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책의 속날개에 ‘자전거 레이서’라고만 적는다. 자전거 레이서라? 스스로를 소설가라 자처하지 않는 그의 속내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는 소설가로 분류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소설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훈은 한 인터뷰에서 문학의 엄숙주의에 대해 거의 원색에 가까운 쓴소리를 던진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신비화하지 말라는 것,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를 알아달라는 주문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다겠다는 점에서 그는 여느 이상주의적 소설가와 구별된다.
 
  인 황지우는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있을 때/이 세상 곳곳/소요하다 가거라’(「피크닉1」)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관념은 이상이고 몸은 현실이다. 그의 소설을 펴보라.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함을 넘어선다. ‘새벽에 술을 토했다. 노란 위액이 콧구멍으로 쏟아졌다. 종이 달려와 등을 두들기고 토사물을 치웠다.. 몸은 무력했고, 무력한 몸은 무거웠다.’(『칼의 노래』) 그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수필집에서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밥벌이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밥은 결국 몸을 위한 것이다. ‘몸의 사람’이기보다는 ‘정신의 사람’이기를 원하는 여느 관념적 소설가와 김훈이 구별되는 대목이다.
 
   는 사건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기자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서 그의 묘사와 서술은 결코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세세한 사실들로 소설은 채워진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는 진료를 받았다’라고 간단하게 썼을 대목을 그는 혈액검사, 소변검사, 허파 MRI 촬영, 위 내시경 검사, 양전자방출단층촬영 등 전문용어를 동원한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강산무진』 어디를 펴보아도 디테일에 충실한 그의 기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이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소설가의 발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의 관념적 소설가와는 구별된다.
 
  렇다고 그를 세속적인 작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무엇보다 미에 탐닉한다. 그의 문장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미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꽉 짜여져 있다는 이야기다. 흡사 잘 벼린 칼과도 같다. 소설이라는 서사갈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사건의 전개에 있는 것이지 문장의 갈고 다듬에 있는 것이 아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의 문장을 탐탁치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문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단의 주류적 문체 공식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문체의 미학을 만들어간다는 점도 김훈을 여타의 소설가와 구별짓게 만든다..

   로 벼린 듯한 시적인 문장, 하면 마루야마 겐지를 빼놓을 수 없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에 있어서, 도도하게 굽이치는 장강대하의 유장함과 대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스타카토식의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김훈의 문체와 그 우열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은 비정하리만치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오토바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봐라 달이 뒤쫓는다』의 한 페이지를 보라.  ‘똑같은 마을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고뇌에 찬, 굴욕의 나날이라면, 이제는 지겹다. 부근을 한 바퀴 달려보고 다시 같은 둥지로 의기소침해져 되돌아가는 삶 따위, 이제는 사양하겠다.’ 그의 소설은 산문시에 육박한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는 작가의 고통이 느껴질 정도다. 『납장미』에서 사랑에 빠진 한 소녀를 묘사하는 한 킬러의 넋두리를 읽어보라. ‘떠돌이개는 쓰레기를 헤집던 입질을 멈추고 갈매기들은 하늘에서 날개를 접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 순간에는 인간과 동물의 벽이 무너지고 온갖 차별이 소멸되어 방파제 주위에 자리를 함께한 생물 모두가 그녀로 인해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녀가 지나간 다음까지도 오래도록 환희를 느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동물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공간,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가 빛을 발하는 공간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신화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김훈의 문장과 대조된다.
 
