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전 - 환상문학 시리즈
이영수(듀나) 지음, 김수진 그림 / 이가서 / 2006년 1월
평점 :
품절


 대리전. 복거일 씨를 제외한 국내 유일의 SF작가라고 할 수 있는 듀나의 작품입니다. 제가 국내 작가 중에서 이름만 보고 당장 구입하는 작가는 현재는 몇 없습니다. 아직 독서량이 많지 않아서겠지요. 이영도, 듀나, 박민규, 전민희, 이우혁 등입니다. 이중 Happysf 사이트에서 듀나의 신간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바로 코엑스에 있는 반디앤루니스로 달려갔습니다만, 그 날은 다 나가서 없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에 테크노마트의 프라임 문고에서 구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듀나는 흔히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다시피한 작가가 아닐까요? 게다가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고, 문단에 인정을 받아서 문학과 경계나 문학과 사회 같은 문예지에도 글을 실었습니다. 이전에 나온 <태평양 횡단 특급> 등은 문학과 지성사 같은 순수문학 출판사에서 출판이 되었지요. 순수문학을 쓰는 작가도 아니고 장르문학, SF를 쓰는 작가가 문단에 인정을 받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SF 단편집임에도 불구하고 동인문학상 심사까지 올랐죠.

 대리전을 처음 봤을 때 받은 인상은 우선, 그 판형이 특이했습니다. 보통 신국판보다 작은 판형에 양장본으로 만들어졌더군요. 개인적으로 양장본 보다는 일반 페이퍼백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안에 실린 단편 수는 <태평양 횡단 특급> 보다는 적었습니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점이 확실히 있었죠. 그것은 바로 듀나 최초의 중편이 실렸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단편만을 발표해왔던 듀나의 중편을 볼 수 있다는 마음에 그날 밤새 "대리전"을 읽게 되었습니다.

 대리전은 "호전적인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소재로 한 이야기입니다. 듀나 글쓰기의 특징 중 하나는 기존 클리셰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 중 첫번째에 위치한 호전적인 외계인의 치구 침략 이야기는 역시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클레멘트 문제라고 하는, 과학 기술력의 차이와 지구 침략 이유 등을 나름대로 잘 그려냈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 등을 가져온 것을 스스로 반칙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저는 괜찮았습니다. <태평양 횡단 특급>에서는 SF보다는 환상문학에 어울릴 만한 환상적인 단편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환상문학을 좋아하기 때문에 신비한 것이 나온 점에서 어떤 과학적인 내용으로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돌아와서, 클리셰들을 정복해 나가는 듀나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이미 쓰여졌고,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진부한 패턴을 다시 활용해서 그것을 새롭게 써내려간다는 것은 대단한 자신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독자들이 열광하고 인상적이었던 멋진 상황이나 소재이기 때문에 클리셰가 되었을 테니, 그런 클리셰를 다룬 작품 역시 일정 재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점도 좋아하고요. 제가 매트릭스를 좋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것입니다. 물론 매트릭스는 기존에 일본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받았고, 그 이전에도 그런 AI가 인간들을 가상현실 속에서 가둔다는 설정은 이전에도 많았기 때문에 매트릭스는 그것을 조합해서 만든 작품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기존의 것들에 어떤 기본이 되는 완성미 있는 작품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대리전은 우스꽝스럽습니다. 외계인들이 뱃살 나온 중년의 아저씨나 아줌마들의 의식을 조정해서 자전거로 추격전을 벌이고, 운동장에서 물어뜯는 혈전을 벌이는 장면은 정말 유쾌합니다. 영화로 만들어져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련한 향수 같은, 외계인들의 치구 침략 이야기를 읽고 싶으시다면, 바로 우리가 생활하는 대한민국 부천시에서 벌어지는 외계 전쟁을 한 번 지켜보십시오. 어쩌면 우리 주위에도 외계인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이런 설정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우리 일상에서도 숨겨져 있을 뿐이지, 실제로는 비일상적인 일들이 만연해 있다고 암시하는 듯한 작품들 말이죠.
 대리전에서 듀나는 기존의 단편들과 달리 중편이라는 꽤 긴 분량을 다행히 무리없게 소화한듯 보였습니다. 문체는 차분하고 냉담했습니다. 듀나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 상황을 차분히 인식하는 요소가 보였습니다. 감정적인 부분이 중시되지 않는다고 할까요. 그런 담담한 느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고요. 그러나 역시 누군가 지적했듯이 동성애 코드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약간 당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읽으면서 계속 동성애가 아니었으면 어떠할까, 라고 자문해보았는데, 그러면 조금 통속적이 되고 글의 신선한 맛이 떨어지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시대가 근미래도 아닌 지금 현재를 다루고 있으면서 당연하게 동성애 코드가 나오는 게 어색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까지도 그저 차분하고 냉담한 시선으로 그리고 있는 듯도 보였습니다. 아무튼 클리셰를 쓰면서도 기존의 것에서 탈피하고 다른 방식으로 독자가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작가의 노력이 보이는 단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읽으면서 저도 이런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 앤시블 방식의 정신 제어를 통한 이야기를 써본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1page 소설 쓰기의 일환으로 썼던 글이었는데, 전 반대로 인간들이 외계인을 정복하려고 하고 - 고의는 아니었습니다만 - 그로 인해 외계인에게 멸망 당한다는 짧은 단편이었죠. 이 다음에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에서 발행하는 월간 웹진 '크로스로드'에 실린 이영도의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라는 SF단편을 읽었는데 여기서도 앤시블이 나와서 재미있었습니다.(이 크로스로드에 듀나의 대리전이 실렸었지만, 전 읽지 않았었고, 책으로 먼저 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이 웹진에 가보시면, 복거일 씨의 SF단편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대리전>에는 양이 많은 중편 "대리전"이 실려 있기 때문인지 나머지 단편은 3개 밖에 없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토끼굴>입니다. 제목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실제 작품 내용의 모티브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고요.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지금까지 앨리스의 이미지를 갖고 다섯 편의 작품을 썼는데, 실제 활자화 된 것은 "토끼굴" 뿐이라고 했습니다. 좀 내용이 짧고, 추상적이고, 서사성이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느낌을 주는 단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왠지 모르게 다 채워지지 않은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네요.

