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또 읽고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8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공포문학단편선 

  한국에서 태어난 공포의 모습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 작가들의 공포문학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직 많은 장르문학들이 자리를 잡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멋진 공포문학 단편집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책이 더 많이 알려지고 팔리지는 못할망정 19세 미만 구독불가 판정을 받은 사실은 많은 독자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형평성이 없는 기준을 볼 때, 정말 이해 못할 처사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책은 앞으로 한국의 호러 문학의 시작일 것이다. 여기서 간단히 각 단편 별로 짧게 리뷰를 하도록 하겠다.

  일방통행 
  조금 어지러운 단편이었다. 첫 단편이지만, 가볍게 읽기 힘들었달까. 필자도 호러에 관해서는 거의 접해본 바가 없기 때문에 낯선 마음으로 읽었다. 또한, 기존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교만과 이기심.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마주치게 되는 ‘그것’, 을 공포로 형상화한 솜씨가 놀라웠다. 아마도 필자가 운전을 해보았다면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을 단편이었으리라.

  은둔(隱遁) 
  짧은 단편이지만 강렬하다. 은둔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공포를 절실하게 섬뜩하게 손에 잡힐 듯한 묘사로 그려냈다. 강렬한 이미지가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실수로 형을 죽이고 방안에 은둔하게 된 주인공의 내면 묘사가 치밀하다. 결국 방밖을 나서지만 더 큰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어디로 가도 공포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상자 
  어디선가 들어본 시체를 넣으면 다시 살아나는 상자에 관한 단편. 소품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 기묘한 상자에 대한 묘사가 잘 되어 있다. 잡지 파우스트를 보면 이런 상자에 대한 소재로 더 긴 장편이 연재되고 있기도 하다. 짧고 간결하며 단편적인 재미에서는 이 상자는 아주 깔끔하다. 

  감옥 
  긴 분량의 단편도 아니고, 대단한 이야기, 놀라운 공포를 선사하는 단편은 아니다. 그러나 재미있게 읽히긴 한다. 쉽게 예상이 가는 이야기라서 조금 아쉬웠다. 

  들개 
  잔혹하다. 피와 폭력이 가득한 단편이다. 어둡고 끈적끈적한 느낌. 인간도살이라는 금기를 무섭게 다뤘다. 불쾌한 느낌도 많이 들고, 사람의 감정을 움직인다는 점에서 괜찮았다고 할까. 이것 역시 이야기가 대부분 예상 가능 범위라는 것은 조금 아쉬울 듯하다. 

  흉포한 입 
  약간 이해가 안 가는 글이었다. 공감가는 대목(?)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글의 구조 파악이 힘들었다. 

  하등인간 
  재미있게 읽었다. 외계인이 나오고 인간에게 강제로 항아리를 쓰게 만든다는 점에서 SF로도 볼 수 있는 단편이었다. ‘지배자’에 대해 복종해야 하는 사회. 독재에 대한 공포 등이 떠올랐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 기억에 남는 단편이었다. 

  아내의 남자 
  흡인력 있는 소설이었다. 추리 형식을 띄고 있어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의처증이라는 소재를 굉장히 잘 살린 수작이었다. 

  모텔 탈출기 
  제2회 황금드래곤문학상 단편상을 수상한 작품. 멋진 블랙 코미디. 이 소설집에서 단연코 가장 뛰어난 몰입감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당시 황금드래곤문학상 단편상을 수상할 때도 뛰어난 몰입감과 함께 충격적인 반전으로 인터넷상에 널리 퍼졌으며 유머글이라고 잘못 알려지기까지 했다. 필자의 기억 속에 오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던 이 소설이 마침내 활자화 된 것이 무척 기뻤다.

  깊고 푸른 공허함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신판 : 팔란티어)의 작가의 단편 소설. 한국 사이버 펑크 스릴러의 개척자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아무튼 『팔란티어』는 장르 독자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작품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소설로 스릴러적 구성과 가상현실게임의 첫 도입이라는 점에서 여러 가지로 흥미 넘치는 소설이었다. 팔란티어 작가의 단편이 실렸다는 소리만으로도 이 단편집은 내가 반드시 구입해야 하는 도서였다. 그렇게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 때문일까? 단편은 기대한 것보다는 실망감이 컸다. 그래도 쓴 연도가 1996년도임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복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글은 자연스럽게 잘 읽히나 스토리나 공포가 신선하지 못했다는 게 다만 아쉬울 뿐이다.

