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평점 :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책의 속날개에 ‘자전거 레이서’라고만 적는다. 자전거 레이서라? 스스로를 소설가라 자처하지 않는 그의 속내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는 소설가로 분류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소설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싶지 않은 것이다.
김훈은 한 인터뷰에서 문학의 엄숙주의에 대해 거의 원색에 가까운 쓴소리를 던진다. "나는 문학이 인간을 구원하고, 문학이 인간의 영혼을 인도한다고 하는, 이런 개소리를 하는 놈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을 신비화하지 말라는 것, 문학을 하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자기 자리를 알아달라는 주문이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다겠다는 점에서 그는 여느 이상주의적 소설가와 구별된다.
시인 황지우는 ‘몸 있을 때까지만 세상이므로/있을 때/이 세상 곳곳/소요하다 가거라’(「피크닉1」)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관념은 이상이고 몸은 현실이다. 그의 소설을 펴보라. 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함을 넘어선다. ‘새벽에 술을 토했다. 노란 위액이 콧구멍으로 쏟아졌다. 종이 달려와 등을 두들기고 토사물을 치웠다.. 몸은 무력했고, 무력한 몸은 무거웠다.’(『칼의 노래』) 그는 『밥벌이의 지겨움』이란 수필집에서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밥벌이에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밥은 결국 몸을 위한 것이다. ‘몸의 사람’이기보다는 ‘정신의 사람’이기를 원하는 여느 관념적 소설가와 김훈이 구별되는 대목이다.
그는 사건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는 기자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에서 그의 묘사와 서술은 결코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세세한 사실들로 소설은 채워진다. 대개의 작가들이 ‘그는 진료를 받았다’라고 간단하게 썼을 대목을 그는 혈액검사, 소변검사, 허파 MRI 촬영, 위 내시경 검사, 양전자방출단층촬영 등 전문용어를 동원한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강산무진』 어디를 펴보아도 디테일에 충실한 그의 기자적 감각을 엿볼 수 있다. 소설이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소설가의 발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그는 여타의 관념적 소설가와는 구별된다.
그렇다고 그를 세속적인 작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무엇보다 미에 탐닉한다. 그의 문장은 결코 허술하지 않다. 미적으로나 관념적으로 꽉 짜여져 있다는 이야기다. 흡사 잘 벼린 칼과도 같다. 소설이라는 서사갈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사건의 전개에 있는 것이지 문장의 갈고 다듬에 있는 것이 아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은 그의 문장을 탐탁치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문장은 어떠해야 한다는 공식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단의 주류적 문체 공식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문체의 미학을 만들어간다는 점도 김훈을 여타의 소설가와 구별짓게 만든다..
칼로 벼린 듯한 시적인 문장, 하면 마루야마 겐지를 빼놓을 수 없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에 있어서, 도도하게 굽이치는 장강대하의 유장함과 대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스타카토식의 문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김훈의 문체와 그 우열에 있어서 한 치의 양보가 없다.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은 비정하리만치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져 있다. 오토바이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 『봐라 달이 뒤쫓는다』의 한 페이지를 보라. ‘똑같은 마을을 빙글빙글 돌기만 하는, 고뇌에 찬, 굴욕의 나날이라면, 이제는 지겹다. 부근을 한 바퀴 달려보고 다시 같은 둥지로 의기소침해져 되돌아가는 삶 따위, 이제는 사양하겠다.’ 그의 소설은 산문시에 육박한다. 문장 하나하나를 다듬는 작가의 고통이 느껴질 정도다. 『납장미』에서 사랑에 빠진 한 소녀를 묘사하는 한 킬러의 넋두리를 읽어보라. ‘떠돌이개는 쓰레기를 헤집던 입질을 멈추고 갈매기들은 하늘에서 날개를 접고 그녀를 주시했다. 그 순간에는 인간과 동물의 벽이 무너지고 온갖 차별이 소멸되어 방파제 주위에 자리를 함께한 생물 모두가 그녀로 인해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녀가 지나간 다음까지도 오래도록 환희를 느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동물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공간,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가 빛을 발하는 공간은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신화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그의 문체는 김훈의 문장과 대조된다.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을 창작하는 태도면에서도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아직도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쓴다. 여타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지 않고 몸으로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더구나 자전거로 전국을 여행하는 김훈과 이미 30년 전부터 배를 타고 대양을 체험했다는 마루야마 겐지에게서는 관념보다는 몸의 감각을 중시하는 태도가 엿보인다. 『봐라 달이 뒤쫓는다』에서 마루야마 겐지는 오토바이를 빌어 말하다. ‘나는 기화한 가솔린을 연속적으로 폭발시켜, 배기 가스와 폭음을 세상에 내던진다. 나는 앞뒤의 두 바퀴를 마음대로 회전시켜, 세상에 넘쳐 있는 시시한 불문율을 걷어찬다.“ 나긋나긋한 감성적 문체가 아니다. 가장 날카로운 칼이 가장 아름다운 칼이라던가. 마루야마 겐지의 문체는 남성적 힘을 지양한다. 『칼의 노래』에서 보여준 김훈의 문체와 흡사하다. ’죽여야 할 것은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나는 내 자신의 한없는 무기력 속에서 죽고 싶었다.”라고 『칼의 노래』의 이순신은 말한다. 이런 남성적 미학은 "나는 여자를 풍경으로 본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는 것이나 여성을 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게 없다."는 김훈의 남성우월적 태도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쨌든 2000년대의 신세대작가들이 도시적 감수성으로 나긋나긋한 소설 쓰기를 하고 있다면 김훈과 마루야마 겐지는 남성적 파워를 과시하는 강건한 문체로 독특한 동아시아의 소설 미학을 구축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