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영웅, 고 정은임 아나운서.

추억

2007/03/18 22:53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오프닝 멘트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신대철 시인은 이미 20년 전에 이 땅에서 사는 것은 무죄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그의 시에서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요즘 이 땅 어느곳에서는 그것이 유죄라고 합니다.

저희 청취자 한 분이 그 심정을 노래하셨네요.

들어보시겠어요?

 

시를 쓰고 싶은 날, 비 내리는 철거촌에서 전 수편의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제대로 된 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형적인 도시 빈민이었던 우리 집은 막내인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수차례 이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대학생이 된 제가 어느 날 간 철거민 대회에 많은 동네 분들이 오셨더랬습니다.

금호동, 전농동, 봉천동.

하나같이 제가 식구들의 입을 통해 듣던 추억의 동네였습니다.

그 금호동 폐허의 마을에서, 더 이상 끝닿을 데 없는 하늘 밑 마을에서, 제 오빠들의 유년을 보았습니다.

쓸려져 나간 꿈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힘없는 강아지가, 높게 쌓여진 철탑이, 타이어로 엉성하게 버티고 있는 그들의 바리케이트가,

때맞춰 내리는 비가, 무섭게 몰아치는 바람이, 유린당한 그들의 삶이 저에게 시를 쓰고 싶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를 쓸 수 없는 날 전 차라리 싸우고 싶습니다.

 

신청하신 곡은 영화 <파업전야> 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오늘 첫 곡이었습니다.

 

천리안으로 어느 분이 이런 글을 올리셨네요.

요즘은 신문에 읽을 거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어요.

국내 뿐 아니라 세계가 온통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정말 슬퍼요.

 

하지만 우리 늦기 전에 시작합시다.

한방울의 물이 모여서 거대한 폭포가 이루듯

우리 한 사람의 힘이 점점 파문을 일으키면 뭔가가 변화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오프닝 멘트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그 만남이 첫 만남이 아닙니다.

그 이별이 첫 이별이 아니고요.

마당 한 모퉁이에 꽃씨를 뿌립니다.

꽃 피는 날에서 꽃 지는 날까지

마음은 머리 풀어 헤치고 떠다닐 테지요.

그대만이 떠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꽃 지는 날만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요.

그대의 뒷모습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날이 새로 잎 피는 길을 갑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광본 시인의 시 중에서 한 구절로 오늘 시작했는데요.

꽃 피는 날 그대와 만났습니다. 꽃 지는 날 그대와 헤어졌고요.

시구는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반대네요.

제가 92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했으니까 꽃 지는 날 그대와 만났고요.

이제 봄이니까 꽃 피는 날 헤어지는 셈이 되었네요.

오늘 여러분과 만나는 마지막 날인데요.

 

 


1995년 4월 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클로징 멘트

 

이제 마지막 인사를 정말 드려야겠네요.

이 FM 영화음악은 제가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서 처음으로 맡은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그러니까 정식으로, 그 전에 TV를 임시로 맡은 것도 있었지만

정식으로 맡은 것은 라디오 프로그램 FM 영화음악이 처음이었어요.

그 때가 1992년 11월 2일이었는데

덜덜 떨면서 첫 방송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

 

그래서 뭔가 특별한 날,

아침 햇살이 남다르게 느껴질 때라든지, 아주 예쁜 꽃을 봤을 때, 낮에 길거리에서 특별한 광경을 봤을 때,

 책에서 멋진 글을 발견했을 때, 그럴 때 제일 먼저 생각난 것은 바로 이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밤엔 꼭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 굉장히 가슴 두근거리면서 그런 생각을 했었고

또 어떨 때는 마이크 앞에서 막 숨막힐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들었었어요

그래서 문득 이거 꼭 사랑에 빠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

 

방송하는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이 바로 이것 같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

2년 반 동안 참 많은 분들을 만났구요.

소중한 인연을 맺은 것 같습니다.

 

......

 

저 정은임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우리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중에서 김창완씨의 노래,

'마지막 인사'로 제 마지막 인사를 대신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3년 10월 21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복귀 첫 방송 오프닝 멘트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만차"

어떠세요?

이런 문구를 보면요.

어쩐지 뒤로 물러나고 싶지 않으세요?

이런 것보다 더 강하게 사람을 밀어내는 게 하지만 있습니다.

바로 분위기죠.

 

누구나 아무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게 큰 길 가에 커다란 문을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화려한 백화점이나 호텔, 갤러리의 입구는 어쩐지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그런 곳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분위기 자체가 출입금지 푯말이죠.

 

하지만요, 골목 안 어느 곳엔가 숨어있어서 간판도 잘 안보이고 입구가 어딘지도 잘 모르겠고

그런 작은 칼국수집, 선술집에는 언제나, 누구나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습니다.

 

새벽 3시에요.

아직은 어둡고 쌀쌀하죠.

이 가을 골목길 누구나 쭈뼛거리지 않고 들어올 수 있는 작지만 아주 편안한 문 열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조그맣지만 따뜻한 간판 등도 켜놓고 있겠습니다.

 

 

 

2004년 4월 26일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마지막 방송 오프닝 멘트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 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 말로, '여는 시'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입니다.

단 한 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을 듣고 있는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래니 크래비츠, 'It Ain"t Over "Til It"s Over'


************************************************************


정은임
아나운서를 알게 된 건 우연하게도 1995년 4월 1일 새벽, 정영음 마지막 방송을 통해서였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밤 늦게까지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노래를 듣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 땐 그저 '이렇게 목소리 좋은 DJ의 방송을 이제야 알게 되었는데 막방이라니..'라는 안타까운 생각 뿐이었다.

 

그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들.

방송을 통해 4.3 제주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멘트를 내보낸 DJ.

