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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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듯 몰두하는 선비들의 세계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정민/휴머니스트/2007년




어떤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일까? 답은 간단하다. 스프링에 물리적 압력을 주었을 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능력, 즉 복원력이 뛰어난 스프링이 건강한 스프링이다. 일반적으로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을 건강함이라고 할 수 있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젊고 싱싱한’ 스프링은 원상회복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자주 사용해서 탄성을 잃은 ‘노후한’ 스프링은 눌러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사람은 병에 걸려도 원래의 상태로 이내 돌아간다. 술을 많이 마셔도 하루쯤 끙끙댈 뿐, 고통을 이틀이고 사흘이고 가져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이든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하루 밤을 새고 나면 며칠이고 몸 상태가 좋지 않다. 과음을 하면 그 후유증이 며칠을 간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원래상태로의 복구력이 현저하게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건강은 원상을 회복할 수 있는 복구력으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복구력으로서의 건강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건강에 한해서일 뿐이다. 정신적 건강은 원상 복구력만으로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가령 A라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자. 누구나 슬픔에 잠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A가 이내 평상심을 회복하고 아무런 동요 없이 아버지의 상을 치르고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답은 NO다. 그는 배은망덕한 호로 자식이란 말을 듣기 십상이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 애통해야 할 만큼 애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다. 정신적 건강함은 그 인간의 도리를 빼놓고서는 말해질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정도 아파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따로 마련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 이런 헛갈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선학들이 고민을 한 바 있다. 동양에서는 "낙이불음(樂而不淫)"과 "애이불상(哀而不傷)"을 말했다. “즐거워하되 음란함에 빠지지 말고, 슬퍼하되 상심에 빠지지 말라”라는 것이 그것. 쉽게 말하면 오버(over)하지 말고 적당히 해두라는 것. 나아갈 때와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는 것, 중용을 지키라는 것이 동양의 고전들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충고다.


중용의 미덕을 <<중용>>에서는 ‘시중(時中)’의 개념을 들어 말한다. ‘시중’은 무조건 가운데를 취하는 행동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 왼쪽으로 기울어질 수도 있고, 오른쪽으로도 기울어질 수 있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처신하라는 것이 시중의 진리이기도 하다. 한용운이 일본식으로 개명을 한 후배들의 뺨따귀를 후려쳤지만 정작 한용운이 세상을 떴을 때, 뺨을 맞은 이들이 오히려 ‘이제는 누가 우리의 뺨을 후려쳐주겠느냐.“라며 통곡하지 않았던가. 상황에 따라 호통이 필요할 때는 호통을 치고 뺨따귀를 갈겨야 할 때는 뺨따귀를 갈기고, 칼을 뽑아들어야 할 때는 칼을 뽑아들어야 한다는 것이 시중의 지혜다. 늘 같은 목소리로 말하고, 평균적으로 행동하고, 상식의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거주하는 것이 시중의 지혜는 아니다.


시중의 지혜를 체현하기 위해서는 도저한 열정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열정으로 뱅샹 고호는 자신의 귀를 자르고, 예술적 에너지를 자신의 작품에 온통 쏟아 붓는 삶을 살았고, 베토벤은 들리지 않는 귀로 불후의 교향곡을 작곡했는지도 모른다. 예술적 천재를 완성한 것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그들의 열정이었다.


그러나 근엄한 도학자들이나 이성주의자들은 열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스토아학파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들이 정념에서 벗어나기를 주문했다. 동양에서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취미에 몰입하면 뜻을 잃어버린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도학자들에게 우주의 궁극을 따지는 철학적 사변은 옳은 것이었지만 난초를 즐기고 기예에 빠지는 것은 그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매니아들처럼 ‘비틀즈’ 구성원들의 생일이나 혈액형 등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파고드는 태도를 고루한 선비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달랐다. 18세기 지식인들이 과거의 선비들과 얼마나 달랐느냐를 살피기 위해서는 정민의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란 책을 펴보는 것이 좋다.


