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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를 늘리기 위해 뼈를 늘리는 수술이 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수술의 고통을 참으면 숏다리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런 시술을 하는 병원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고통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작은 키로 살겠다는 사람이 점점 는다면 어떨까. 나는 내 얼굴이 부끄럽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의 얼굴로서 살겠다, 라는 사람들이 는다면 성형외과는 물론이지만 패션산업 관계자들도 울상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시라. 타인의 삶을 따라가겠다는 대중들의 가열찬 의지로 인해서 대한민국의 ‘몸짱ㆍ얼짱 사업’은 바야흐로 극점을 향해 달라고 있음을.
마케터들은 끊임없이 소비자들을 향해 부르짖는다. 당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마라. 한층 업그레이드 된 당신을 위해 이 옷을 입어라, 이 신을 신어라, 이 화장품을 발라라, 그런데 이런 마케터들의 권고에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가 있다. 영화 <언러브드>의 여주인공 카게야마 미츠코(모리구치 요코)가 그녀다. 이 참하게 생긴 여자는 성장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 큰집, 더 나은 드레스와 신발, 명품 가방, 근사한 칵테일파티, 해외여행, 그런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눈치다. 굶기를 하나, 직장이 없나(그녀는 시청공무원이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먹고 산다. 정년도 보장되어 있다.), 이 정도면 되었어. 안분지족하는 은둔자의 삶이 따로 없다. 서른이 넘어서도 독신생활을 계속하는 그녀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욕망을 포기한 지 오래다.
영화는 왜 이 여자가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성장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제국주의적인 성장주의자들에 대한 반감에서일까, 아니면 반인간적이고 반생태적인 거대기술과 생산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고『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대안철학을 가지고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생태주의적 동기에서일까. 그녀가 ‘작은 삶’을 선택한 동기에 대한 언급은 영화 어디에도 없다.
만다 구니토시 감독은 "강하게 산다는 것은 남들이 인정하든 말든 자기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 이런 태도는 경쟁만이 궁극의 인간 활동이라고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말한다. 옳다. 풀잎은 눈치 보지 않고 풀잎으로 살고, 대나무는 눈치 보지 않고 대나무로 산다. 강하게 산다는 것이 목에 힘주고 사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누가 뭐라 해도 나는 나일 뿐이라는 배짱으로 사는 삶이 곧 강한 삶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을 제외한 자연계의 모든 존재들은 주어진 분수대로의 삶을 산다. 성형을 하는 강아지들도 없고, 다이어트를 하는 하마들도 없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산다. 바로 그것이 강한 삶이라는 거다. 나는 당신들처럼 한 치의 키라도 더 늘이기 위해, 한 푼의 돈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안달하지 않겠다. 오히려 세상과 거꾸로 된 삶을 살아보겠다. 이 여자, 겉모습만 보고 호락호락하게 봐선 큰 코 다친다. 미츠코의 각오는 이렇게 단호하다. 이 단호한 결의 앞에 몸이 단 남자가 있다. 유능한 벤처 사업가인 가츠노(나카무라 토오루)다.
배우 나카무라 토오루가 누군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 장동건과 함께 강인하고 럭셔리한 외모를 보여주었던 그가 아닌가. 나카무라 토오루가 분한 가츠노의 얼굴 어디에도 허술한 소박함은 없다. 한마디로 꽉 짜여진 용모다. 쏘아보는 듯한 그의 강렬한 눈빛은 성공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미츠코에게 다가간다. 나에게는 모든 여자들이 부러워하는 능력이 있어. 자, 나의 구매력을 봐. 기껏 몇 푼에 급급해 않는다구.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봐. 나는 너의 욕망을 만족시켜줄 능력이 있다구. 성장주의와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로 똘똘 무장한 이 자본주의의 전사(戰士) 앞에서 그러나 미츠코의 몸과 마음은 냉담하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분명 반자본주의적이다. 이런 그녀에게 가츠노는 절규한다. 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너의 몸이 나를 향해 열릴 수 있는 거지. 더구나 너는 내게 이미 몸을 허락하지 않았어?. 나를 사랑하지 않았느냐구. 그런 네가 왜 나를 거부하는 거지?