  체뿐만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태도면에서도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아직도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쓴다. 여타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지 않고 몸으로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더구나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하는 김훈과 이미 30년 전부터 배를 타고 대양을 체험했다는 마루야마 겐지에게서는 관념보다는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봐라 달이 뒤쫓는다』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오토바이를 빌어 말하다. ‘나는 기화한 가솔린을 연속적으로 폭발시켜, 배기 가스와 폭음을 세상에 내던진다. 나는 앞뒤의 두 바퀴를 마음대로 회전시켜, 세상에 넘쳐 있는 시시한 불문율을 걷어찬다.“ 나긋나긋한 감성적 문체가 아니다. 가장 날카로운 칼이 가장 아름다운 칼이라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남성적 힘을 지양한다. 『칼의 노래』에서 보여준 김훈의 문체와 흡사하다. ’죽여야 할 것은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라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말한다. 이런 남성적 미학은 "나는 여자를 풍경으로 본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것이나 여성을 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김훈의 남성우월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쨌든 2000년대의 신세대작가들이 도시적 감수성으로 나긋나긋한 소설 쓰기를 하고 있다면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남성적 파워를 과시하는 강건한 문체로 독특한 동아시아의 소설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창동 감독 뉴패키지 박스세트 : 디지팩 (4disc) - 초록물고기 + 박하사탕 + 오아시스
이창동 감독, 심혜진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영화 <초록물고기>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한적한 강가로 모처럼 소풍길에 나선 가족들. 화기애애 서너 배의 술잔이 오가는가 했더니 어렵게 살고 있는 현실의 넋두리가 개입되면서 순식간에 가족의 화목한 야유회 자리는 난장판으로 변한다. 서로 부둥켜안고 싸우는 형들과 뜯어말리는 식구들, 그 광경에 울어버리는 둘째 형과 그를 다독거리는 어머니. 욕설과 구토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을 보다 못한 막내 동생 순옥은 “정말 너무들 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오늘 같은 날”이라고 말하며 울부짖는다.

소풍이란 게 뭔가.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지긋지긋한 생활고로부터, 과중한 업무로부터, 자질구레한 가사노동으로부터 훌쩍 벗어나는 행위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간단히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현실이 녹록치가 않다. 막동이네 가족이 바로 그런 경우다. 파출부 엄마, 세 형제 중 첫째는 장애인, 둘째는 술주정뱅이, 셋째인 막동이는 조직폭력배다. 외동딸은 다방종업원. 소위 ‘잘 나가는’ 집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그악스럽다 해서 그들이 불행의 굴레에 옥죄어 있으라는 법은 없다. 하루쯤은 유쾌하게 신선한 공기를 쐴 수도 있는 법이다. 세상의 근심을 잊고 신선한 바깥 공기와 풍경 속에서 모처럼 활짝 웃는 표정을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그 사진 속에 담긴 하루가 바로 우리네 추억의 소중한 일부가 아니던가. 훗날 삶이 곤핍해졌을 때 그 추억의 시간을 음미하며 우리는 재생의 힘을 얻기도 한다.

초목이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5월은 추억의 시간을 만들어내기에 적격인 시간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기념해야 할 날들도 많다. 그러나 ‘풍년거지가 더 서럽다’라는 속담처럼 ‘막동이네’ 가족과 같은 집에서는 오히려 5월이 더 쓸쓸하다. 누가 가정이 제2의 천국이라고 했는지 <SOS 긴급출동>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정처럼 무서운 지옥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모를 학대하는 가장, 아이에게 모진 매를 가하는 부모... 이 프로그램 속의 가정은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 『가족스케치』, 『풀하우스』에서처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악몽을 생산해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행복의 풀 한 포기도 자랄 성싶지 않다.

영화 <패밀리맨>에서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투자전문가 잭 캠벨(니콜라스 케이지)은 펜트 하우스에 살며, 페라리 550M을 타고, 최고급 양복을 입는 등 소위 ‘잘나가는’ 남자다. 그는 복권을 바꾸러 왔다가 강도 취급을 받는 캐쉬(돈 치들)를 도와준다. 캐쉬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잭은 “원하는 게 없다”고 답한다. 다음날 아침 잭은 13년 전에 헤어진 연인 케이트의 남편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아이 둘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타이어 외판원이라는 초라한 직업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할리우드처럼 도덕적인 곳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행복은 출세나 야망의 실현에 있지 않다는 다소 진부하고 교과서적인 주제를 말한다. 잭은 보잘것없는 직장과 가정의 구속을 못 견뎌 하지만 곧 가정에서의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잭과 같은 가장들만 있는 곳이 현실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가부장주의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다 보면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한국의 아버지들만큼 권위적이고 전제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떠올려 보면 그런 지역은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또한 별로 위안을 줄 만한 곳이 못 되지요.” 신랄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책이 전하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덩치만큼이나 고압적인 아버지였던 것 같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 카프카에게 그의 아버지는 몇 차례 호된 위협을 퍼붓다가 급기야 아들을 복도로 끌고나가 속옷 바람으로 서있게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카프카의 절망이었다.

