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넷 <읽을꺼리> 2호에서 퍼왔습니다. (http://copyle.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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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라틴 아메리카 민중운동 / 제임스 페트라스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는 일종의 대귀환을 연출하고 있다. 대부분의 저술가들, 저널리스트들, 현학자들, 정부와 세계 은행(World Bank) 간부들이 모두 ‘신자유주의’의 승리를 축하하거나 통탄하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저항세력이 성장하고 있고 이들은 조만간 자유시장 권력 구조의 지배 전체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새로운 저항세력들은, 비록 아직까지는 서로간에 느슨하게--포럼, 세미나, 그리고 국제적 모임의 형태로--결합되어 있지만, 이미 다수의 나라들 내에 각각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그 지지기반을 특수한 지역과 계급으로부터 다수의 국민적 대항-헤게모니 블럭의 건설로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좌파 일반(the Left)’을 말한다는 것은 오류인데, 왜냐하면 그곳에는 한 종류의 좌파들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보다 낡은 어떤 종류의 좌파들은 마치 시든 포도덩굴처럼 새로운 사회-정치적 운동의 출현을 가리는 역할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변덕스러운 관측통들, 적지 않은 수의 저널리스트들과 현학자들은, ‘좌파’라고 말하면서, 이미 오래 전에 계급투쟁을 저버리고 많은 부분 자유주의적 정치기구나 NGO라는 그 변방에 흡수되어버린 ‘대상들’까지 이에 포함시킨다. 현재 라틴 아메리카 좌파들 내부에서 벌어지는 갈등은 이러한 방식의 전향을 고려할 때에만 이해 가능하다. 전(前)좌파들이 빈번히 의지하는 지적 제스쳐는 예전의 입장을 ‘보수적’이라거나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혹은 ‘정통적’이라고 이름 붙이면서 현재의 자신들을 시대에 걸맞는, 혁신된, 현대화된, 포스트 어쩌구라고 불리는, 민주적인 좌파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새로운 혁명적 좌파의 출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선 ‘좌파’ 내의 차별적 조류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을 서로 구별하는 게 중요하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공간적(spatial)이고 경제적인 초점, 사회적 토대, 정치활동 양식과 정치적 전망을 논의해야 할 것이며, 세 번째로는, 이러한 막 움트고 있는 사회-정치적 운동이 맞부딪히고 있는 성장과 모순들, 정치적 도전들을 실증하는 자료들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미국-주도의 ‘신자유주의적’ 권력 블럭과의 현재적 대결, 그리고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잠재력과 함께, 새로운 좌파와 과거 운동들 사이의 관계가 검토될 것이다.


1. 좌파 부활의 조짐들과 그 실체

좌파 부활의 거점은 농촌 지역에서 발견된다. 많은 나라들에서 1990년대는 무토지 농민들의 대규모 토지 점거운동으로 특징지워져왔다. 이들중 가장 중요한 것은 브라질의 무토지농촌노동자운동(Landless Rural Worker's Movement, MST)이다. 이 운동은, 농촌 지역의 수백명의 농민 조직가들과 수만명의 활동적인 지지자들의 투쟁을 통해, 모든 정당들 사이에서 농지개혁 문제에 대한 국민적 논의가 일도록 만들었다. 대부분의 브라질 정치 관측통들은 MST가 현재 브라질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최고로 조직화되었으며 가장 효과적인 사회운동이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볼리비아에서는 대부분의 주석 광산의 폐쇄와 값싼 수입품의 대량 유입, 그리고 정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밀수 등으로 말미암아 광산 및 산업 부분의 노동조합들이 약화되었다. 이를 대신하여 주로 코카 재배 농민들로 이루어진 농민총연맹(peasant confederation)이 국가와 미국에 대한 주요 대결을 이끌고 있는데, 고속도로를 봉쇄하거나 총파업의 선두에 나서 온 나라를 마비시켜버렸다. 파라과이에서는 전국농민연맹(National Peasant Federation)이 군부독재의 재개를 막고 토지문제를 정치논의의 중심사안으로 강제한 정치적 동원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조직은, 다른 농민조직들과 함께, 아순시온의 거리에서 출발해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에까지 도달한 5만명의 시위대를 이끌었다. 멕시코에서는 농촌지역에서 주요 민중 투쟁들이 벌어졌다. 즉 게레로(Guerrero), 치아파스(Chiapas), 그리고 오악사카(Oaxaca)에서 농민들과 국가 사이의 대규모의 대결이 발생했다. 에콰도르, 콜럼비아, 엘 살바도르에서도 유사한 농민 동원의 과정들이 국민적 정치 의제를 재규정하기 위해 출현하였다.
