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좌파 부활에 대한 몇 가지 고찰

1) 옛 좌파와 새 좌파 사이의 골

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통해 최근의 상황중 가장 놀라운 것은 1960년대의 이전 좌파들이 1990년대의 세 번째 물결의 혁명가들에게 최소한의 영향만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의 ‘후광’ 효과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농민들의 토지 점거의 분출, 직접 행동의 정치는 두 번째 물결의 합법주의적, 선거주의적 정치와 그 실용주의적인 중도좌파 연합 사이에 긴장을 창출시키고 있다. 새로운 혁명가들은 공동체들과 협동조합들, 지방 자치체들 내에 민중 권력의 자율적 중심들을 건설하는 전략을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투쟁을 지원하고 진보적 입법안을 통과시키며 억압적 체제로부터 철수하라고 중도좌파에게 요구하고 있다. 우선회하는 선거 연합들과 좌선회하는 사회-정치적 운동들이 서로 갈라져 각기 자신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중도좌파 정부에 대한 대중적 탈주술화는 이들의 풍토병적 부패, 긴축정책, 억압, 민영화 등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자극되었다. 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가령 칠레,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의 전(前)혁명가들, 좌파 정치가들은 모두 이런 형태의 이러저러한 불신을 자초했다. 전국적으로 정권을 획득하는 데 실패한 1980년대의 반항적 정치가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토대를 상실해갔다. 이들의 선거상의 시도들은 패배당했으며 이들의 신화는 사라져버렸다. 약간의 지방적 예외를 제외하면, 이들은 운동들을 건설하고 사회변혁의 장기적 강령을 선전하기 위해 선거상의 개입을 활용하는데 실패했다. 심지어는 브라질의 PT와 멕시코의 PRD마저도 지금은 자기네 나라의 위기와 대결할 분명한 강령을 결여하고 있으며, 우익의 기민한 새 세력들(카르두수와 PAN)과 좌익의 새로운 의회 외부 운동들에 의해 포위되어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순전한 정치꾼들로 보여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카르데나스가 멕시코 시티 시장직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활동가들은 PRD 행정부가 억압적 세력의 날개를 잘라내고 민중 운동을 강화하는 데 지방자치체의 이니셔티브를 활용하길 희망할 것이다. 마르코스는 중앙 아메리카에서의 평화협정들 및 라틴 아메리카의 그외 대다수 지역들에서의 군부와 IMF의 비호하의 ‘민주화’의 제한성을 통렬히 경고하고 있다. 좌파가 선거상으로 전진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는 단지 실질적인 후퇴를 은폐하는 것일지 모른다. 엘 살바도르에서는, 1992년의 평화협정으로 인해 FMLN의 선거상의 전진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좌파가 1997년 3월 최초로 수도인 산 살바도르의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민주농민연합(Asociacion Democratico Campesino)의 활동가들은 당연히 죽음의 군단의 테러 통치의 종식과, 대중들의 압력에 대해 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을 지니는 지방 정부의 출현을 환영했다. 그러나 [중앙] 정부 정책들이 빈농들과 농촌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동안, FMLN은 ‘생산적 자본가들’에 대한 그 정책지향으로 인해 이들의 이해에 대한 관심을 제한시켰다. 이번의 마지막 선거에서, 기권율은 60%에 이르며 많은 빈곤층이나 농민층 유권자들은 투표하러 가지 않았다. 지주와 고용주들의 협박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거기간중에 4명의 활동가들이 살해당했다.      