카프카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자신이 노예상태로 사는 세계,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사는 세계,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가 그것이다. 노예상태로 살아가는 카프카는 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등한 자격을 얻게 되는 일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번의 약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하지 못한다. 탈출의 꿈은 늘 절망으로 끝난다. 그 절망의 끝에서 그는 그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책은 말한다. “저는 글을 쓰고 또한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면서 소박하나마 독립과 탈출을 위한 시도를 했고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지만 약간의 성공도 거두었지요. 하지만 그 시도가 더 큰 성공을 거둘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점에서 저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떤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험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감옥이었다면 그의 글쓰기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셈이다.

억압의 기억을 예술로도 승화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억압의 기억은 파국을 야기한다.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에서는 한 소년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다. ‘카즈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나이는 열네 살. 그에게 가족은 불안의 근원지다. 파칭코 가게를 경영하면서 탈세를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아버지. 엄마는 그녀의 첫아들 히데키가 ‘윌리엄스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자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종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하는 정신의 삶을 선택한다.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육체적ㆍ정신적으로는 소년에 불과한 형, 원조교제에 빠져 있는 누나 미호,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네집보다 한 수 위의 콩가루 집안이다. 아버지 히데모토는 떳떳하게 말한다. “경찰 신세만 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패션모델 뺨치는 미인도 언제든 붙여줄 수 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찌른다. 왜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치냐는 소년의 항변에 그녀의 어머니 미키는 차갑게 대꾸한다.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소년의 불행은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었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있었다. 소년이 주머니 안에서 꺼내든 사진 한 장이 바로 그 순간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그것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의 기호이다. 소년의 추억은 오직 누렇게 변색된 사진 속에만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러나 어른다운 어른,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는 한 가정은 없다. 한 인간의 목표는 거창하게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成人)이 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없는 가정, 어른이 없는 사회 속에서 미성년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섯번째 계절 - 할인행사
스콧 맥게히 외 감독, 리차드 기어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8년 1월
평점 :
품절





형제는 타인에 비해 부모로부터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보고 듣는 것, 심지어는 먹는 음식과 숨 쉬는 공기와 기억마저도 같이 공유하니, 이렇게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난 형제들은 성격마저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먹혀 들지 않는다. 외모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형제들의 성격은 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겨날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의 저자 양혜경은 형제들이 동일한 생활공간 안에서 같은 사건을 받아들이더라도 각각의 발달단계와 인지적ㆍ사회적 특성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경험하고 다른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부모가 이혼을 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아이는 부모의 이혼이 자신의 잘못인 양 생각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 반면 사춘기에 놓인 아이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학교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때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침울한 반응은 이혼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큰아이의 돌출행동에는 더 주목하고 반응하기 쉽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이사를 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누나는 일곱 살, 남동생은 세 살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세 살인 남동생에게 있어서는 가족이 전부다. 그런 경우 가족과 분리되지 않는 이사는 그에게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누나의 경우는 다르다. 누나의 경우 그 시기가 소녀끼리 뭉치며 타인에게는 배타적인 시기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나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일어났다. 게다가 배타적인 소녀들의 태도에 적절하지 않은 반응을 해서 좋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고, 그 탓에 행복하지 않는 몇 년을 보내게 된다. 이런 경우 이사의 경험은 누나에게는 성격을 변화시키는 큰 사건이 되지만 남동생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반복되면 될수록 유전적 영향은 감소하고 환경의 영향은 커진다는 것이 양혜경의 설명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제는 실은 완벽하게 다른 내면의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형제는 갈등의 관계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보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갓난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이 쏠려있는 경우 유아와 같은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결국 갓난아기에게 쏠린 부모의 관심을 자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전통심리학의 설명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승인 내지 애정을 받으려고 경쟁한다. 이 경쟁에서 패배와 승리의 결과가 불규칙적이라면 문제가 없다. 형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거나 동생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느 한쪽에 일방적이라면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 늘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쪽은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다 라는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켜서라도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  

영화 <다섯 번째 계절>에 등장하는 나우먼 가족은 존경 받는 중상류층이며 누구보다도 종교적이며 끈끈한 가족관계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다. 종교학 교수로서 카발라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울(리처드 기어)은 평소 문자 속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믿던 중 딸에게서 비범한 재능을 발견한다. 딸은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사울은 영리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들 애론을 편애했지만 어린 딸 엘리자가 철자법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듭하자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엘리자는 단어의 의미와 어원만 듣고 모르는 철자를 떠올리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사울은 그 재능이 단어의 핵심에 다가가 신과 직접 대화하는 카발라 수행방법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흥분한다. 그러나 그 사이 그의 아내 미리엄(줄리엣 비노쉬)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아버지에게 소외된 애론은 힌두교에 빠져들면서 가족은 서서히 붕괴된다.