하지만 좌파 부활의 사례들이 농촌 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있다. 콜럼비아에서의 공공노조의 혁신, 노조에 대한 칠레공산당의 점증하는 영향력, 베네주엘라와 아르헨티나에서의 도시기반 운동들(urban movements), 북부 멕시코 자동차 노동자들과 멕시코 시티 노동자들 사이에서의 독립적이고 ‘계급 지향적인’ 노동조합주의의 출현, 브라질의 전국노동총연맹(National Labour Confederation, CUT) 내의 내부 반대파적이고 전투적인 부분들, 점차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어가고 있는 볼리비아, 파라과이, 칠레, 멕시코, 브라질에서의 전투적 교원노조들 등등. 이렇듯 조직화된, 도시 기반의 노동계급 운동들이 투쟁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어떤 사례들에서는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파의 부활 과정에서 진정으로 혁명적인 활동과 운동들은 농촌에 존재한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같은 걸출한 이들을 비롯한 많은 논평가들과 분석가들이 자신들의 저작을 통해 농민층의 정치적 쇠퇴(political eclipse)를 말했다. 농촌 노동력의 규모가 감소중이라는 인구학적 논의들에도 불구하고 왜 이것이--적어도 라틴 아메리카의 대부분에서는--그 자체 필연적으로 정치적 분석으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존재한다. 첫째로, 비록 백분율상으로는 감소하는 중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수천만 가구가 농촌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무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도시와 산업 지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위기들, 특히 점증하는 실업과 빈곤 때문에 도시는 더 이상 젋은 농민들의 유인 배출구가 되지 못한다. 셋째로, 토지 점거가 의제에 오르자, 지방 소도시들과 대도시들로부터 농촌으로 돌아가는 인구 이동의 가능성이 등장하고 있다. 즉 ‘재농민화’ 효과. 넷째로, 자유주의 경제가 소생산자들을 강타하고 그들이 생산하는 품목의 가격을 낮추며 부채를 증가시키자 토지 공세에 참여중인 대부분의 젊은 무토지 농민 자녀들 사이에서 가족적이고 사회적인 유대가 창출되었다. 다섯째로, [이상의] ‘구조적’ 고려사항 외에도, ‘교육받은’ (초등학교나 중등학교 정도) 농민 지도자들의 새로운 세대가 지난 십년동안 출현했는데, 이들은 강력한 조직적 능력과 국민적, 국제적 정치에 대한 세련된 이해, 정치적으로 교육받은 간부진의 창출에 대한 깊은 몰두 등을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지방의 남성, 여성 지도자들이 투쟁 지역에 개입하여, 애초에는 자생적이었고 쉽게 격퇴될 수 있었던 점거운동을 사려깊게 계획되고 실행되는 대중적 정치 행동으로 전환시켜냈다. ‘모든 성원이 한 명의 조직가(every member an organizer)’라는 원칙을 중심으로 구성된 새로운 정치 지도부의 성장과 구조적 조건들 사이의 결합은 ‘농민운동들’의 급작스러운 부상 과정에 유익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이 더 이상 전통적 의미에서의 농민운동이 아니며 이 운동에 참여하는 농민들도 도시적 생활이나 활동들과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농촌 경작자들이 아니라는 점이 지적되어야만 하겠다. 어떤 사례들의 경우, 새로운 농민들은 이전의 노동자, 특히 광부들로서 공장이나 광산의 폐쇄로 인해 원래의 거주지에서 쫒겨나게 된 이들이거나 한 세대 전에 농민들이었던 이들이다. 