  또 다른 공포를 기대하며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단편집보다 더 나은 단편집이 나오리라 기대한다. 내가 막연히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은 부서졌다. 덕분에 공포문학에 대한 좋은 기대를 갖게 되었고, 앞으로 밀리언셀러 클럽에서 나온 다른 장편 소설들도 읽어볼 것 같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국공포문학단편선2가 나오기를 기다려 본다. 그곳에는 또 다른 독특한 공포가 숨어있을 것이므로. 우리 삶에서 마주치는 심리적, 정치적 공포들을 거기서 실체화하여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소니 2007-07-1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거 너무 재미있어요 ㅋ

twinpix 2007-07-15 14:08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든 단편집이었어요. 사실 기대가 너무 크면 실망도 하지만요. 하지만, 2편이 나오고 3편이 나올 거라고 하니 기대가 됩니다.^^

fallin 2007-07-25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공포는 재미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담아놔야지^^ 리뷰를 읽으니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twinpix 2007-07-25 22:59   좋아요 0 | URL
꽤 재미있습니다.(뭐, 기대를 많이 해서 아쉬운 면도 많았지만, 이만하면 첫 발걸음 치고는 꽤 수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2권도 3권도 나올 예정인 것 같아요. 뒷 권들도 기대가 되는 시리즈입니다.
 
읽고, 또 읽고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눈 먼 자들의 도시

 

  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지루하다? 
  흔히 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딱딱하다거나, 어렵다는 편견이 있다. 특히 재미없을 거라고 지레짐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까닭에 필자 역시 『눈 먼 자들의 도시』에 대해 막연히 읽기 힘든 작품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일단은 충분히 재미있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초반을 읽을 때만해도 그 생각이 맞았다고 여겼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 갈수록 이야기는 흥미진진해졌고, 뒷이야기가 궁금한 까닭에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웬만한 장르 소설보다도 훨씬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샌가 필자는 『눈 먼 자들의 도시』 속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눈 먼 자들을,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광경이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차마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다. 수상한 작품은 이 작품은 아니다. 그는 『수도원의 비망록』이라는 작품으로 수상했다. 아무튼 간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작품이란 편견 때문에, 나는 읽기도 전에 이 작품이 약간은 어렵고 낯선 작품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이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고 이 책을 보지 않던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권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재미있는 소설을 찾노라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이 소설은 ‘모두가 눈이 멀고 단 한 명만 눈이 멀지 않은 세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다. 이는 다분히 환상적인 설정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극히 미비하기 때문이다. 현실을 비트는 상상력. 환상을 통해 또 다른 사실을 전달해준다. 환상은 아주 매력적인 장치이다. 인간에게 환상은 뗄 수 없는 접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소설과 영화 등에 열광하는 것도 다양한 환상을 접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런 환상이 이야기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멀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모든 시스템이 마비되어 버린다. 더 이상 인간은 지구를 지배하는 영장류가 아니다. 그저 간신히 살아있는 존재가 될 뿐이다. 눈을 잃는 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비슷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모든 장애 중 시각 장애는 가장 큰 장애로 분류된다. 그건 우리가 거의 모든 정보를 시각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다수의 인간들이 그 시각 정보를 접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되고 만다.

  한 때, 필자는 인터넷 상의 익명으로 남겨지는 악플들을 보면서 언젠가 저런 현상에 대해서 글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아무도 자신이 누군지 모르기 때문에, 서로 서로를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이 책을 읽고 나서 들었다. 이 책이야 말로 인간이 익명을 가지게 될 때, 혹은 눈이 멀 때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본성을 이토록 잔인하게 잘 묘사한 작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것이 바로 마술적 사실주의의 매력일 것이다. 교묘한 환상적인 배경 설정을 깔아 둠으로써 인간 그 자체의 본연의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모든 사람들이 시력을 잃지만 오직 한 여자만 시력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더욱 장면들이 세세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드러나는 장면들은 사실 끔찍하고 더럽다. 소설 속 이야기가 영화만큼이나 끊임없이 상황이 바뀌고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갈등과 대립이 반복되면서 재미를 주지만, 실제 영화로 만들어지기를 원치 않는 것은 그 주위 배경이 모두 끔찍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진 ‘향수’보다 더 큰 재미를 가지고 있다. 향수보다 뛰어난 흡인력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주인공에게도 자연스럽게 감정 이입이 되고 마지막에는 큰 감동까지 몰려오는 것이다.

