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는 타인에 비해 부모로부터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보고 듣는 것, 심지어는 먹는 음식과 숨 쉬는 공기와 기억마저도 같이 공유하니, 이렇게 비슷한 성장환경에서 자라난 형제들은 성격마저도 비슷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은 현실에서는 좀처럼 먹혀 들지 않는다. 외모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형제들의 성격은 딴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겨날까.
『형제라는 이름의 타인』의 저자 양혜경은 형제들이 동일한 생활공간 안에서 같은 사건을 받아들이더라도 각각의 발달단계와 인지적ㆍ사회적 특성 때문에 같은 사건을 다르게 경험하고 다른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부모가 이혼을 했다고 하자. 이 때 어린아이는 부모의 이혼이 자신의 잘못인 양 생각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해하고 우울해 하기도 한다. 반면 사춘기에 놓인 아이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학교에서 거칠고 파괴적인 행동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때 성인들은 어린아이의 침울한 반응은 이혼에 따른 자연스런 현상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큰아이의 돌출행동에는 더 주목하고 반응하기 쉽다는 것이다.
한 가족이 이사를 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자. 누나는 일곱 살, 남동생은 세 살이었다고 가정해보자. 세 살인 남동생에게 있어서는 가족이 전부다. 그런 경우 가족과 분리되지 않는 이사는 그에게 그다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누나의 경우는 다르다. 누나의 경우 그 시기가 소녀끼리 뭉치며 타인에게는 배타적인 시기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누나는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는 데 문제가 일어났다. 게다가 배타적인 소녀들의 태도에 적절하지 않은 반응을 해서 좋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고, 그 탓에 행복하지 않는 몇 년을 보내게 된다. 이런 경우 이사의 경험은 누나에게는 성격을 변화시키는 큰 사건이 되지만 남동생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이 여러 번 반복되면 될수록 유전적 영향은 감소하고 환경의 영향은 커진다는 것이 양혜경의 설명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제는 실은 완벽하게 다른 내면의 삶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형제는 갈등의 관계다. 대체로 아이들은 부모의 보상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갓난 동생에게 부모의 관심이 쏠려있는 경우 유아와 같은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 것은 결국 갓난아기에게 쏠린 부모의 관심을 자신으로 되돌리기 위한 전략적 행동이라는 것이 이미 잘 알려진 전통심리학의 설명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승인 내지 애정을 받으려고 경쟁한다. 이 경쟁에서 패배와 승리의 결과가 불규칙적이라면 문제가 없다. 형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거나 동생이 일방적으로 승리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승리가 어느 한쪽에 일방적이라면 문제가 된다. 이런 경우 늘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쪽은 최고가 아니면 최악이다 라는 식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켜서라도 부모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
영화 <다섯 번째 계절>에 등장하는 나우먼 가족은 존경 받는 중상류층이며 누구보다도 종교적이며 끈끈한 가족관계로 이어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 이보다 더 이상적일 수 없다. 종교학 교수로서 카발라 신비주의에 심취한 사울(리처드 기어)은 평소 문자 속에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다고 믿던 중 딸에게서 비범한 재능을 발견한다. 딸은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한다. 사울은 영리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는 아들 애론을 편애했지만 어린 딸 엘리자가 철자법 대회에서 최연소 우승을 거듭하자 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엘리자는 단어의 의미와 어원만 듣고 모르는 철자를 떠올리는 신비한 능력을 가졌다. 사울은 그 재능이 단어의 핵심에 다가가 신과 직접 대화하는 카발라 수행방법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흥분한다. 그러나 그 사이 그의 아내 미리엄(줄리엣 비노쉬)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떠올리며 불안해하고, 아버지에게 소외된 애론은 힌두교에 빠져들면서 가족은 서서히 붕괴된다.
영화에서 엘리자는 다소 자폐적인 성향을 보인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하고 사변적이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독립을 요구하기에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아직 이른 나이다. 그러나 애론은 다르다. 그는 이미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성인에 가깝다. 아버지의 호통을 맞받아 칠 수 있을 정도로 힘도 있고 배짱도 있는 나이다. “제발 내버려 두세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또래의 여느 아이들처럼 아버지로부터의 독립을 완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앳된 얼굴을 보라. 키와 몸무게는 아버지와 버금갈지 몰라도 아직은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어린아이다.
과거에 자신에게 사랑과 관심을 듬뿍 주던 아버지가 이제는 철자법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는 딸에게 온통 관심을 쏟는다. 아버지의 관심을 돌리는 애론의 방법은 간단하다. 아버지가 믿는 유일신 신앙을 부인하고 다신교인 힌두교의 세계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의 아버지’를 믿지 않고 ‘여럿의 아버지’를 믿는 것이다. 한 명의 아버지로부터 따돌림을 받더라도 또 다른 아버지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안전한 길인가. 애론은 그 안전한 길을 택한다. 더구나 그 길은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배신하는 길이며 자신의 독자성을 선포하는 길이다.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독립,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내들이 꿈꾸는 길이 아니던가. 유일신 신앙 체계 속에서 살아온 아버지는 ‘또 다른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의 내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태교도인 사울은 성령의 빛을 감당하지 못해 세상이 깨어졌으며 그 깨어진 조각을 다시 붙이는 것이 신을 섬기는 인간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깨어지고 있는 것은 그의 가족이었다. 그의 아내 미리엄은 빈집을 돌아다니며 반짝이는 작은 물건을 훔치고, 히브리어를 공부하던 애론은 힌두교 집회의 열기에 휩싸인다. 그러나 사울은 오직 딸의 영적인 재능에만 집착한다. 타자와의 대화를 거부하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가장 위험한 테러리즘의 온상이 된다는 것은 이미 숱한 테러리즘의 역사를 통해 목격하지 않았던가. 영혼을 치유한다는 종교가 오히려 영혼을 분열시키고 있음을 영화는 말한다.
영리한 소녀 엘리자는 제 가족의 분열이 형이상학에 집착하는 가족의 태도에 있음을 간파한다. 엘리자는 과감하게 형이상학을 포기한다. 나비가 알려주는 알파벳을 말하기만 하면 철자법 대회에서 우승함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는 과감하게 승리를 포기한다. 영화는 결코 초월의 우월적 가치를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적 형이상학보다 위대한 것은 현실의 행복이라는 것, 신의 은총보다 거룩한 것은 살과 살의 포옹이라는 것, 그 포옹의 따스함 속에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 영화는 긴 우회를 통해서 현실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