다른 경우, 새로운 농민들은 교회 기구에서 양육된, 농민들의 ‘과잉(excess)’ 자녀들로서 농촌투쟁에 연루되면서 교회를 버리고 토지 개혁 투쟁을 주도하게 된 이들이다. 많은 경우, 이들은 초등학교나 중등학교 정도의 교육을 받은, 소농의 딸들로서 도시로 이주하여 가정부가 되기보다는 토지 점거운동에 결합하거나 때로는 운동의 지도자로 나서는 것을 택한 이들이다. ‘새로운 농민층(new peasantry)’, 특히 그중에서도 투쟁을 주도하는 이들은 도시를 왔다갔다 하면서 세미나와 지도력 훈련 학교에 참여하며 정치적 논쟁들에 참여한다. 한마디로, 이들은, 비록 농촌 투쟁에 뿌리를 박고 있고 농촌 거주지에 살며 농업 경작에  종사하고 있지만,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적 영감을 지니고 있다. 이들 새로운 ‘농민 지식인들(peasant intell- ectuals)’의 양과 질은 나라마다 다양한 편차를 보이며 운동의 자원과 성숙도에 의존한다. 브라질에서 MST는, 그 수백명의 조직원들로 하여금 매년 다양한 수준의 사회-정치상의, 기술상의 교육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지도자 훈련 과정에의 막대한 투자로 잘 알려져있다.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의 경우 운동들은 여전히 잘 교육받은 소수의 지도자들에 의존하고 있다.  
‘새로운 농민층’의 또다른 특징은 이들이 어떠한 선거주의적이-고/거나 종파주의적인 좌파 정당들로부터도, 설사 그 정당이 가장 급진적이라 할지라도, 정치적으로 자율적이라는 점이다. 브라질의 MST는 노동자당(PT)과 ‘형제적(fraternal)’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래서 대체로 노동자당의 후보를 지지하거나 종종 그 자신의 후보를 노동자당의 이름으로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MST의 핵심 역량은 토지 침탈, 고속도로 봉쇄, 농지개혁기구(Agrarian Reform Institutes) 안에서 벌인 연좌농성 등을 포함하는 의회 외적 투쟁에 집중되어 있다. MST의 전술, 전략과 이데올로기적 논쟁들은 자체의 운동 안에서 결정되며 PT나 그 의회 대표들에게 종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MST의 행동이 PT 지도부로 하여금 농지개혁 투쟁에 몰두하도록 만들었다. 최근 파라(Para)에서 있었던 학살사건은 이의 한 사례이다. 1996년 4월 19일에 주도(州都)로 향하는 평화적 시위 행진을 진압하기 위해 주지사가 군대를 투입하자 이는 10명의 농민들이 살해되는 학살로 비화되었다(4명은 ‘실종되었다’). 그러자 MST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PT 의원들 및 일련의 전국적 시위를 시작한 CUT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전국적 켐페인에 착수했다. MST는 저항운동의 촉매였으며, 이에 뒤따라 토지 점거운동의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 카르두수(Cardoso) 대통령의 인기는 대통령 취임 이후 최저치인 30% 이하로 바닥을 헤멨다. 왜냐하면 그 억압적 주지사는 카르두수의 당 소속이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볼리비아에서는 전투적 농민조직들이 민족주의 정당들이나 사회주의 분파들과의 과거의 연계를 대부분 청산했으며, 그들 자신의 정당 운동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내부 논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파라과이에서는 전국농민연맹의 많은 지도자들이, 농민층이 전국적 관심의 초점이 되도록 애쓰는 한편, 최근 일종의 새로운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출범시켰다.    