  이미 어느 한 편으로는 많이 알려진 편이지만, 그래도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해보면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나올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널리 이 책을 알리고 싶다. 이렇게 재미를 가지고 있고, 한 편으로는 우리를 반성하게 만들며 또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진정 눈을 뜨고 살고 있는 게 맞는 것인가? 사실 눈을 뜨고 있지만, 그렇게 생각할 분 우리 모두는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전혀 보지 못하는 눈 먼 자들의 도시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인생의 행운 하나는 가슴에 품고 있는 셈이다. 살아가면서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자, 이제 이 책을 읽어라. 그리고 눈을 떠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zziuni 2007-07-0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새로 읽기 시작한 책입니다. 눈뜬.. 사니까 주더군요. ^^
의도된것 같기는 한데, 등장인물의 이름도, 단락구분도 대사의 "" 처리도 없어서 좀 힘드내요..

twinpix 2007-07-02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ziuni/ 우와, 리플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1+1 로 샀어요.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이벤트 하니까 샀지요. 원래 저는 그런 방식을 좋아해서 잘 읽은 편이었어요. 제가 습작을 써도 그런 식으로 쓰거든요. 국내 작가들 중에서 그런 식으로 쓰는 여성 작가들도 많아서 영향을 받았고요. 그런데 눈 뜬 자들의 도시는 읽다가 현재 잠시 포기 중입니다. 어렵더군요.^^
 
대리전 - 환상문학 시리즈
이영수(듀나) 지음, 김수진 그림 / 이가서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대리전. 복거일 씨를 제외한 국내 유일의 SF작가라고 할 수 있는 듀나의 작품입니다. 제가 국내 작가 중에서 이름만 보고 당장 구입하는 작가는 현재는 몇 없습니다. 아직 독서량이 많지 않아서겠지요. 이영도, 듀나, 박민규, 전민희, 이우혁 등입니다. 이중 Happysf 사이트에서 듀나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코엑스에 있는 반디앤루니스로 달려갔습니다만, 그 날은 다 나가서 없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에 테크노마트의 프라임 문고에서 구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듀나는 흔히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다시피한 작가가 아닐까요? 게다가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고, 문단에 인정을 받아서 문학과 경계나 문학과 사회 같은 문예지에도 글을 실었습니다. 이전에 나온 <태평양 횡단 특급> 등은 문학과 지성사 같은 순수문학 출판사에서 출판이 되었지요. 순수문학을 쓰는 작가도 아니고 장르문학, SF를 쓰는 작가가 문단에 인정을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SF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문학상 심사까지 올랐죠.

