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09 #시라는별 77
어떤 나무의 말
- 나희덕
제 마른 가지 끝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졌습니다.
더는 쪼개질 수 없도록.
제게 입김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당신 옷깃만 스쳐도
저는 피어날까 두렵습니다.
곧 무거워질 잎사귀일랑 주지 마십시오.
나부끼는 황홀 대신
스스로의 관이 되도록 허락해주십시오.
부디 저를 다시 꽃 피우지는 마십시오.
<어떤 나무의 말>은 2014년 출간된 나희덕 시집『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 실려 있는 첫 번째 시다. 나는 이 시를 2015년 1월 내 노모의 여든둘 생일 즈음 읽었다. 그 때 이 시는 내게 ‘어떤 나무의 말‘이 아닌 ‘내 늙은 어미의 노래‘로 들렸다. 저때 내 어미는 사는 게 무재미라면서도 어린 날과 젊은 날의 즐거운 추억들을 되새김질하며 간혹 웃었고, 하나뿐인 어미 떠나면 형제자매 없는 넌 고아가 돼서 어떡하냐고 울먹이곤 했다. 그때마다 ˝왜 이러셔 엄마, 내가 엄마보다 훨~~~씬 부자잖아. 엄마 없는 남편도 있지, 아들딸 고루고루 있지. 걱정할 거 하나 없다니까!!!˝ 라며 세게 퉁을 놓았고, 그 말에 엄마는 나와 함께 허허실실 웃었다.
2년 후 어미는 치매가 들었지만 언제나 나와 사위와 손주들을 알아보았고, 당신의 옛 이야기와 구수한 옛 노래로 우리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다. 날짜와 나이를 잊고 사는 어미에게 당신 나이를 일깨워줄 때면 어미는 화들짝 놀라 말하곤 했다.
ㅡ 하이고 무시라. 내가 나이를 고렇게나 많이 문나. 우리 딸 고생 안 시키게 이제 고만 가야 할 텐데. . . . . . .
ㅡ 하이고. 운제는 엄마 떠나면 나 고아 된다고 눈물 글썽이더니 이제는 아닌가 부지.
ㅡ 인자는, 이서방도 있고 너그 아들딸도 있이니께, 너가 안 외롭것재. 나는 인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 딸 고생 안 하게 너무 칩은 날만 피해 가면 될낀데.
2022년 2월 3일. 나는 고아가 되었다. 1934년생 내 어미는 여든아홉 생일 촛불을 끈 지 한 달만에, 당신 소원대로 아주 추운 날은 피해, 당신 바람대로 한 며칠 아프시다 자는 잠에 살포시 저 세상으로 가셨다. 1월 중순 우리 가족은 방호복을 입고 침대에 누운 내 어미와 임종 면회를 했고, 열흘 후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휠체어에 앉은 어미를 대면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어미의 몸뚱이는 ˝더는 쪼개질 수˝ 없는 마른 가지처럼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손길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아파했다. 그래서 설날에는 차마 어미를 보여 달라 말을 할 수 없어 어미 누워 있는 요양원 건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어미의 몸뚱이는 꽃은커녕 잎사귀마저 무거워 ˝스스로의 관˝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나부끼는 황홀˝을 충분히 맛보았다는 듯이.
어미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날, 기운이 딸려 머리를 쳐들지도 말을 내뱉지도 못한 채 눈만 감고 있는 어미에게 요양사가 말했다.
ㅡ 어르신 ~~~ 누가 왔는지 좀 보세요.˝
어미는 겨우 고개 들어 나를 힐긋 보고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말했다.
ㅡ 우리 딸 . . . . . .
우리 딸. 어미가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치매 노인 어미는 생을 놓기 직전까지 딸의 존재를 끝까지 기억 속에 붙잡고 있었다. 우리 딸. 엄밀히 따지면 엄마와 나에겐 ‘우리‘라고 할 만한 식구가 없었다. 어미는 홀어미였고, 나는 외동딸이었다. 그런데도 어미에게 나는 늘 ‘우리 딸‘이었고, 나에게 어미는 늘 ‘우리 엄마‘였다.
‘우리 엄마‘ 프로젝트
1934년생 내 어미는 자존심이 세고 강인한 여자였다. 마산 바닥에서 인상파로 통한 내 어미를 잘못 건드리면 상대가 어떤 작살이 나는지를 나는 두 귀로 무수히 들었고 두 눈으로 이따금 목격했다. 그런 여인이 대학생이 된 딸년 때문에 무연고지 서울에 와서 억척스럽게 일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딸인 내게 물었다.