영화에서 엘리자는 다소 자폐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사변적이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에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 이른 나이다. 그러나 애론은 다르다.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인에 가깝다. 아버지의 호통을 맞받아 칠 수 있을 정도로 힘도 있고 배짱도 있는 나이다. “제발 내버려 두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을 완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앳된 얼굴을 보라. 키와 몸무게는 아버지와 버금갈지 몰라도 아직은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어린아이다.

과거에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딸에게 온통 관심을 쏟는다. 아버지의 관심을 돌리는 애론의 방법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믿는 유일신 신앙을 부인하고 다신교인 힌두교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의 아버지’를 믿지 않고 ‘여럿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한 명의 아버지로부터 따돌림을 받더라도 또 다른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안전한 길인가. 애론은 그 안전한 길을 택한다. 더구나 그 길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배신하는 길이며 자신의 독자성을 선포하는 길이다.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독립,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내들이 꿈꾸는 길이 아니던가. 유일신 신앙 체계 속에서 살아온 아버지는 ‘또 다른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교도인 사울은 성령의 빛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이 깨어졌으며 그 깨어진 조각을 다시 붙이는 것이 신을 섬기는 인간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의 아내 미리엄은 빈집을 돌아다니며 반짝이는 작은 물건을 훔치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던 애론은 힌두교 집회의 열기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울은 오직 딸의 영적인 재능에만 집착한다. 타자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가장 위험한 테러리즘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숱한 테러리즘의 역사를 통해 목격하지 않았던가. 영혼을 치유한다는 종교가 오히려 영혼을 분열시키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영리한 소녀 엘리자는 제 가족의 분열이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가족의 태도에 있음을 간파한다. 엘리자는 과감하게 형이상학을 포기한다. 나비가 알려주는 알파벳을 말하기만 하면 철자법 대회에서 우승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는 과감하게 승리를 포기한다. 영화는 결코 초월의 우월적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적 형이상학보다 위대한 것은 현실의 행복이라는 것, 신의 은총보다 거룩한 것은 살과 살의 포옹이라는 것, 그 포옹의 따스함 속에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영화는 긴 우회를 통해서 현실을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러브드
만다 구니토시 감독, 모리구치 요우코 외 출연 / 대경DVD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키를 늘리기 위해 뼈를 늘리는 수술이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수술의 고통을 참으면 숏다리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시술을 하는 병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고통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작은 키로 살겠다는 사람이 점점 는다면 어떨까. 나는 내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로서 살겠다, 라는 사람들이 는다면 성형외과는 물론이지만 패션산업 관계자들도 울상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타인의 삶을 따라가겠다는 대중들의 가열찬 의지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몸짱ㆍ얼짱 사업’은 바야흐로 극점을 향해 달라고 있음을.

마케터들은 끊임없이 소비자들을 향해 부르짖는다. 당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마라. 한층 업그레이드 된 당신을 위해 이 옷을 입어라, 이 신을 신어라, 이 화장품을 발라라, 그런데 이런 마케터들의 권고에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영화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카게야마 미츠코(모리구치 요코)가 그녀다. 이 참하게 생긴 여자는 성장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큰집, 더 나은 드레스와 신발, 명품 가방, 근사한 칵테일파티, 해외여행,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다. 굶기를 하나, 직장이 없나(그녀는 시청공무원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 산다. 정년도 보장되어 있다.), 이 정도면 되었어. 안분지족하는 은둔자의 삶이 따로 없다. 서른이 넘어서도 독신생활을 계속하는 그녀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한 지 오래다.

영화는 왜 이 여자가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제국주의적인 성장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일까, 아니면 반인간적이고 반생태적인 거대기술과 생산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고『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대안철학을 가지고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생태주의적 동기에서일까. 그녀가 ‘작은 삶’을 선택한 동기에 대한 언급은 영화 어디에도 없다.