 대리전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인상은 우선, 그 판형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신국판보다 작은 판형에 양장본으로 만들어졌더군요. 개인적으로 양장본 보다는 일반 페이퍼백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안에 실린 단편 수는 <태평양 횡단 특급> 보다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점이 확실히 있었죠. 그것은 바로 듀나 최초의 중편이 실렸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단편만을 발표해왔던 듀나의 중편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그날 밤새 "대리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리전은 "호전적인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듀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기존 클리셰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중 첫번째에 위치한 호전적인 외계인의 치구 침략 이야기는 역시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클레멘트 문제라고 하는, 과학 기술력의 차이와 지구 침략 이유 등을 나름대로 잘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 등을 가져온 것을 스스로 반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저는 괜찮았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에서는 SF보다는 환상문학에 어울릴 만한 환상적인 단편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환상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신비한 것이 나온 점에서 어떤 과학적인 내용으로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아와서, 클리셰들을 정복해 나가는 듀나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이미 쓰여졌고,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진부한 패턴을 다시 활용해서 그것을 새롭게 써내려간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독자들이 열광하고 인상적이었던 멋진 상황이나 소재이기 때문에 클리셰가 되었을 테니, 그런 클리셰를 다룬 작품 역시 일정 재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도 좋아하고요. 제가 매트릭스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물론 매트릭스는 기존에 일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전에도 그런 AI가 인간들을 가상현실 속에서 가둔다는 설정은 이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매트릭스는 그것을 조합해서 만든 작품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기존의 것들에 어떤 기본이 되는 완성미 있는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대리전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외계인들이 뱃살 나온 중년의 아저씨나 아줌마들의 의식을 조정해서 자전거로 추격전을 벌이고, 운동장에서 물어뜯는 혈전을 벌이는 장면은 정말 유쾌합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련한 향수 같은, 외계인들의 치구 침략 이야기를 읽고 싶으시다면, 바로 우리가 생활하는 대한민국 부천시에서 벌어지는 외계 전쟁을 한 번 지켜보십시오. 어쩌면 우리 주위에도 외계인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이런 설정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숨겨져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비일상적인 일들이 만연해 있다고 암시하는 듯한 작품들 말이죠.
 대리전에서 듀나는 기존의 단편들과 달리 중편이라는 꽤 긴 분량을 다행히 무리없게 소화한듯 보였습니다. 문체는 차분하고 냉담했습니다. 듀나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상황을 차분히 인식하는 요소가 보였습니다. 감정적인 부분이 중시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런 담담한 느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역시 누군가 지적했듯이 동성애 코드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약간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계속 동성애가 아니었으면 어떠할까, 라고 자문해보았는데, 그러면 조금 통속적이 되고 글의 신선한 맛이 떨어지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근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를 다루고 있으면서 당연하게 동성애 코드가 나오는 게 어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까지도 그저 차분하고 냉담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는 듯도 보였습니다. 아무튼 클리셰를 쓰면서도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고 다른 방식으로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단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읽으면서 저도 이런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 앤시블 방식의 정신 제어를 통한 이야기를 써본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1page 소설 쓰기의 일환으로 썼던 글이었는데, 전 반대로 인간들이 외계인을 정복하려고 하고 - 고의는 아니었습니다만 - 그로 인해 외계인에게 멸망 당한다는 짧은 단편이었죠. 이 다음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에서 발행하는 월간 웹진 '크로스로드'에 실린 이영도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라는 SF단편을 읽었는데 여기서도 앤시블이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이 크로스로드에 듀나의 대리전이 실렸었지만, 전 읽지 않았었고, 책으로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이 웹진에 가보시면, 복거일 씨의 SF단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리전>에는 양이 많은 중편 "대리전"이 실려 있기 때문인지 나머지 단편은 3개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토끼굴>입니다. 제목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실제 작품 내용의 모티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지금까지 앨리스의 이미지를 갖고 다섯 편의 작품을 썼는데, 실제 활자화 된 것은 "토끼굴" 뿐이라고 했습니다. 좀 내용이 짧고, 추상적이고, 서사성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느낌을 주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왠지 모르게 다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네요.

 "어른들이 왔다"는 이전에 HappySF 무크지 1호에서 읽었던 단편입니다. 그때도 인상깊게 읽긴 했지만, 새롭게 봐도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은 "외계인이 미개한 종족에게 가서 신 행세를 한다"라는 클리셰를 쓴 작품이라지요. 이 클리셰 역시 클리셰라 그럴까요? 재미있습니다. 분량이 길지도 않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넓은 우주에 인간은 작은 존재라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 역시 좋고요. 무크지에 실렸던 것과는 끝 부분 등이 좀 달라졌다고 하는데, 나중에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바뀐 게 더 나은 것 같기는 합니다.

