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과 논문 이학문선 3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신상희.박찬국 옮김 / 이학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하는 현대의 기술

강연과 논문/ 마르틴 하이데거/미학사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사르트르는 시적인 언어와 산문의 언어를 사물과 도구의 개념을 빌어 설명합니다.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죠. 도구는 투명하고, 사물은 불투명하다? 이게 웬 뚱딴지같은 말일까요. 사르트르의 견해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도구는, 그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평상시에는 전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합니다. 가령 진공청소기가 잘 작동할 때는 우리는 전혀 그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죠. 그러나 일단 고장이 나면 우리의 시선은 진공청소기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잘 작동하는 청소기는 나의 시선을 통과시켜버리는 투명한 것이지만, 고장난 진공청소기는 나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한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불투명한 사물이 된 것입니다.

모든 도구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성질, 즉 용도성(用度性)을 갖고 있습니다. 옷은 사람의 피부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가 있고, 망치는 못을 박는 용도가 있습니다. 하나의 존재는 '무엇을 위하여'라는 용도성의 있고 없음에 따라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가 구별됩니다. 그런데 청소기처럼 용도성을 가지고 있는 도구적 존재가 그 도구성을 상실할 때, 즉 고장이 났을 때, 그때 비로소 거기에 가려져 있던 사물적 존재성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요. 고장난 도구는 비로소 우리의 눈에 띄고, 우리에게 특별한 조치를 취하도록 종용하고, 우리의 시선이나 관심을 통과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선에 부딪칩니다. 이것이 사물의 불투명성이지요.


여기에서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개념으로 도구적 언어와 사물의 언어를 규정해볼까요

우리가 하나의 장미를 바라보면서 장미와 관련된 추억을 떠올린다면 우리의 시선은 장미를 통과하여 과거의 한 시점을 보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때 장미는 보는 이의 시선을 통과시키는 투명한 존재요, 과거의 한 시점을 떠올려 주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장미 자체의 빛깔과 향기에 취한다면 우리는 장미는 우리의 시선을 가로막는 ‘불투명한’이 사물이 됩니다. 이때 장미는 무엇을 상기시켜주거나 어떤 관념을 떠올리게 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의 사물인 셈이지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는 어떤 의미를 나타내주는 기호에 불과합니다. 기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투명한 기호 너머의 의미를 지시해줄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어가 가리키는 언어 너머의 것만을 볼 뿐이지, 언어 자체를 보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도구로서의 언어의 투명성입니다. 그러나 시의 언어는 이와는 다르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견해입니다. 시의 리듬과 이미지와 어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의 언어를 사물로서 대하는 태도라는 것이지요. 만약에 시의 언어도 도구의 언어처럼 투명하다면 우리는 시의 언어가 갖는 아름다움을 간과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불투명한 시의 언어에 우리의 시선이 머물게 됨으로써, 즉 시의 언어를 사물로 대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숲을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죠. 한 사람은 숲의 자원을 어떻게 이용할까를 고민하는 산림학자요, 한 사람은 숲에서 생명의 경외감을 읽는 시인이라고 해봅시다. 산림학자의 관심은 자원으로서의 숲일 뿐입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숲[도구]이 아니라, 숲의 경제적 가치[목적]입니다. 그가 숲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의 관심은 숲 ‘너머’의 목적입니다. ‘너머의 것’을 본다는 것은 숲을 투명한 도구로서 대하는 태도요, 숲을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태도는 이와 다릅니다. 그의 시선은 숲의 표면에 가서 머뭅니다. 그는 나무의 결을 보고, 나무의 잎사귀를 보고, 나무에 깃들여 사는 생물들을 볼 것입니다. 자연에서 창조주의 경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숲의 표면을 봅니다. 숲에서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오직 숲을 분석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숲이 무수한 생명의 사슬로 이어져 있는 거대한 공생의 세계라는 사실을 망각합니다. 과학자, 기술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겠지요. 물론 평화를 주창했던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나 ‘공생의 인간[호모 심비우스]'이 되어야 함을 힘주어 말하는 최재천 교수 같은 분은 예외지만 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강연과 논문』이라는 책에서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은 자연을 도구적 존재로만 생각할 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연관되는, 이른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거대한 사슬체계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공생의 터전으로서의 자연, 정서적 풍요로움의 근원으로서의 자연을 망각한다는 말입니다.


1953년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을 던지면서 기술의 본질에 대해서 “우리가 나무의 본질을 찾아 나설 때 개개의 나무를 나무로서 속속들이 지배하고 있는 그것(즉, 나무의 본질)은 흔히 보는 나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렇듯 기술도 기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기술적인 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데만 급급하여 그것에 매몰되거나 회피하는 한 기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해서 치열하게 묻고 답합니다. 『강연과 논문』은 바로 그 질문과 답의 치열한 기록입니다.