만다 구니토시 감독은 "강하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 이런 태도는 경쟁만이 궁극의 인간 활동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옳다. 풀잎은 눈치 보지 않고 풀잎으로 살고, 대나무는 눈치 보지 않고 대나무로 산다. 강하게 산다는 것이 목에 힘주고 사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일 뿐이라는 배짱으로 사는 삶이 곧 강한 삶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의 모든 존재들은 주어진 분수대로의 삶을 산다. 성형을 하는 강아지들도 없고, 다이어트를 하는 하마들도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바로 그것이 강한 삶이라는 거다.  나는 당신들처럼 한 치의 키라도 더 늘이기 위해,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안달하지 않겠다. 오히려 세상과 거꾸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 이 여자, 겉모습만 보고 호락호락하게 봐선 큰 코 다친다. 미츠코의 각오는 이렇게 단호하다. 이 단호한 결의 앞에 몸이 단 남자가 있다. 유능한 벤처 사업가인 가츠노(나카무라 토오루)다.

배우 나카무라 토오루가 누군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장동건과 함께 강인하고 럭셔리한 외모를 보여주었던 그가 아닌가. 나카무라 토오루가 분한 가츠노의 얼굴 어디에도 허술한 소박함은 없다. 한마디로 꽉 짜여진 용모다. 쏘아보는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은 성공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츠코에게 다가간다. 나에게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능력이 있어. 자, 나의 구매력을 봐. 기껏 몇 푼에 급급해 않는다구.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봐. 나는 너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능력이 있다구. 성장주의와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똘똘 무장한 이 자본주의의 전사(戰士) 앞에서 그러나 미츠코의 몸과 마음은 냉담하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분명 반자본주의적이다. 이런 그녀에게 가츠노는 절규한다.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너의 몸이 나를 향해 열릴 수 있는 거지. 더구나 너는 내게 이미 몸을 허락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구. 그런 네가 왜 나를 거부하는 거지?

여자는 답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거라지만 나는 내 방식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삶으로 투항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삶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의 삶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내 삶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미츠코의 이런 발언에 ‘얼씨구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책이 있다. 웨인 W. 다이어가 지은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그것. 심리학자인 그녀는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이 사람들을 성취로 몰아붙이고 완벽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는 가장 파괴적인 말이라고 지적한다. 다이어는 삶의 신조를 ‘최선을 다하자’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열심히 해보자. 하고 싶은 것은 그냥 하자’로 바꿔 보라고 권한다. 미츠코가 그런 여자다. 정사가 끝나고, 자고 가라는 가츠노의 요구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간단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요” 가츠노가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미츠코는 ‘작은 삶’을 위해 성실을 다하는 삶을 산다.

미츠코와는 달리 ‘작은 삶’이 부끄러운 남자가 있다. 시모카와(마츠오카 ??스케)가 바로 그다. 그는『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번듯한 대학졸업장 하나 없이 달랑 공고 졸업장 하나로 살려고 하니, 삶이 버겁다, 구매력도 없다, 실력도 없다, 외모도 그럭저럭이다, 뭐하나 변변한 게 없다. 아, 20대 80의 사회여, IMF시대 한국사회 속 대중의 자화상과 시모카와의 삶의 모습은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변두리 인생 청산하고 이 바닥에서 한 번 확 뜨고 싶은 그에게는 <초록물고기>에서의 막동이만큼의 깡다구도 없고, 주먹도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가 봐도 분에 겨운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미모의 미츠코가 그를 선택한 것이다. 필자는 이 선택이 만다 구니토시 감독의 대중에 대한 구애라고 생각한다. 잘난 20프로를 쫓아가기 위해 가랑이 찢어지지 말고, 우리 같이 우리의 삶을 살자구. 고급 레스토랑에서 랍스터를 먹고 해외여행 경비 팍팍 써대지 못해도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배곯지 않는 삶이 우리에게 있잖아. 그러나 이 여유는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여유다. 적어도 그녀는 시청 공무원이 아닌가. 덜컥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가진 것 없이 노후를 맞게 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서는 시모카와에게는 여유가 없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장(戰場)이다.