 "술래잡기"는 좀 특이한 단편이었습니다. 작가 후기에서도 원래 다른 매체에 사용될 시나리오였으나, 의뢰자가 포기하여 단편으로 고쳐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약간 좀 덜 고쳐졌거나, 제대로 매체 변환이 안 되었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게 좀 아쉽더군요. 완벽히 하나의 완결된 구성을 갖춘 단편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삐그덕 대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전이나 그런 것이 약하고, 좀 힘이 약하다고 할까요. 마지막에 느슨해지는 부분이 절정을 향해 치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결말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의 순위를 내보자면, 우선 중편인 "대리전"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어른들이 왔다"가 좋았습니다. 이전에 읽었다는 점만 아쉬웠고요. 그 다음에 "토끼굴"이고 그 다음에 "술래잡기"입니다. 사실 "토끼굴"이나 "술래잡기"나 크게 임팩트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듀나. 예전에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심사평에서도 누군가 듀나의 글을 가지고 평론을 쓴 게 심사평에 언급되어서 인상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팬이 많은 작가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영화 평론 쪽으로는 역시 듀나의 영화낙서판(http://djuna.nkino.com/movies/)을 운영하기도 하고, 영화 칼럼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를 내기도 했으니 꽤 많이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대리전이 나오자, 듀나가 SF작가 였어, 라고 놀라는 사람도 보이더군요. 어쨌든, 문단에서도 인정받는 존재이면서, 국내SF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작가이면서, 영화 쪽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SF단편도 꾸준히 발표하는 듀나의 모습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는 글을 선보일 수 있는 작가인듯 해서 기대가 크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갑자기 문학상을 타거나, 해외에 번역되거나, 또는 전혀 다른 장르의 글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언론에서 듀나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밝히려 하지만, 전 그냥 지금 이대로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얼굴 없는 작가도 있는 이런 다양성을 좋아하거든요. 문학상을 타도 상금은 온라인으로 붙여달라는 듀나의 개성이 좋습니다.
국내 유일 온라인 청소년 전용 문학관 글틴에 듀나가 발표한 단편이 있습니다. 혹시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가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울너머로 건너가다>라는 단편입니다. 대리전에 실린 단편들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비터젠의 유령
김이환 지음 / 북하우스 / 200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비터젠의 유령』은 통신이나 인터넷에서 연재할 당시에 많이 보았던 글이다. 그러나 실제 클릭해서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소설> 등의 제목이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막상 출판된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 권짜리 책이라는 점이다. 아직 수입원이 전무한 나로서는 책 구입은 정말 소장 가치가 뛰어난 책이 아닌 이상은 섣불리 사지 않는다. 일반 장편 팬터지 소설을 구입하지 못하는 이유도 주로 이와 같다. 그러나 이 소설은 놀랍게도 1권 짜리 소설이다. 이영도 단편집 말고 이런 1권 짜리 책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둘째, 장르 팬터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점은 상관이 없다. 장르 팬터지였어도 샀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팬터지 문학상에 응모하기도 하고, 실제 통신, 하이텔 시리얼란이나 팬터지 문학상에 응모했던 이 글이 일반적인 장르 팬터지가 아닌, 다른 종류의 글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과연 어떤 방식으로 글이 쓰여졌고, 어떤 환상을 다루었는지 알고 싶었다. 셋째, 출판사에서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랐던 것은, 그 동안 한국판타지문학상 수상작 전 권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구입했지만, 결과는 『리무』밖에 받지 못했다.

  아무튼 작년에 구입해 놓고 여태까지 읽지 않았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한 권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읽으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야 읽게 된 것이다. 예전부터 잠깐 잠깐 펴 볼 때는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마음 먹고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곧 엄청난 흡인력에 빠져버렸다. 소설 내용에 대해 별다른 지식 없이 읽었기 때문에 추리를 해가면서 읽다 보니 재미가 더욱 배가 되었다. 우선 이 소설은 처음부터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장르 팬터지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흡인력도 적고 재미도 적을 거라 생각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게임CD를 발견한 소년이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장에서 나오는 인물들과는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등등이 궁금해졌다. 이는 독특한 구성이 한 몫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각 장마다 전혀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한 장은 순차적인 시간 흐름이지만, 다른 장은 우선 긴박한 사건이 발생하고 역순으로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지 회고해 나간다. 이런 구성은 독자를 더욱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인물들은 그리 많은 매력을 느낄 수는 없었다. 처음에 등장하는 소년도 평면적인 인물이고, 주인공 격인 스캇 리치 역시 그다지 다양한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캐릭터가 가지는 힘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구성이나 독특한 환상 소재 등에 기대어 있다. 그 점은 어쩔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캐릭터들은 기억을 잃거나 이성을 잃는 상황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감정 이입이 힘들고, 캐릭터의 성격도 일관성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환상과 현실의 붕괴, 게임과 현실, 유령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점 등이었다. 특히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에비터젠의 유령>이라는 소설 제목과 동일한 소설 속 책이었다. 이 책은 이 소설의 핵심 소재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미하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특히 소년이 <에비터젠의 유령>을 읽는 부분은 특히 『끝없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또, 소설 『링』에서도 『링2』에서는 소설 안에 현실의 책이 등장하는데, 이런 묘한 느낌을 이 소설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의 작가는 당시 로비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역시 『에비터젠의 유령』작가로 로비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의 현실과 소설의 현실까지 붕괴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굉장히 자극적이고 독특핸 재미를 주는 부분이었다. 이 소설의 강점은 이런 독특한 구성, 독특한 전개 방식, 소재 사용에 있지 않은가 싶었다.(작가가 소설 안에 등장한다는 점은 예전에 읽었던 팬터지 소설『탐그루』의 후기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때도 묘한 느낌을 받았었다.)