2) 정치와 혁명적 윤리

마르코스는 라틴 아메리카에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상을 보여주었다. 마르코스와 다른 농민 지도자들 사이의 차이는 분명하다. 마르코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그의 다른 동료들이 감히 필적할 수 없는 문학적 세련됨을 갖춘, 도시 출신의 지식인이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사회혁명의 문화적, 주체적, 역사적 차원들에도 동등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르코스와 그 새로운 지도자상은, ‘국제적으로(internationally)’ 사고하는 동시에, 지방적 풍습들, 전통들, 규범들의 미묘한 음조에 대한 감수성을 통해 ‘일국적(national)’이고 지역적인 현실에도 깊숙히 기반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중 그 누구도 이제는,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외국의 경험에서 추출된 어떤 ‘모델’을 추종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개인숭배 문화를 피하고 기층에 대해 민감해야 할 필요성을 의식하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뛰어난 조직가들이며 능력있는 지도자들이지만, 카리스마적인 웅변가나 공산당식 정치국원은 아니다. 그들은, 최소한 어느 정도는, 복종함으로써 통치하고 있으며, 감정적인 열정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을 투사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납득시키길 추구한다.    
광범하게 유통되는 민주주의 수사와 선거 체제의 지속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들은 정부의 지령을 통해 면죄권을 갖고 활동하는 다양한 초사법적 용병 조직들이 가하는 암살의 지속적 위험을 의식해야만 하는 처지에 있다. 가령 마르코스는 그를 살해당하게 만들려는 멕시코 정부의 의도를 꽤 경계하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위험한 상황이 표현적으로는 계속 현존하고 있지만, 이것이 강박관념으로 작용하거나 지도자들의 활동을 약화시키거나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벙커 안에 숨어서 지휘하는 것은 허약성이나 심지어 비겁함의 표시가 될 것이다. 그들은 회합과 시위 와중에 항상 나타나며, 많은 경우, 구타당하고 체포되어 멀리 떨어진 감옥에 보내진다. 투사들은 투쟁을 함께 하는 이러한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있으며, ‘[투쟁 속에] 얼굴 보이기’는 가난한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새로운 운동들의 창출에 일조했지만, 그들 자신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의 산물--그 사회-경제적 이해에서뿐만 아니라 윤리에 있어서도--이기도 하다. 1990년대의 새로운 농민 및 도시기반 운동들의 부활은, 이들 운동이 생생한 이해들을 방어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누구도 자신들의 지도자의 인격상의 청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만약 지도자들이 이러한 자질을 상실한다면, 이 운동들은 해체되거나 선거주의적인 의뢰인-후견인(clienteles) 정치로 파편화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조직들은 단순한 ‘신사회운동들(new social movements)’이 아니다. 그들은 맑스주의를 견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환경 속에서, 정치-경제 권력의 국가적인--비록 국제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구조의 변화라는 분명한 전망을 지니고 새로운 형태의 투쟁에 관계하고 있는 새로운 계급 행위자들에 걸맞게 맑스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전의 광부들이 코카 경작자들이 되고, 도시 지식인들과 결합된 인디오 공동제들이 게릴라 운동을 주도하며, 농촌의 무토지 노동자들이 반(反)자유주의 권력 블럭을 건설하고, 과라니어를 사용하는 농민들이 마약과 밀매 ‘자본가들’의 헤게모니에 도전한다. 즉 맑스주의는 사회 변화의 이러한 새로운 주역들과 결합함으로써 창조적인 도구로 거듭날 수 있다.    
새로운 운동들의 고무적인 측면은, 환경적으로 수탈적인 사회-경제 체제와의 대결로 인해 이들의 저항이 지속가능한 생태계의 방어에 대한 강력한 헌신과 곧잘 결합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고향 땅에 대한 원주민 민중들의 자기동일시는 농촌 급진주의의 강력한 요인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여성들이 그토록 빈번히 민중 생존 전략의 예봉 역할을 맡는 탓에, 새로운 운동들은 운동이 여성들의 쟁점과 성 평등 문제에 대해 관심을 보일 때에만 번성한다. 전국적 지명도를 지닌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여전히 남성들이지만, 공동체 수준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은 여성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생활용수가 오염되거나 전통적 경작 분지가 개발자들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이로 인한 대중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는 것은 매우 빈번히 다름아닌 여성들이다.      
거의 모든 새로운 지도자들은, 직접적으로든 그들 조직원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든,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사파티스타는 치아파스의 진보적 가톨릭 교도들, 특히 사무엘 루이즈(Samuel Ruiz) 주교 등의 의식화작업에 크게 기대고 있다. MST의 대부분의 초창기 조직가들은 가톨릭 신학교나 농촌의 교구사제 운동들로부터 배출되었다. 파라과이 농민 지도자들중 일부는 진보적 교회인들에 의해 추동되었던 농민동맹(Ligas Campesinas)의 초창기 투사들의 자녀들이다. 볼리비아의 지도자들은 인디오 공동체들의 정신적 전통에 기대고 있다. 민중의 종교성과 맑스주의는 혼합주의적 형태로 결합될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상투적 사고를 계승하는 것은 주의해야만 한다. 가톨릭 해방신학은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세력으로서 남아 있지만, 다수의 국가들에서 그 힘은, 부분적으로는 바티칸의 적개심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NGO 문화에 의한 그 파편화된 복구 때문에, 다소 쇠퇴해버렸다. 이에 반해, 개신교나 오순절운동(Pentecostal) 교파들은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부분들에서 역동적이고 성장중인 세력으로 존재하면서 농촌 및 도시의 가난한 자들과 여성들, 인디오와 흑인 인구들에게 특별한 호소력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라틴 아메리카에는 현재 카톨릭교도들보다 개신교도들이 더 많다고 한다. 라틴 아메리카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충복이라는 점에서 좌파의 가장 첨예한 라이벌이라고 인식되어야만 한다. 이는 정치 제도에 대한 민중의 적개심을 피안으로의 지향으로 왜곡시키고 있으며, 가장 박탈당한 자들 사이에서 자조와 자기개혁을 고취시키고 있다. 제도권 좌파 정당들이 이러한 도전에 응전하는 데 실패한 데 반해, 새로운 운동들은, 그 실천적인 선거-외적 지향으로 인해, 그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3) 도시의 조합과 농촌의 조합