나는 너의 여유를 사랑할 수 없어. 나도 성공하고 싶어, 대박나고 싶어, 타워팰리스에 살고 싶어. 그의 욕망은 정확히 대중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솔직히 이런 대박의 환상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시모카와의 욕망은 성공의 신화를 거부하는 미츠코를 배척한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 차버리는 것이다. 너도 너의 삶을 살고 싶다면, 나도 나의 삶을 살 거라는 당당한 자기 선언인 셈이다. 그러나 모리구치 요코의 미모를 눈여겨보라. 소박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니트가 잘 어울리는 용모에 따스한 마음씨,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코카와는 다시 그녀를 선택한다. 과연 시모카와는 그녀의 미모를 선택한 것일까, 그녀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후자를 선택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경쟁으로 가랑이가 찢어지느니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을 둘러보니 나를 지지해줄 응원자가 많지 않다. 텅 빈 극장 안에서 당돌하게 이 소박한 영화가 대박나기를 꿈꾸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와 빈곤 - 땅은 누구의 것인 e시대의 절대사상 24
헨리 조지 지음, 김윤상 외 옮김 / 살림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토지사유제의 문제점을 평생 동안 고민했던 헨리조지의 토지


  지난 반세기 동안 서울의 땅값은 무려 4만 배나 폭등했다고 한다. 또 대한민국의 토지가격의 총액은 프랑스를 여덟 번 사고도 남는다고 한다. 게다가 대한민국 땅부자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유 토지의 57%를 갖고 있다고 한다. 토지소유 편중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고, 부동산 투기로 집값의 상승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요즘 주목해야 할 학자가 있다.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의 저자,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가 바로 그다.


  그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영세한 인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의 못 받은 채 14세에 선원생활을 시작하여 인쇄공, 광부, 관청직원, 기자 등 다양한 일자리를 전전하였지만 열렬한 독서가로 수많은 저서를 저술했다. 그의 저서 가운데 기념비적인 저작물이 바로 1879년에 펴낸 『진보와 빈곤』이다. 당시 성경을 제외하고는 논픽션 중 가장 많이 보급된 책이었고, 그의 장례식에는 10만이 넘는 인파가 조문을 했다니 당시의 그의 명성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익 앞에서는 귀족과 천민이 따로 없었다. 미국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미시시피 회사를 설립해 서부 지역의 땅을 사들였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일리노이주 수백만 평의 땅에 투기를 벌였다. 3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자인 토머스 제퍼슨까지 땅장사를 했다. 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부자 부모를 만나 좋은 땅을 가졌다는 이유로 엄청난 부자가 되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헨리 조지가 『진보와 빈곤』을 쓰게 된 직접적 이유였다.


  이 책이 집필이 시작된 1877년의 미국은 불황의 시기였다. 동부에서는 대규모의 파업이 일어났다. 6개주에서는 무장한 군대가 경계태세를 갖추었고, 볼티모어와 시카고에서는 폭동이 일어났고, 캘리포니아에서는 200명 이상의 사상까지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의 가뭄은 불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빈곤이 공존하는 것에 충격을 느꼈다. 왜 사회는 진보함에도 불구하고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지, 그 문제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하는 일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이가 바로 조지 헨리다.


  그는 경제 불황이 닥치는 이유는 토지사유제로 인해 지대가 지주에게 불로소득으로 귀속되는 토지소유제도에 있다고 보았다. 노동을 통해서 창출된 가치가 아니라 사회에 의해 창출된 가치가 토지소유자에게 독점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존의 세제를 모두 없애고 토지사용의 대가인 지대를 모두 세금으로 징수하는 토지단일세(land only tax)를 도입할 것”을 그는 제안했다. 다시 말해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주들의 불로소득을 몽땅 세금으로 환수하자는 것이었다. 대신 그는 농부가 황무지를 옥토로 개간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반문하며, 노동에 의해 생산된 가치에 세금을 부과하는 기존의 조세체제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이러한 토지 단일세에 의해 토지의 투기가 사라지면 지대가 하락하고, 그 하락분만큼 임금이 상승하고, 나아가 환수된 지대가 사회전반에 재분배되면 그만큼 빈곤도 축소된다고 보았다. 또한 사회가 발전함에 다라 지대수입이 증가하므로 국가의 재정이 호전되고, 생산활동에 부과되던 다른 조세가 감면되므로 경제적 효율성이 획기적으로 증대된다고 보았다.


  조지 헨리의 토지이론은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영국과 아일랜드의 토지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중국의 쑨원(孫文)에게도 영향을 끼쳐, 쑨원은 헨리 조지의 토지사상을 삼민주의의 하나인 민생주의의 중요 내용으로 삼았다. 러시아의 톨스토이도 그의 토지사상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 초에 등장한 토지공개념, 즉 세제 강화를 통한 투기 이익의 국민 공유를 주장하는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방향도 크게 보면 헨리 조지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헨리 조지가 주장하는 내용이 대한민국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경제 전문가들의 의견교환이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