  작가 후기를 보면 이 소설은 제대로 된 설정이나 구성을 가지고 쓰여진 것이 아니라, <모호함>을 다루려고 썼다고 한다. 여러 가지 판본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필자는 이것 밖에 읽지 못했으므로 비교는 할 수 없다. 다만, 그 중 최선의 작품이라는 이 출판본에 관해서는 장점도 많았지만, 역시 아쉬운 점도 있었다. 초반에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독자와 추리 게임을 벌이며 이야기는 숨가쁘게 전개되고 어느 정도 재미를 주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서는 급속도로 힘을 잃어가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김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이야기가 모호해지기 때문일까? 명확한 엔딩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후반부는 그토록 뿌연 안개가 깔리듯이 영화 <스피어스>처럼 환상이 덧붙여지고 이야기가 끝맺음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독자는 후반부에 들어가서 궁금한 것들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힘이 빠지게 된다. 그건 기대가 컷던 탓일 수도 있다. 그 동안 엄청난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장황하게 벌여놓은 일들이 후반부에 와서는 약간은 복잡한 구성과 함께 툭툭 작가는 한 번에 몰아놓듯이 뱉어놓고 있는데, 이것이 어떠한 충격이나 대단한 인상을 주기 보다는, 그냥 이렇게 된 거였구나, 이런 거구나, 라는 단순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그래서 앞에서 느꼈던 재미나 흥분감이 금세 식어버리고, 아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작가 후기처럼 모호한 것을 표현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후반부에 좀더 힘을 실어서 독자의 허탈감을 줄게 만들 수 있었다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인상적인 소설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에비터젠의 유령』은 그냥 <김이환 장편소설>이라고 출판되었다. 예전에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이 소설을 장르 팬터지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일반 순수문학과도 다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환상은 굉장히 진취적인 느낌이다. 요즘 세대들이 경험할 수 있는 문화들이 곳곳에서 엿보이고, 이를 글쓰는 이의 욕망, 창조에 관한 것, 모호함, 환상 등을 결합시켜서 글을 썼다. 깔끔한 문장으로 이야기를 잘 전달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어디선가 아마츄어틱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좋은 글이고 재미있지만, 또 생각할 거리도 주지만, 2% 부족한 듯한 느낌? 그러나 이 작가의 글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현재는 콜린이라는 닉네임으로 인터넷 상에 <양말 줍는 소년>이라는 글을 연재하고 있다. 이 소설은 또 『에비터젠의 유령』과는 다른 종류의 글이다. 통신, 인터넷 연재 소설의 강점은 일반 순수문학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로운 상상력, 신선한 글쓰기가 아닐까? 그 중 다른 작가들과 비교해서도 새로운 영역의 개척을 가장 잘 하고 있는 작가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도 꾸준히 지금까지 독자들이 읽지 못했던 새로운 형식의 글들을 쓸 것이라고 기대가 되는 작가이다. 이런 한국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한 권이라 부담도 없고, 충분한 재미를 가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블브리드 9
나카무라 에리카 지음, 김영종 옮김, 타케히토 그림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더블 브리드. - 슬프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야기