ㅡ 니년은 너거 친구들하고는 입이 닳도록 새실(사설)을 까더마 나하고 있을 때면 꿀 먹은 벙어리모냥 입천장을 딱 쳐닿고 있노. 니 에미가 그리 싫나.
나는 속으로 ‘당근 싫지.‘ 라고 말했다. 어미가 그 말만 했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아니 그런데,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기고만장한 어미가 딸년의 들러붙은 입천장 때문에 서러움의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이건 뭐지? 나는 순간 너무나 어이 없고 당혹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대 차이가 30년이나 넘는 엄마랑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단 말인가. 일방적으로 쏘아붙이기만 하는 엄마랑 대체 무슨 이야기가 된단 말인가. 그 후 어미는 계속 서러웠고 나는 계속 괴로웠다. 행동에 나서는 쪽은 대개가 괴로운 쪽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호구 조사하듯 설문조사를 했다. 너희들은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느냐, 하면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엄마랑 얘기하면 재미가 있느냐 등등등. 그리고 내가 찾아낸 해결책은 내 친구 선배 후배를 엄마와 공유하기였다. 나는 어미에게 그들의 이름과 특징을 설명하고, 그들을 소개하기도 하고, 이따금 집에 초대해 어미가 차린 밥상 앞에 앉히곤 했다. 그 날 이후 내 어미는 시나브로 ‘우리 엄마‘가 되어 갔다. 그 날 이후 나는 내 어미의 어제와 오늘의 삶을 지인들과 공유해 나갔다. ‘우리 엄마‘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어미의 장례식에는 ‘우리 엄마‘를 어떤 식으로든 아는 이들을 불렀다. 조문을 오지 못하는 지인들은 전화로 톡으로 먼 길 떠나는 ‘우리 엄마‘를 배웅하고 이승에 남은 나를 위로했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함께 추억할 수 있는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 목소리만 들어도 그
이야기들이 떠올라 목울대가 뜨거워지는 것, 엄마가 해준 아구찜이 제일 맛있었어요, 우리 아빠 칠순은 못 챙긴 내가 어머니 칠순 잔치는 가지 않았겠어요, 어머니가 저를 엄청 예뻐하신 거 기억해요, 어머니 얼굴 한 번도 뵌 적 없는데 이야기를 하도 들어 꼭 뵜던 것만 같아요 . . . . . .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이 얼마만큼 큰 위안이 되는지를, 나는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나의 가족, 어미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게 해준 사위와 손주들, 사돈 식구들이 묵묵히 혹은 떠들썩하게 자리를 지켜 주었다. 나는 어미의 바람대로 외롭지 않았다.
한창 시절 몸무게 70킬로그램을 넘나드는 푸른 나무였던 어미는 바싹 마른 나뭇가지로 변했다가 한줌 재가 되었다. 어미의 유골함을 들고 장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희덕의 <어떤 나무의 말>을 기억나는 대로 계속 읊조렸다.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진 몸뚱이에 ˝입김을 불어넣˝어 또 다시 꽃 피우거나 잎사귀 달게 하지 않도록 ˝허락해˝ 달라고 했던 어떤 나무의 말은 내 늙은 어미의 말이었다. 이제까지 나는 늙어가는 어미의 기력 상실과 기억 상실을 마주해야 했다. 이제부터 나는 어미라는 존재 자체의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2018년 11월 10일. 34년생 어미가 신우신염으로 의정부 백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간호사가 물었다.
ㅡ 어르신, 어르신 성함 아시죠?
ㅡ 아암. 알지.
ㅡ 그럼 여기 종이에다 성함 좀 써 주세요.
내 어미가 당신 이름을 써 놓은 종이를 들고 나는 말문을 잃은 채 멍하니 그 글자들을 읽고 또 읽었다. 과거형으로 끝난 어미의 이름. 그렇게 부르게 될 날이 언제고 반드시 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날이 지금일 줄은 몰랐다. 나에게는 고맙게도 예상한 날보다 훨씬 훗날이다. 어떤 중요한 일이 마무리되는 날까지 기다려주고 버티어준 ‘우리 엄마‘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나는 이제부터 ˝대상의 상실이 남겨놓은 공백을 아물게˝(남진우 평론가의 해설 중) 할 방법으로 작별 일기 대신 애도 일기를 써볼 생각이다. 사람은 떠나도 이야기는 남는다. ‘우리 엄마와 우리 딸‘의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