작년 여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노조연맹체들은 성공적인 총파업을 조직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파업으로 인해 모든 산업 생산이 정지되었고 거의 모든 상업 유통이 단절되었다. 브라질에서는 천2백만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산업활동을 정지시키고 대부분의 지방주들의 상업유통 또한 마비시켰다. 이러한 행동들에 대한 대중적인 참여는 그것의 빈약한 정치적 성과와 대조될 수 있다. 더욱 심화되어가기만 하는 실업 위기--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력의 17% 이상, 즉 노동계급의 1/4이,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사웅 파울로 지구 내의 15% 가까이가 실업상태이다--는 최근 15년 내 최악의 상태이다. 불만은 점점 더 카르두수와 메넴의 체제에뿐만 아니라 공식적 노조 지도부, 특히 사웅 파울로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전국 지도부에로도 향하고 있다. CGT와 CUT 지도부에 의한 총파업 소집령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분노를 굴절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총파업은 전략적 전망을 결여한 의례적인 행동에 그쳤으며 많은 부분 보여주기식 저항으로 한정되었다. 정치 지도자들 역시 총파업을 그런 식으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신자유주의적 의제를 완화하는 외에는, 대중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는 일말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파업의 상징적 의미는 도시와 농촌의 이해들 사이의 동맹이라는 유령을 깨우고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지방주들과 대도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유대가, 브라질에서는 무토지 농민운동과 사웅 파울로의 산업 벨트 사이의 유대가 발전하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 특히 지방주들의 공공 노동자들이 새로운 노조 투쟁의 선두에 나선 한편--교육과 보건부문에서의 예산 삭감, 세계은행과 IMF의 예산 권고치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공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수출 이윤을 늘리고 새로운 투자들을 유인하기 위해 [비용] 삭감의 새로운 라운드가 민간부문의 자본가들의 인건비를 낮추고 ‘무비용’ 해고(‘no cost’ firings)를 용이하게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결과, 계층하락하고 있는 공공 노동자들과, 사회적 권익--가족 수당, 상여금 지급, 휴가 등등--의 상실과 과잉인원이라는 협박에 시달리는 민간부문 임금노동자들 사이에는 공통의 이해의 ‘합류(confluence)’가 나타나고 있다. 총파업은, 따라서, 이러한 새롭고 잠재적으로 탈안정화의 힘을 지닌 합류의 첫 번째 징후일 뿐이며, 지속되기만 한다면 이는 신자유주의 정권들을 위태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조 투쟁과 노동계급 전투성의 재등장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노조 반란의 주된 측면은, 예산 삭감과 임금에 대한 하향 압박의 새로운 물결에 대항해 현존하는 사회적 입법과 이전의 임금을 방어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성은 이전의 민중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시기로부터 연유하는 잔존 요소들을 고수하는 데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파업들과 점증하는 투쟁성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의 성장을 반영하긴 하지만, 이들이, 자본주의의 주기적 마비를 생산 및 분배의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로 나아가는 어떤 이행으로 변전시킬 일종의 대안적 전략 개념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농민운동들의 부상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칠 전례를 제공했으며, 이들 운동이 자극하고 있는 새로운 투쟁성은, 역으로, 낡은 전위의 ‘협상주의(pactism)’와 협조주의적 지도노선으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노동조합주의’의 창출의 길을 열어주고 있다. 중도좌파 정당들이 사회운동을 저버리는 동안, 농민운동은 토지 점거로, 지방의 시민 연합체들과 노조들은 총파업으로 방향전환했으며, 무장 조직들은 ‘해방구들’을 창조했다. 하지만 조직상의 파편화는 이러한 운동들의 성공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한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에 대한 진지한 도전에 있어서 유일한 주요 장벽이다. 이는, 수많은 지방 무장 농민들, 채무자들, 인디오들, 공동체 그룹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지만 각각 자신들의 제한된 형태로써만 일당 국가의 집중화된 권력에 대항하고 있는 멕시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농촌지역에서의 농민 투쟁의 재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도시들에 뿌리를 둔 어떤 정치적 수단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전국적 정치-사회 조직을 요구하고 있다.