여자는 답한다. 사랑은 하나가 되는 거라지만 나는 내 방식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삶으로 투항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삶으로도 충분해요. 당신의 삶을 비난하지 않겠어요. 내 삶을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살아요. 미츠코의 이런 발언에 ‘얼씨구나’ 추임새를 넣어주는 책이 있다. 웨인 W. 다이어가 지은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그것. 심리학자인 그녀는 ‘최선을 다하라’ 라는 말이 사람들을 성취로 몰아붙이고 완벽주의적 가치를 강요하는 가장 파괴적인 말이라고 지적한다. 다이어는 삶의 신조를 ‘최선을 다하자’ 대신 ‘나에게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열심히 해보자. 하고 싶은 것은 그냥 하자’로 바꿔 보라고 권한다. 미츠코가 그런 여자다. 정사가 끝나고, 자고 가라는 가츠노의 요구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간단하다.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해요” 가츠노가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산다면, 미츠코는 ‘작은 삶’을 위해 성실을 다하는 삶을 산다.
미츠코와는 달리 ‘작은 삶’이 부끄러운 남자가 있다. 시모카와(마츠오카 ??스케)가 바로 그다. 그는『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번듯한 대학졸업장 하나 없이 달랑 공고 졸업장 하나로 살려고 하니, 삶이 버겁다, 구매력도 없다, 실력도 없다, 외모도 그럭저럭이다, 뭐하나 변변한 게 없다. 아, 20대 80의 사회여, IMF시대 한국사회 속 대중의 자화상과 시모카와의 삶의 모습은 묘하게 겹친다. 그러나 변두리 인생 청산하고 이 바닥에서 한 번 확 뜨고 싶은 그에게는 <초록물고기>에서의 막동이만큼의 깡다구도 없고, 주먹도 없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누가 봐도 분에 겨운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미모의 미츠코가 그를 선택한 것이다. 필자는 이 선택이 만다 구니토시 감독의 대중에 대한 구애라고 생각한다. 잘난 20프로를 쫓아가기 위해 가랑이 찢어지지 말고, 우리 같이 우리의 삶을 살자구. 고급 레스토랑에서 랍스터를 먹고 해외여행 경비 팍팍 써대지 못해도 우리의 삶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 배곯지 않는 삶이 우리에게 있잖아. 그러나 이 여유는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의 여유다. 적어도 그녀는 시청 공무원이 아닌가. 덜컥 병이라도 나면 어쩌지, 가진 것 없이 노후를 맞게 되면 어쩌지, 걱정이 앞서는 시모카와에게는 여유가 없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그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장(戰場)이다.
나는 너의 여유를 사랑할 수 없어. 나도 성공하고 싶어, 대박나고 싶어, 타워팰리스에 살고 싶어. 그의 욕망은 정확히 대중들의 욕망을 반영한다. (솔직히 이런 대박의 환상에 젖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시모카와의 욕망은 성공의 신화를 거부하는 미츠코를 배척한다.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 차버리는 것이다. 너도 너의 삶을 살고 싶다면, 나도 나의 삶을 살 거라는 당당한 자기 선언인 셈이다. 그러나 모리구치 요코의 미모를 눈여겨보라. 소박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니트가 잘 어울리는 용모에 따스한 마음씨,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 시코카와는 다시 그녀를 선택한다. 과연 시모카와는 그녀의 미모를 선택한 것일까, 그녀의 삶을 선택한 것일까. 알 수 없다. 다만 후자를 선택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경쟁으로 가랑이가 찢어지느니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러나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을 둘러보니 나를 지지해줄 응원자가 많지 않다. 텅 빈 극장 안에서 당돌하게 이 소박한 영화가 대박나기를 꿈꾸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