게다가 새로운 농민운동들은 일종의 고전적 맑스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며, 그와 구분되는 맥락에서, 종족적(ethnic), 성적, 생태학적 관심들의 영향도 받고 있다. 파라과이에서, 그리고 특히 볼리비아에서 사회 해방과 농촌 투쟁의 문제들은 소수민족적이며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민족적인(national) 요청들의 재확인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 브라질과 볼리비아에서는, 농민 여성들의 조직화된 그룹들로 인해 운동이 보다 강대한 영향력과 대표성을 부여받고 있다.  
새로운 농민운동들은 모두 라틴 아메리카의 지역권적(regional) 조직인 라틴 아메리카 농민조직회의(Congreso Latinoamericano de Organizaciones del Campo, CLOC)에 결합되어 있으며, 최근들어 더욱더, Via Campesino라고 불리는 국제적 기구에 활발히 참여하여 농촌 투쟁들과 관련된 생각들과 경험들을 논의하고 있다. 이러한 네트워크나 그 외의 것들을 통해 ‘국제주의적인’ 의식과 실천이 출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브라질 MST의 투사들은 국경을 넘어 파라과이의 동료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으며, 보다 드문 경우이지만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의 농민운동과도 연대하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1990년대 농민운동들의 부활은 1960년대 운동들의 단순한 재연이 아니다. 많은 경우, 이전 운동들의 성공과 실패는 충분히 학습되고 토론되었다. 소수의 예전 투사들이 새로운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새 운동의 지도자들중 일부가 과거 활동가 세대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옛 운동과 새 운동 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전술적, 전략적, 정치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조직적 수준까지 포함하는 일련의 중요한 차별점들은 새로운 운동들이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창조적 정치 세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농민운동들의 재출현은 변화중인 복잡한 정치적 맥락에서 발생했다. 그 첫 번째 사례로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정책들은 부르주아지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사회집단들의 엄청난 부분들에게 상처를 입혀왔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도시기반 운동과 노조운동은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운동들의 부상은 바리케이드 저편의 집단들로부터도 신자유주의 정책들의 적용을 탈정당화하거나 약화시키는 기제로서 환영받았다. 가령 이에 따라 농민운동에 대해 우호적인 신문 및 기타 언론 보도들이 종종 등장했는데, 이는 브라질에서 특히 그러했다. 필자가 1996년 5월에 브라질에 방문했을 때 부르주아지 내 일부 분파들의 MST 지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당시 기업가 집단들은 농지개혁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를 표현하기 위해 MST를 위한 점심만찬을 조직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농민운동들은 중도좌파 선거연합에 의해 방기된 정치적 공간을 채워냈다. 중도좌파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데에 실패하거나 자유주의적 정치에 흡수되었고 어떤 경우에는 신자유주의 정권에 결합하기까지 했다. 선거주의적 중도좌파 저항세력의 썰물은, 일부는 반(反)노동자적 입법, 대규모 실직, 높은 실업률의 결과로서, 그리고 또 일부는 노조 지도부의 순응적 태도 때문에, 많은 경우 노조의 약화와 함게 했다. 따라서 농촌지역에서의 계급 전쟁의 폭발은 정권의 총체적 정치 기획을 의문에 부치고 공공의 논쟁을 점화하는 ‘불꽃’이 되었다.


