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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속도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푸른숲 / 2021년 10월
평점 :
20220131 우리는 누구나 자폐로 태어난다
엘리자베스 문의『어둠의 속도』를 알게 된 것은 알라알라북사랑님의 <읽은책>에서였다. 제목이 신선했다. 저자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였다. 알라딘 소개글을 읽고 바로 구매했다. 저자의 이력이 이채로웠다. 1945년생인 엘리자베스 문은 역사학을 공부했고, 해병대에서 기술병으로 3년간 근무했으며, 다시 생물학을 공부했다. 응급의료원, 교사, 합창단 지휘자, 지역신문 칼럼니스트 등 다채로운 직종으로 여러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이런 이력만도 독특한데, 엘리자베스 문에게 이 소설을 탄생하게 만든 또하나의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것은 저자가 자폐아를 키운 엄마라는 사실이었다. 입양아였는데, 처음부터 자폐아를 입양했는지 입양하고 자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어둠의 속도'라는 제목은 저자와 자폐 아들과의 대화에서 탄생했고, 이 비슷한 대화가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어느 날, 아들이 들어와 문틀에 기대 물었어요.
"빛의 속도가 1초에 30만 킬로미터라면, 어둠의 속도는 얼마에요?"
제가 일상적인 답을 했죠.
"어둠에는 속도가 없단다."
그러자 아들이 말하더군요.
"더 빠를 수도 있잖아요. 먼저 존재했으니까요."(2003년 3월, 시네스케이프 매거진, 폴 위트커버와의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플롯은 복잡하지 않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자폐아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진 근미래, '루'는 조기개입과 진보된 교육과 사회적 지원 제도 덕분에 성인이 되어 비장애인들처럼(소설에서는 정상인으로 쓰고 있다) 직장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며 일상을 무난히 영위해 나간다. 사실 '루'라는 캐릭터는 자폐인이라기보다 좀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일반인 같다는 인상을 준다. 이른바 정상인들(비장애인들)보다 훨씬 잘 산다. 일도 잘하고, 자폐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취미로 하는 펜싱 실력도 좋으며, 사랑이란 감정을 느낄 줄도 안다. 거기다 똑똑하기까지 하다. 감각 정보에 대한 민감도가 뛰어나며 패턴 인식 기술력도 탁월하다. 이런 루가 가진 문제점이 대체 뭐란 말인가? 자폐,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루가 다니는 회사의 부장 크렌쇼는 자폐 부서원들이 마뜩잖다. 그들이 거두는 높은 생산성은 보지 않고, 그들에게 지출되는 개인 체육관, 음향 설비, 주차장, 온갖 장난감들만 눈에 거슬린다. 때마침 자폐인들을 정상으로 만들어 주는 치료법이 등장해, 크렌쇼는 치료를 빌미로 그들을 쫓아내거나 강제 치료를 받게 하려 한다. 크렌쇼는 자폐인들의 자폐를 그 자체로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 병들고 손상되고 "특별 대접받기를" 바라는 버러지로 본다. 크렌쇼와 비슷한 시각을 가진 인물이 또 있다. 루가 속한 펜싱 동아리 회원 돈이다. 정상인 돈은 루에게 노골적으로 너는 "병신이고 동물원에나 처박혀" 지내야 할 존재이자, 약자들에게 쏟아붓는 온갖 사회 지원 때문에 자기 같은 인재가 밑바닥 일을 하고 사회가 불경기로 빠져든다고 말한다.
크렌쇼나 돈 같은 부류의 인간을 나도 만난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장애인들을 나랏돈 빼먹으려고 데모만 할 줄 아는 세금 도둑들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고, 적잖이 황당했다. 그 말을 하는 당사자가 장애인의 손이나 발이나 눈이나 머리가 되어 주는 장애인 활동지원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반박했다. 장애인들 덕분에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냐고. 그 덕에 당신이 일을 해 수입이 생기지 않얐냐고. 하지만 그 사람은 크렌쇼처럼 그건 그거고, 장애인들 때문에 나라 살림 거덜 날 거라고만 침 튀기며 말했다. 어쩌면 크렌쇼나 돈이나 그 활동지원사 같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이끌어 가는 쪽은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올드린 과장이나 경찰관 스테이시라고 본다. 운전을 하고 직업을 갖고 사랑에 빠지고 펜싱 시합에 나간다는 루의 이야기를 듣고 스테이시가 말한다.