하이데거는 기술의 본질을 기술이라는 낱말의 희랍어인 ‘테크네(techne)’에서 찾습니다. 테크네라는 낱말은 은세공인이 은덩이를 깎아서 은쟁반을 만들어내는 수공이기도 하고, 화가가 한 폭의 그림을 그려내는 예능이기도 합니다. 테크네의 본질은 가려져 있는 것, 은폐되어 있는 것을 끌어내 앞에 내놓는 것, 다시 말해 은폐성으로부터 비은폐성으로 끌고 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술적 활동도 ‘나타나 있지 않은 것, 즉 ’은폐된 것‘을 형상을 통해 나타나게 하는 작업이며,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기술적 활동도 철광석이라는 재료 속에 은폐되어 있는 것을 ’철‘로 나타나게 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테크네는 곧 ’탈은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철광석을 가만 두면 철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가만히 두는 무위(無爲)의 존재였다면 철기문명은 도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연에게서 무언가를 요청하고 주문하는 존재, 닦달하는 존재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를 주문하고, 철광석에서는 철을 닦달하지요. 여기에서 ‘닦달’은 은폐되어 있는 것을 드러나도록 하는 행위, 비유컨대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내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죠,

하이데거는 그의 강연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과거의 수공업적 기술과 현대의 기계적 기술을 대비시키면서 전통적인 기술이 인간과 자연을 어우러지게 한 반면 현대적인 기술은 인간과 자연을 떼어놓고 인간을 통해 자연을 닦달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현대의 기술 속에 성(盛)하고 있는 탈은폐는 도발적 요청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채굴되어 저장될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에게 내놓으라고 무리하게 요청한다. 이것은 과거의 풍차에도 적용이 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풍차의 날개는 바람의 힘으로 돌아가며 바람에 전적으로 직접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이는 순풍을 안은 돛이 바람을 드러내는 방식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기술은 이와 어떻게 다를까요? 하이데거는 현대의 기술이 ‘내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놓으라고 무리하게 요청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낸다고 지적합니다. 하이데거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농부들이 예전에 경작하던 밭은 그렇지 않았다 … 농부의 일이란 농토에 무엇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뿌려 싹이 돋아나는 것을 그 생장력에 내맡기고 그것이 잘 자라도록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농토 경작은 자연을 닦아세우는,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작 방법 속에 흡수되어 버렸다. 이제는 그것도 자연을 도발적으로 닦아 세운다. 경작은 이제 기계화된 식품공업일 뿐이다.” 이런 발언들을 통해 하이데거는 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해서 부가가치를 생산해내려는 현대기술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을 쥐어짜고 닦달하는 존재는 자연을 사르트르가 말하는 ‘사물’로서 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수단으로서 자연을 대합니다. 자연을 부품으로 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연을 부품으로 드러나도록 도발적으로 닦아세우는 담당자인 인간은 도구에 의해서 거꾸로 닦달당하기도 합니다. 찰리 채플린이 주연한 영화 <모던타임즈>의 유명한 장면을 떠올려 보면 그 사실이 분명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쉼 없이 도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하루 종일 부품의 나사를 조이는 작업을 하는 노동자는 기계에 의해서 노동력을 닦달당하는 존재입니다. ‘인력자원’이란 말에는 현대기술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시선의 온도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을 수단으로 보는 현대기술의 차가움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마치 자기 자신이 세계의 지배자라도 된 양 거드름을 피웁니다. 과학이 모든 불가능한 꿈을 이루게 할 것이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볼 때, 우리 인류란 사유하지 않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류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본질을 대면하지 못함으로써 당면한 추락의 위험을 모르고 오히려 부품으로서 드러나는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이지요.

모든 기술에는 하나의 약속이 있습니다. 더 멋진 곳, 더 나은 곳으로 우리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겠다는 약속이 그것이지요. 그러나 단지 물질의 풍부함만으로 우리의 삶이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영화 <아일랜드>를 떠올려 보세요. 복제품인 클론들은 자신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통제와 규율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은 행복의 땅, '아일랜드'를 꿈꾸지만 그들은 인간의 욕망을 실현시켜줄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구는 자신들의 욕망을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도구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인간의 필요를 위해 쓰여지고 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가 도구입니다. 클론 역시 마찬가지죠. 그들의 장기를 적출하여 인간에게 이식하고 나면 그것으로 클론의 생은 마감됩니다. 그러나 클론들은 왜 내가 죽어가야 하는가, 왜 내 몸으로 낳은 아이를 빼앗겨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합니다. 클론이 제기하는 의문들은 바로 ‘닦달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항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숲 속의 동물과 식물들에게도 말할 수 있는 입이 있다면 아마도 인간에게 클론처럼 말했을 것입니다. “제발 우리들을 닦달하지마. 제발 그만 좀 놔둬. Let It Be.”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위적인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나치게 자연을 닦달하고 인간을 닦아세우는 문명은 분명 폭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경제를 살리는 것도 좋지만 지나친 닦달은 피곤을 가중시킬 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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