18세기 지식인들은 무엇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미친 듯 몰두하여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몰입의 상태를 벽(癖)이라 한다. 도벽, 노름벽, 주벽이란 단어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 벽(癖)이란 어떤 것에 대한 기호가 지나쳐서 억제할 수 없는 병적인 상태가 된 것을 뜻한다. 또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바보로 보이는 상태를 치(癡)라고 한다. <18세기의 미친 바보들>이란 글에 정민이 소개하고 있는 박제가는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면서 벽(癖)이나 치(癡)로 평가받는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책의 저자 정민은 ‘그들은 편집광적인 정리 벽과 종류를 가리지 않는 수집벽, 사소한 사물에까지 미친 애호벽이 동지적 결속 아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고 평가한다. 책을 통해 18세기 지식인들의 구체적 면모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화장실을 가든 나들이를 가든 평생 <옥해(玉海)>란 백과사전을 끼고 살던 이의준은 집에 불이 나자 책을 구하려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었다. 또 판서 윤양래는 탈상(脫喪)한 집을 찾아가 상복과 두건을 모아오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 ‘돌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석치(石癡)라는 호를 가진 정철조는 보이는 대로 돌을 파서 벼루로 만들었고 ‘책에 미친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癡)라는 호를 가진 이덕무는 밀랍으로 매화까지 만드느라 열심이었다. 꽃에 미쳐 수백여 종의 꽃을 세밀하게 그린 김덕형, 기석(奇石)에 탐닉했던 이유신, 앵무새를 관찰한 내용과 관련자료를 모아 ’녹앵무경‘을 낸 이서구, 비둘기의 품종과 교배, 성질 등의 내용을 담은 ’발함경‘을 낸 유득공의 기이한 면모를 책은 보여준다. 이옥이 친필로 쓴 『연경(烟經)』은 담배에 관한 책이다. 장절을 나눠 담배 농사의 단계별 주의 사항을 적었고, 담배의 문화사적 정리까지 시도했다. 가짜 담배 식별법에서 담배에 얽힌 전설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우는 법까지 소개했다. 담배 피울 때 쓰이는 12종의 도구도 하나하나 설명했다. 지독한 편집증이다. 특히 이들은 앵무새와 같은 미물과 관련된 책에도 경(經)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격물(格物)’이란 사물들을 밑바닥까지 살피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서 아들 정학유가 양계를 한다는 말을 듣고는 편지를 띄운다. “기왕에 닭을 치기로 했다면 닭에 관한 기록으로 ’계경(鷄經)‘을” 지으라고 당부한다. 성인들의 말씀을 기록한 책들에게만 붙일 수 있는 ’경(經)‘이란 말을 미물에게까지 붙인 데에서 실제를 중시하는 실학자들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18세기에 나타났을까. 저자는 그 원인으로 새로운 문물의 경험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을 우선적으로 꼽는다. 북벌을 주장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청나라 연경에서 느꼈던 문화적 충격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사방으로 뻗은 도로, 으리으리한 건축물, 거리를 가득 메운 서점과 산더미와 같은 서책, 서양에서 들어온 과학문물․․․. 더 이상 그들은 미천한 오랑캐가 아니었으며,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적이 아니었다. 양이 질을 결정한다던가. 청나라를 통해 수많은 책들이 들어오고, 한성의 서적 유통시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자 조선 지식인들의 의식은 급격하게 변모했다. 그들이 신주단지처럼 여겼던 주자학이란 학문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던 것. 바로 여기에서 ‘실제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싹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경전에서 찾을 수 있는 이상적 가치보다는 현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실제적인 진실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또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조선의 시를 짓겠다.“라고 천명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저쪽‘보다는 ’이곳‘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책의 저자는 조선의 ‘자생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된 세계관에서 찾았다. 그러나 이런 18세기 지식인들의 변화에 대한 열정은 시대의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소수였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열정이 뜨거울수록 이들을 불온시하는 보수적 지배층의 감시도 커져만 갔다. 정조는 이들의 문체를 불온하다고 하여 문체반정(文體反正)이라는 사정의 칼날을 빼들었다. 그것이 18세기의 한계였고 시대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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