"저는 당신보다 장애가 심한 사람들이나, 당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지원 없이 사는 사람들이요. 이제 지원의 근거와, 지원의 경제성을 알겠어요. 탁자의 짧은 다리 밑을 괴는 것과 같아요ㅡ왜 튼튼하고 견고한 탁자를 마련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작든 쐐기만 있으면 견실해지는데, 왜 기울어져 불안한 탁자를 견뎌야 하죠?"(299쪽)
그러나 사회적 지원 체계가 아무리 탄탄해도 장애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엘리자베스 문이 이 소설에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이라고 생각한다. 초기 개입 덕분에 루는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지만, 자신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얼마나 애를 썼는지를 고백한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안 된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같은 때 같을 말을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 잘 지내요. 괜찮아요. 잘 자요, 부탁합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아뇨, 사양할게요, 당장은 아니에요. 교통 법규를 지킨다. 규칙을 따른다. 아파트에 평범한 가구를 놓고, 내 별난 음악은 아주 조용히 틀거나 헤드폰으로 듣는다. 그래도 부족하다. 이렇게도 안간힘을 쓰는데도, 진짜 사람들은 내가 변화하기를, 그들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 그들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내 머릿속에 이것저것 집어넣고, 내 뇌를 바꾸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다. /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독립적으로 생활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며. 그러나 나는 안전하지 않았다.> (63쪽)
안간힘을 썼다는 루의 고백에서 울컥했다. 왜냐하면 우리 대다수도 루와 다르지 않게 안간힘을 쓰며 바둥바둥 살아가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모하는 사회의 진화에 발맞춰 '나를 바꾸라'는 압박을 받고 살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따라잡지 못하면 우리 누구나 어둠의 세계로 도태되어 나만의 자폐에 갇힐 수 있다. 우리 누구나 그런 불안을 안고 살지 않는가. 이 소설은 근미래가 배경이지만 루가 마주하는 문제들은 지난날 내가 겪었고 오늘날 내가 겪고 있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거의 흡사하다. 자폐인인 루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관계'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이해하려 애쓴다. 모르면 겁이 나지만 알게 되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상인이 되면 모든 힘듦과 불안이 해소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정상이 되고 싶다는 루의 친구 캐머런의 말이 가시처럼 아팠다.
"나는 정상이 되고 싶어. 늘 그랬어. 다른 게 싫어. 너무 힘들어. 사실은 같지 않은데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척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지쳤어." / . . . "나는 정상인처럼 보이기 위해 그렇게 힘들어지 않고 싶어. 그저 정상인이고 싶어." . . . "나는 잘못된 부분을 감추려고 애쓰는 데는 진력이 났어. 나는 제대로 되고 싶어." (382쪽)
제대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일까. 루도 루의 동료들도 그 어떤 정상인들 못지않게 자기 앞가림을 잘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할 줄 알고,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인물들이다. 그랬기에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이만큼이어도 족하다고, 충분히 잘해 왔다고, 자폐인이어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아야 할지 낫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 루를 엄마처럼 안아 주고도 싶었다. 왜냐하면 나 또한 루와 똑같지는 않지만, 평균적인 아이들과는 성장 속도가 다른 아들을 키우는 엄마이기 때문이었다. 루가 삶의 지표처럼, 지렛대처럼 의지하는 엄마의 말씀들이 있다.
ㅡ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고 그 사람들이 더 바르게 행동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셨어."(53)
ㅡ 노력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같지 않다. Trying was not the same thing as dong. (71)
ㅡ 네가 바꾸지 못할 일로 슬퍼하지 말거라, (101)
ㅡ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들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115)
ㅡ 사람들은 가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하기도 해요. (137)
ㅡ 화난 채로 있는 것은 좋지 못하다고 했다.(181)
ㅡ 삶은 변화구를 던진단다. 그래도 그 공을 잡는 게 네 역할이지.(426)
내게도 느린학습자인 아들에게 곧잘 건네는 두 가지 말이 있다. "Sapere aude 알려고 하라!" "노력하자!" 얼마나 많이 했던지 이제는 이 어린이가 엄마 표정만 보고도 이 말을 하겠구나 라는 눈치를 챌 정도이다. 이 소설에서 어둠의 속도는 무지, 편견, 미지(알 수 없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폐, 지적 장애, 다운증후군, 경계선 지능 등을 가진 아이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렇게 태어났다. 루의 말대로 그냥 "사고"였다. 그러나 언제나 "무지는 지보다 먼저 도착"하기에 이런 아이들의 미래를 상상하려 들면 환한 빛보다 캄캄한 암흑이 먼저 찾아든다. 그러면 온몸에서 힘이 쭉 빠지고 암담함에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위험해진다. 다행히 때로는 아이들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장애아의 부모에게 가장 큰 도전 중 하나는 어떻게 아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그럼에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변화에 열린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 . . . . 만약/언젠가 그런 치료가 가능해진다면 아들이 결정해야겠지요." (521) (위의 인터뷰 중)
나도 느린학습자인 우리집 어린이가 루처럼 자신의 머릿속을 읽고, 자신의 언어로 의사 표현을 하고, 자신의 의지로 결정을 내리는 어른으로 자라기 바란다. 그러자면 지금부터 그런 어린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소설의 결말은 의외였고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루가 좋아하는 펜싱 대결만큼 문장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런 탓에 SF를 선호하지 않는 내가 저자의 다른 소설『잔류인간』을 상호대차 신청했다. 기대만땅^^
저 밖에는 어둠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예전의 루는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질 차례이다. - P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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