4) 새로운 식민주의(New Colonialism)

자신들의 국내법인 헬름스-버튼 법(Helms-Burton Law)을 전지구에 대해 강압하려는 미국 정부의 시도--법률 용어로는 ‘초영토성(extra-territoriality)’이라 언급되는--는 미국 외교 정책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적 이해의 집중성이 발전하고 있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형벌부과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행정, 군사, 정보 기구들의 고위층에 대한 미국의 사실상의 침투라는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한다. 많은 논평가들이 미국 은행들에 의해 특히 채무 위기를 통해 수행되는 금융 통제에 대해 비판한 바 있고 또 다른 이들의 경우 미국에 의해 세계은행과 IMF에서의 그 권력 지분을 통해 초래되는 인플레이션의 만연을 비판한 바 있지만, 이러한 강력한 경제적 압력이 어느 정도나 미국 관리들이 수행하는 직접적인 정치적, 군사적 통제와 나란히 작동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는 제출된 바가 거의 없다. 워싱턴은 마약 밀매상과의 전투라는 외양을 걸치고서 라틴 아메리카 군대를 미국의 지휘하에 조직했는데, 이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착수되었지만 아직까지 채 달성되지는 못한 목표이다. 멕시코, 볼리비아, 콜롬비아에서 미국 대사와 국무성은 일상적으로, 어떤 군 간부와 내각성원이 환영할만한지와 어떤 이를 해임시킬 것인지를 지령하고 있다. 그리고 늘상 라틴 아메리카인 행정관료는 이를 순순히 따른다.      
라틴 아메리카의 국내 안보 사안들에 대한 미국의 통제의 강화는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에 대해 각국의 재래식 군대 규모는 줄이면서 국내 경찰과 군사적인 억압기구들은 강화시키라고 압박하는 워싱턴의 정책과 병행되고 있다. FBI와 DEA의 요원들은, 전술적인 수준에서조차,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요원들에게 정보제공과 해외작전을 요구하면서 수사를 지휘하고 있다. 볼리비아의 차파레와 페루의 우알라가 고원(Upper Huallaga Valley)에서 DEA 요원들은 누가 작전을 지휘하고 있는지를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장성들과 대통령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마약 밀매상’이라고 낙인찍을 경우 자신들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매우 염려하고 있다. 미국의 강고한 영향력은, 열과 성을 다해 미국 외교 정책의 입장을 알아서 추종하는 메넴 대통령의 경우와, 수백만 동포들의 궁핍화는 아랑곳없이 외채를 앞당겨서 상환하는 멕시코 세디요 대통령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마약 문제는 라틴 아메리카 내에 미국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하나의 핑계이다. 미국의 무역불균형을 미국 은행들을 통한 돈-세탁에 의해 벌충하기 위해 마약 자금이 활용된다는 사실은 마약-퇴치 프로그램 안에 결코 쟁점으로 등장한 적이 없다. 20세기의 끝무렵에 라틴 아메리카 매입(Latin America Purchase)은 전면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수익성있는 주요 라틴 아메리카 공영 석유회사들은 모두 매각 상태이다. 마퀼라도라(maquiladora) 공단지대나 고착취 자유무역지대는 외국자본 주도의 새로운 수출 전략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현재 패스트푸드 산업과 문화 및 매체 부분의 매상에 대해 막대한 지분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 기업들은 소매품 판매점과 쇼핑 센터뿐만 아니라 부동산에 대해서도 적극적이다. 미국이 후견하는 군사화는 이러한 ‘매입(the Purchase)’을 경호하는 데 맞추어져 있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신식민지적(neo-colonial)’이지 않다. 아니, 이는 차라리 직접적이고 일상적인 행정적 통제의 문제이다.  
새로운 제국주의는 라틴 아메리카 경제의 보다 막대한 착취를 통해 미국의 세계적 위치를 강화하려 시도하고 있다. 미제국 건설의 기본 동력은 해외 이윤에 대한 미국 다국적 자본의 최상층부분의 결정적 의존, 아시아와 독일에서의 적자를 메꾸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에 주목해야만 하는 미국 경제의 결정적 의존에 의해 규정된다. 미국은 대륙의 불안을 억제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수단을 고안해냈다 : ‘세계화’의 이데올로기와 비영리적 NGO들의 부양. 첫 번째 것은 지식인들을 미래의 필연적 물결 앞에 굴복하도록 신비화시키기 위한 것이며, 두 번째 것은 일국적 복지국가를 해체시킬 수단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개입의 폭과 깊이는 계속해서 사회계급의 거의 모든 층들의 토대를 침식하고 있다 : 중소 기업은 부도로 내몰리고 있고, 공공 노동자들은 궁핍화되고 있으며, 농민들은 땅에서 내몰리고 있고, 공장 노동자들은 비항시적으로 고용되어 아주 낮은 임금만을 받고 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고 있기에, 지식인들중의 일부 무리조차 머뭇거리는 태도로 사회분석과 정치실천의 중심 개념으로서 제국주의라는 관념을 되살리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5. 결론          