2. 라틴 아메리카 좌파의 세 차례의 물결

최근 25년간 좌파는 세 번의 서로 구별되는 물결을 통해 역사 속에 등장했다. 현재 진행중인 사회-정치적 운동들의 중요성과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선 이를 선행의 흐름들과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현대적 좌파의 첫 번째 물결은 1960년대에 시작되어 197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이는 대규모 사회운동들, 게릴라 부대들, 그리고 선거정당들을 포함했다. 때때로 계급과 군사적 활동들은 서로 융합되었다. 때때로 선거 정치와 노조 정치가 서로 융합되었다. 이는 ‘신좌파’--친모스크바적 공산당들의 지배에 도전했던 운동들과 정당들--의 시기였다. 이중에는 마오주의자들, 피델주의자들[카스트로주의자들], 트로츠키주의적 사고에 영향받은 이들, 그리고 기독교적 운동과 인민주의적 운동들로부터 성장한 또다른 이들이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의 독재정권들은 이 물결을 압살했다. 수만의 활동가들이 죽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강제 추방당했다. 억압,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적 기구들과의 해외 연계의 결과로, 이 물결의 참여자로서 이후 정치에 복귀한 이들 중의 다수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 있거나 때로는 신자유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좌파의 두 번째 물결은 독재 기간과 그 직후의 시기에 등장했다. 처음에는 권위주의적 체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그 뒤에는 ‘신자유주의적 의제’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이 물결은 사웅 파울로 포럼(Foro of Sao Paulo)을 통해 자신을 드러냈으며, 엘 살바도르의 FMLN, 산디니스타, 브라질의 노동자당, 우루과이의 확대전선(Broad Front), 베네주엘라의 카우사 R(Causa R), 멕시코의 혁명민주당, 아르헨티나의 대전선(Frente Grande)을 포함했다. 하지만 이들 정당들, 연합체들, 전(前)게릴라 운동들은 점차 선거주의 정치에 삼켜져버렸고, 민영화, ‘세계화’, 그리고 다른 이슈들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에 순응해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이들은 좌파 정당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의 어떤 좋은 부분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판자촌, 농촌지역, 공장 등에서의 민중 투쟁들과 점점 더 단절되어갔다. 어떤 이들은 NGO라는 틀 안에 흡수되어 버렸으며, 그래서 세계 은행(World Bank)의 자유시장과 반(反)국가주의적 정책이라는 보금자리 안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들 정당들과 운동들의 대다수는 [현재에도] 좌파적이고 행동주의적인 흐름으로 남아 있지만, 존경심의 대상으로서는 주변화되어버렸다.
현재 출현하고 있는, 운동의 세 번째 물결은 두 번째에 속하는 집단들과 중첩되어 있지만 보다 막강한 힘과 복원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지지자들은 대개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 사이의 젊은이들이며, 농민들, 지역 노조들, 학교 교사들로부터 충원되고 있다. 이들 활동가들은 그들의 선행자들과는 심대한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다. 우선, 대학 출신들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아직도 대개 중도좌파 선거 조직이나 전문직 경력을 지향하고 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운동들은 재정적 재원들을 거의 지니고 있지 못하지만 엄청난 활력과 ‘비법(mystique)’을 지니고 있다. 지도자들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로 (때때로 30시간에서 40시간 동안이나) 여행하며, 자신들의 임금이나 경작 수입으로 살아가고 있고, 청빈한 사무실을 지니고 있다. 그들 중에 상근 전업 간부들은 별로 없으며 따라서 결코 관료가 아니다. 그들에게 특전이란 없다. 즉 차도 없고, 사무실 집기도, 참모도 없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재정 문제와 인간관계에 대해서 성실하고 지조있는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중에 ‘개인숭배주의적(personalist)’ 지도자는 거의 없다. 오히려 그들은 회의중의 격론을 선호하며 집단적 지도부의 일부를 이룬다. 새로운 조직들의 이상은 각각의 조직원들이 다 한 사람의 조직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지도자들은 선거주의적 좌파나 NGO 지식인들의 기회주의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데, 이들은 이 자들을 외부의 고객(client)들에게 봉사하는 기만적인 아웃사이더들로서 경험하곤 한다. 이전에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던 이들 역시도 오늘날에는 이러한 조직들에서의 수직적 지도 양식과 ‘전달 벨트’로의 오용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다. 그들은 선거 기계상의 톱니바퀴가 되길 거부하고 그 대신에 사회적 기반에 보다 깊이 밀착하길 선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 번째 물결이 신자유주의라는 짐에 대한 비타협적 저항을 대변한다 하더라도 이는 완전히 정교화된 권력 장악의 계획은 아직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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