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록물고기>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어머니의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한적한 강가로 모처럼 소풍길에 나선 가족들. 화기애애 서너 배의 술잔이 오가는가 했더니 어렵게 살고 있는 현실의 넋두리가 개입되면서 순식간에 가족의 화목한 야유회 자리는 난장판으로 변한다. 서로 부둥켜안고 싸우는 형들과 뜯어말리는 식구들, 그 광경에 울어버리는 둘째 형과 그를 다독거리는 어머니. 욕설과 구토가 난무하는 아수라장을 보다 못한 막내 동생 순옥은 “정말 너무들 해.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오늘 같은 날”이라고 말하며 울부짖는다.
소풍이란 게 뭔가. 일상에서의 탈출이다. 지긋지긋한 생활고로부터, 과중한 업무로부터, 자질구레한 가사노동으로부터 훌쩍 벗어나는 행위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정도 형편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간단히 벗어던질 수 있을 만큼 현실이 녹록치가 않다. 막동이네 가족이 바로 그런 경우다. 파출부 엄마, 세 형제 중 첫째는 장애인, 둘째는 술주정뱅이, 셋째인 막동이는 조직폭력배다. 외동딸은 다방종업원. 소위 ‘잘 나가는’ 집안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삶의 조건이 그악스럽다 해서 그들이 불행의 굴레에 옥죄어 있으라는 법은 없다. 하루쯤은 유쾌하게 신선한 공기를 쐴 수도 있는 법이다. 세상의 근심을 잊고 신선한 바깥 공기와 풍경 속에서 모처럼 활짝 웃는 표정을 사진에 담을 수도 있다. 그 사진 속에 담긴 하루가 바로 우리네 추억의 소중한 일부가 아니던가. 훗날 삶이 곤핍해졌을 때 그 추억의 시간을 음미하며 우리는 재생의 힘을 얻기도 한다.
초목이 싱그러움을 더해가는 5월은 추억의 시간을 만들어내기에 적격인 시간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성년의 날, 기념해야 할 날들도 많다. 그러나 ‘풍년거지가 더 서럽다’라는 속담처럼 ‘막동이네’ 가족과 같은 집에서는 오히려 5월이 더 쓸쓸하다. 누가 가정이 제2의 천국이라고 했는지 <SOS 긴급출동>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가정처럼 무서운 지옥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부모를 학대하는 가장, 아이에게 모진 매를 가하는 부모... 이 프로그램 속의 가정은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 『가족스케치』, 『풀하우스』에서처럼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라 악몽을 생산해내는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어떤 행복의 풀 한 포기도 자랄 성싶지 않다.
영화 <패밀리맨>에서 월스트리트의 성공한 투자전문가 잭 캠벨(니콜라스 케이지)은 펜트 하우스에 살며, 페라리 550M을 타고, 최고급 양복을 입는 등 소위 ‘잘나가는’ 남자다. 그는 복권을 바꾸러 왔다가 강도 취급을 받는 캐쉬(돈 치들)를 도와준다. 캐쉬가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자 잭은 “원하는 게 없다”고 답한다. 다음날 아침 잭은 13년 전에 헤어진 연인 케이트의 남편으로 잠에서 깨어나고, 아이 둘과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타이어 외판원이라는 초라한 직업인으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할리우드처럼 도덕적인 곳이 어디 있을까. 영화는 행복은 출세나 야망의 실현에 있지 않다는 다소 진부하고 교과서적인 주제를 말한다. 잭은 보잘것없는 직장과 가정의 구속을 못 견뎌 하지만 곧 가정에서의 일상의 소소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우쳐가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고 현실은 현실이다. 잭과 같은 가장들만 있는 곳이 현실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가부장주의는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읽다 보면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는 한국의 아버지들만큼 권위적이고 전제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대목을 보라. “때때로 저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고 그 위에 아버지가 사지를 쫙 뻗고 누워 계신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러면 마치 저한테는 아버지가 가리고 계시지 않거나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만이 저의 생활공간이 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져요. 그런 아버지의 우람한 체구를 떠올려 보면 그런 지역은 결코 많을 수 없으며 또한 별로 위안을 줄 만한 곳이 못 되지요.” 신랄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책이 전하는 카프카의 아버지는 덩치만큼이나 고압적인 아버지였던 것 같다.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 카프카에게 그의 아버지는 몇 차례 호된 위협을 퍼붓다가 급기야 아들을 복도로 끌고나가 속옷 바람으로 서있게 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꿈꾸었으나 아버지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 카프카의 절망이었다.
카프카의 세계는 세 부분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자신이 노예상태로 사는 세계,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분노하는 일에 종사하는 아버지가 사는 세계, 명령과 순종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가는 타인의 세계가 그것이다. 노예상태로 살아가는 카프카는 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와 대등한 자격을 얻게 되는 일이 결혼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 번의 약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에 성공하지 못한다. 탈출의 꿈은 늘 절망으로 끝난다. 그 절망의 끝에서 그는 그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책은 말한다. “저는 글을 쓰고 또한 그와 연관된 일을 하면서 소박하나마 독립과 탈출을 위한 시도를 했고 너무나 하찮은 수준이지만 약간의 성공도 거두었지요. 하지만 그 시도가 더 큰 성공을 거둘 가망은 거의 없습니다. 많은 점에서 저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일은 저의 의무입니다. 아니 그 일을 지키고, 제가 막아낼 수 있는 어떤 위험도, 나아가 그런 위험의 기미조차 그 일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제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카프카에게 아버지가 감옥이었다면 그의 글쓰기는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이었던 셈이다.
억압의 기억을 예술로도 승화시키지만 대부분의 경우 억압의 기억은 파국을 야기한다. 유미리의 소설 『골드러시』에서는 한 소년이 그의 아버지를 죽인다. ‘카즈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나이는 열네 살. 그에게 가족은 불안의 근원지다. 파칭코 가게를 경영하면서 탈세를 통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는 아버지. 엄마는 그녀의 첫아들 히데키가 ‘윌리엄스병’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리자 가정과 자식을 버리고 종교에 빠져든다. 그녀는 철저하게 물질을 배격하는 정신의 삶을 선택한다. 법적으로는 어른이지만 육체적ㆍ정신적으로는 소년에 불과한 형, 원조교제에 빠져 있는 누나 미호,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네집보다 한 수 위의 콩가루 집안이다. 아버지 히데모토는 떳떳하게 말한다. “경찰 신세만 지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해도 좋다. 네가 필요하다면 아빠는 패션모델 뺨치는 미인도 언제든 붙여줄 수 있다.” 소년은 그런 아버지를 찌른다. 왜 자식들을 버리고 자기만 도망치냐는 소년의 항변에 그녀의 어머니 미키는 차갑게 대꾸한다. “자기 힘으로 빠져 나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
소년의 불행은 본받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었고 간직해야 할 소중한 추억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도 기억하고 싶은 순간은 있었다. 소년이 주머니 안에서 꺼내든 사진 한 장이 바로 그 순간을 말하고 있다. 동물원에서 찍은 가족사진. 그것은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상실된 낙원의 기호이다. 소년의 추억은 오직 누렇게 변색된 사진 속에만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러나 어른다운 어른, 아버지다운 아버지가 없는 한 가정은 없다. 한 인간의 목표는 거창하게 성인(聖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인(成人)이 되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어른이 없는 가정, 어른이 없는 사회 속에서 미성년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