제국의 건설은 대략 다음의 것들을 포함한다 : 이자 상환 수탈, 자연 자원들의 강탈, 그리고 다국적 자본으로의 공공 재부의 대량 이전. 이러한 힘들이 함께 몰아 닥쳐 라틴 아메리카 사회 체계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지방 권력체’가 그 지방의 중심 도시들에 위치해 있는 탓에, 수탈과 전유의 과정에서 ‘지방주들(provinces)’과 농촌 지역들이 특히 고난의 급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새로운 농민운동의 확산의 논리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요구의 심화되는 침투에 대한 변증법적 저항뿐만 아니라 농민들 내의 변화--정치상의, 문화상의, 그리고 경제상의--와도 관련있다. 오늘날의 농민들은 시장 지향적이며 또한 노동자 지향적이다. 신용, 시장, 기술 원조에 이르는 접근로들은 그들의 임금노동자로서의 계급 조건들의 증대와 연결되어 있다. 교육받은 농민들의 근대적 도시 중심으로의 이전 경험은 농촌 투쟁을 도시 계급투쟁과 연결시킬 근대적인 조직화, 매체 기술을 지닌 새로운 농민들을 창조하고 있다.
현재의 농민운동들을 원초적 반란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폄하하는 것은 중대한 오류일 것이다. 농촌과 도시 사이의 운동은 더 이상 일방적이지 않다. 도시에서의 고도의 범죄율과 사회적 시설의 조락은 도시 생활의 이득을 감소시켜왔다. 운동이 토지를 점령하고 공동체들을 건설하자 인구의 도시 유출에 대한 농촌의 안정화--그 역이 가능하게 되진 않았다 할지라도--가 가능하게 되었다. 인구학적 변화를 강제하는 본래적이고 역사적인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는 많은 부분 일종의 정치적인 문제이다. 이자 지불, 코카 재배자들의 억압, 수출-경작 복합체의 특별 보조금 등은 무엇보다도 국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들이다.
지금까지 제국은 전례없는 번영을 구가해왔다. 광물 자원 전유의 조건들, 시장에의 접근로, 낮은 노동 가격, 정부와 군부에 대한 영향력은 최상의 상태였다. ‘개혁’의 공간은 자유 시장, 선거 체제, 군사적 통제의 공식 안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의 변증법적 반대편 극에는 도시 중간 부분의 조락과, 직접적 사회 행동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차 궁핍화되어가는 노동자들과 공공부문 피고용인들의 급속한 축적이 있다. 바로 이러한 과도한 제국주의 때문에 새로운 농촌 운동들은 전국적인 정치적 영향력과 탁월함을 얻어가고 있는 것이다.
문화적 자율성과 소규모 생산을 고도의 전략적 가치를 지닌 경제영역에 대한 통제와 연결시키는 사회주의적 실천의 혁신과 함께, 농지 개혁이라는 제한된 이슈로부터 사회적 변혁으로 나아가는 근본적 전환이 취해져야 한다. 제국은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골격을 강타하여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것은 극소수만을 흡수하고 다수를 착취했다. 그러나 좌파가 다시 반격에 나섰다 즉 파라과이와 볼리비아의 시골에서, 브라질의 농촌 공유지 촌락에서, 멕시코의 밀림에서, 새로운 운동이 등장하여 그 고유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있으며 그 고유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  [장석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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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dan 2005-05-25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회사에서 일은 안하시고.

... 라고 말하는 사람도 회사에서 노는 중. 흐흐.
(읽을거리 많아서 좋군요. 좋은 정보들이에요.)

urblue 2005-05-25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사에서 할 일 없는 사람의 비애,
라고 말하려했더니 일이 갑자기 쏟아지는군요.
아, 오늘은 완전 지쳐버렸어요.

urblue 2005-05-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저도 아직 다 못 읽었어요. 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