빈민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는 것도 그들로 하여금 ‘필요‘의 지배를 받게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쇼리스는 직업훈련을 바람직한 빈민구제책으로 보지 않는다.
진정한 힘은 공적인 삶, 정치적인 삶을 구성할 수 있는 반성적 사유에서 온다. 공적인 삶은 합법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으로 가난한 자들을 성장시킬 수 있다. 또 정치적인 삶은 시민권이 가져다주는 명예를 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명예란 나는 이제 더 이상 무력하고 소외된 자가 아니라 내 운명을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