 "어른들이 왔다"는 이전에 HappySF 무크지 1호에서 읽었던 단편입니다. 그때도 인상깊게 읽긴 했지만, 새롭게 봐도 재미있습니다. 이 작품은 "외계인이 미개한 종족에게 가서 신 행세를 한다"라는 클리셰를 쓴 작품이라지요. 이 클리셰 역시 클리셰라 그럴까요? 재미있습니다. 분량이 길지도 않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넓은 우주에 인간은 작은 존재라는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는 것 역시 좋고요. 무크지에 실렸던 것과는 끝 부분 등이 좀 달라졌다고 하는데, 나중에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바뀐 게 더 나은 것 같기는 합니다.

 "술래잡기"는 좀 특이한 단편이었습니다. 작가 후기에서도 원래 다른 매체에 사용될 시나리오였으나, 의뢰자가 포기하여 단편으로 고쳐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독특한 느낌을 줍니다. 약간 좀 덜 고쳐졌거나, 제대로 매체 변환이 안 되었거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남아있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게 좀 아쉽더군요. 완벽히 하나의 완결된 구성을 갖춘 단편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삐그덕 대는 느낌이 있습니다. 반전이나 그런 것이 약하고, 좀 힘이 약하다고 할까요. 마지막에 느슨해지는 부분이 절정을 향해 치닫지 못하고, 엉뚱하게 결말을 맞이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들의 순위를 내보자면, 우선 중편인 "대리전"이 가장 좋았습니다. 그 다음에 "어른들이 왔다"가 좋았습니다. 이전에 읽었다는 점만 아쉬웠고요. 그 다음에 "토끼굴"이고 그 다음에 "술래잡기"입니다. 사실 "토끼굴"이나 "술래잡기"나 크게 임팩트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듀나. 예전에 대산대학문학상 평론 심사평에서도 누군가 듀나의 글을 가지고 평론을 쓴 게 심사평에 언급되어서 인상적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팬이 많은 작가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영화 평론 쪽으로는 역시 듀나의 영화낙서판(http://djuna.nkino.com/movies/)을 운영하기도 하고, 영화 칼럼집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를 내기도 했으니 꽤 많이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대리전이 나오자, 듀나가 SF작가 였어, 라고 놀라는 사람도 보이더군요. 어쨌든, 문단에서도 인정받는 존재이면서, 국내SF에서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작가이면서, 영화 쪽에서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고, SF단편도 꾸준히 발표하는 듀나의 모습이 좋습니다. 앞으로도 더욱 발전하는 글을 선보일 수 있는 작가인듯 해서 기대가 크기도 하고요. 언젠가는 갑자기 문학상을 타거나, 해외에 번역되거나, 또는 전혀 다른 장르의 글을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요? 많은 언론에서 듀나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밝히려 하지만, 전 그냥 지금 이대로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얼굴 없는 작가도 있는 이런 다양성을 좋아하거든요. 문학상을 타도 상금은 온라인으로 붙여달라는 듀나의 개성이 좋습니다.
국내 유일 온라인 청소년 전용 문학관 글틴에 듀나가 발표한 단편이 있습니다. 혹시 안 보신 분이 있다면 가서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거울너머로 건너가다>라는 단편입니다. 대리전에 실린 단편들보다도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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