  처음 더블 브리드를 접했을 때는 무심코 단정짓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또 뻔한 이야기겠지. 아야카시라는 존재? 그냥 뱀파이어나 요괴 같은 걸 다르게 부르는 것 뿐 아닌가? 주인공이 혼혈? 이것 역시 너무 흔한 설정 아닌가. 사실 주인공은 특별해야 하므로 혼혈이 많이 사용되지 않던가. 혼혈은 우성인자만 유전되어 뛰어난 존재로 묘사되는 건 흔하잖아.
  더블 브리드와 인간의 만남. 그것도 여자와 남자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또, 같이 싸우고 서로를 아끼는 존재가 되겠지, 라고 단순히 지레 짐작.
  또 동료 아야카시 등이 나오면서 적을 격파하는 단순한 이야기를 상상.
  가볍고 밝고 재미있는 라이트 노벨이라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더블 브리드는 처음부터 핏빛 이야기로 가득했다. 맞고 터지고 베이고 뜯기고.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외관상 어린 소녀로 보이는 주인공 유우키가 얼마나 상처를 입어야 했던가.
  이야기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불행해지다가 마침내 파탄의 길로 접어든다.
  실로 이런 소설을 쉽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토록 우울하고 처량한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줄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자는, 흉힌이 되어
  의지도 잃고 오로지 아야카시를 죽이는 존재로 거듭났다. 그 또한 죽음 밖에 남지 않은,
  허무한 존재.
  이야기는 파멸로 치닫고 있었다.
  그 속에는 결국 누구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서로를 상처입히게 될 것이라는 진실이 숨어 있었다.
  현실이 결코 낭만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토라지와 안도의 이야기는 희망을 준다. 그 둘은 너무나 밝은 아이들이다.
  그렇다. 아이. 아직 순수하고 때묻지 않았기 때문에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다.
  비극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섰다.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을까?
  우리 곁에 사람들도 모두 평범하지 않다. 세상에 평범한 사람이란 없다. 우린 모두 인간 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는 아야카시들이다. 때론 방관자들이다. 때론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서 증오만을 불태운다. 우린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공존하지 못한 채, 죽어갈 뿐이다.
  흉인과 더블 브리드. 둘은 오묘한 존재들이다. 둘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들이다.
  그렇다. 어쩌면 그 둘만이 세상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서로에게 평안을 주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평안이 존재의 소멸, 완전한 죽음일지라도.
  흉인이 더블브리드 내에 자리잡고 있는 사악한 존재만을 없애고 흉인에게도 오니기리가
사라지면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행복한 결말보다도, 둘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되, 세상을 벗어날지도.
  즉, 어쩌면 둘운 세상에서 오로지 둘 만이 완전한 이해를 얻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은 하나가 되어, 진정한 행복을 느낀 채, 안식을 얻는 결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구도 그 둘을 기억하지 못한 채, 잊어갈지도.

  더블 브리드. 라는 라이트 노벨은 우선 독특하다. 이처럼 처절하게 진행되어가는 라이트 노벨은 보기 힘들다. 주인공들이 좌절만하고, 마침내 곧 죽을 테니까, 어차피 죽을 테니까, 서로에게 죽는게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지경까지 치열하게 모는 작가가 놀랍기 까지 하다. 문장도 잘 쓰여져서 글에 몰입할 수 있다. 대화가 많이 나오는 부분도 있고, 유머스러운 부분도 들어 있지만, 대화보다는 서술과 감정의 묘사가 치밀하다. 작가의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독자로서 더욱 마음에 든다. 소장 가치가 훌륭히 있기도 하고. 이런 처절한 이야기를 냉정하게 무섭도록 차갑게 차분히 단정하게 쓰고 있다. 담담한 문장들. 조금씩 독자를 압박해 간다.
  그리고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유니크한 점 때문에 계속 읽게 되는 책 같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끝을 보고 싶은 소설 중 하나이다.
  비극.
  아름다운 비극이 될지, 슬픈 비극이 될지, 우수은 비극이 될지.
  희극만 난무하는 라이트 노벨 중에서 이런 비극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겠지.
  그리고 힘든 세상, 사는 것도 힘든데, 책 속에서도 힘든 이야기냐, 할 수도 있겠지만.
  슬픈 일이 있을 대,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울음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끽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처럼. 감정을 시원한게 정화시켜주고, 아련한 느낌을 전해 줄, 그런 끝맺음을 기대한다. 그러나 2년 6개월 동안 일본에서도 10권은 나오지 않았기에 걱정이 된다. 그들의 결말을  언젠가 읽게 될까? 가슴 깊이 오래 남을 수 있는 소설이 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