볼셰비키가 부르던 ‘인터내셔널가’와 시위현장에서나 부르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영화음악이라고 틀어주던 DJ.

MBC가 방송민주화를 내걸고 한창 파업 중이던 1992년,

입사 동기 중 유일하게 방송사 간부의 요구를 거절하고 파업에 참여한 '강성' 노동자.

그게 바로 정은임 아나운서였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영음>에서 물러나게 되었을 때 팬들은 정은임 복귀 추진 위원회를 결성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지금은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로선 꽤나 신선한 것이었다.
그 때 당시 정은임 아나운서를 향한 팬들의 그리움은 정은임이라는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갈망이었던 것 같다.

단 한 번 방송을 들었을 뿐이었던 나조차도 다시 한 번 방송을 통해 <정영음>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으니

자칭타칭 <정영음 마니아>임을 자처하던 <정영음>의 팬들은 오죽했으랴.

 

정은임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놓고 배유정씨가 진행하는 영화음악을 들으면서

영화, 그리고 영화음악에 한참 몰입했던 기억이 있다.

내게 영화, 영화음악은 공부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일종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그렇게 라디오를 들으면서 영화에 대한 잡다한 지식을 쌓아가며 즐거워했지만, 한편으론 뭔가 아쉬웠다.

단 한 번이었지만, 마지막 방송 때 들었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영화 이야기를 전해듣고 싶었던 것이다.

나름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 시절이어서였을까?

마지막 방송에서 흐느낌을 참아가며 겨우겨우 마지막 멘트를 이어가던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잊기가 참으로 어려웠던 것 같다.

 

하지만 우습게도 정작 2003년에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바라던대로

정은임 아나운서가 <정영음>에 복귀했지만

라디오와 멀어져 버려 복귀 후에 제대로 방송을 청취하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새벽 늦은 시간까지 깨어 라디오를 챙겨듣기엔 내 열정이 너무나 부족한 시기였으니까... 

 

어느덧 전설이 되어버린 '정은임의 영화음악'

비록 일순간이었지만 동시대에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갑작스런 사고로 정은임 아나운서가 우리 곁을 떠나가버린 지금,
더 이상 정은임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만은 참 안타깝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의 목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5-24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인득 아나운서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을 듣고나니 문득 정은임 아나운서가 생각이 나서 어느분의 블로그에서 퍼 왔다...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신자유주의와 FTA체결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요즘, '우리편' 정은임 아나운서의 지지와 연대가, 그리고 격려가 너무 그립다. mbc는 참 아나운서 복이 없다는 생각도...

Mephistopheles 2007-05-24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분 가족들이 도로공사를 상대로 재판을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도로보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일어난 사고인데....
단지 과속으로 달렸다는 이유로 법원은 도로공사쪽 손을 들어줬죠..
남겨진 남편분은 이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이민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07-05-24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니 2007-05-2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귀하고 나서 방송 시간이 2시~4시까지 였을 겁니다. 무협지 읽으며 꿰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인터네셔널가( mms://mms.plsong.com/plsong/Special/International/09.wma)

1,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온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 세계를 펼칠 때
어떠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 못해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2,
어떠한 높으신 양반 고귀한 이념도
허공에 매인 십자가도 우릴 구원 못하네
우리 것을 되찾는 것은 강철 같은 우리의 손
노예의 쇠사슬을 끊어 내고 해방으로 나가자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3,
억세고 못 박혀 굳은 두 손 우리의 무기다
나약한 노예의 근성 모두 쓸어 버리자
무너진 폐허의 땅에 평등의 꽃 피울 때
우리의 붉은 새 태양은 지평선에 떠 온다

들어라 최후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인터내셔널 깃발아래 전진 또 전진
 

[김용운]故 송인득 아나운서가 후배에게 남긴 것
2007년 05월 23일 오후 14:28
김용운기자 woon@joynews24.com

23일 새벽 MBC 송인득 아나운서가 향년 49세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사인은 간경화에 따른 위정맥류 파열이었다.

1981년 MBC에 입사한 송인득 아나운서는 특히 스포츠 중계로 일가를 이룬 아나운서로 유명하다.

시청자들은 송인득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투구에 환호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우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월드컵의 아쉬움과 영광의 순간을 송인득 아나운서와 함께 했다.

송 아나운서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송 아나운서의 부고 기사마다 수백 수천개 댓글이 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다른 길로 외도 없이 20여 년 간 아나운서 외길을 걸어온 고인의 삶이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근 각 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를 연예프로그램에 전진 배치해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를 종용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 몇 몇은 거액의 전속금을 받고 방송국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운서가 연예인이냐고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늘었고 그들의 변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시청자들도 늘었다.

결국 아나운서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 세미나를 여는 상황까지 왔다. 송 아나운서가 별세하기 하루 전인 22일 오후 아나운서연합회는 '아나운서, 그는 누구인가'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서 '아나운서 프리랜서 경향과 대안모색'이란 주제로 발제를 맡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김현주 교수는 "최근 몇 몇 아나운서가 재벌가와 결혼한다거나 고액의 계약금을 받고 연예기획사로 자리를 옮기는 현상을 보고 아나운서에 대한 시청자들의 시선이 선망에서 질시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KBS의 강성곤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는 언론인이다"며 "후배들 가운데 이런 모습과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전규찬 교수는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이면서 동시에 연예인이자 스타이면서 교수이기도 한 분열적 다중인격체"라며 "현실적으로 변화된 아나운서들의 활동형태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논의를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송인득 아나운서의 부고와 아나운서 정체성 모색 세미나를 겪으며 '아나운서는 누구인가'는 질문이 기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아나운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 없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교수의 말처럼 모든 것이 해체되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직종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는 현실인 까닭이다.

23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송인득 아나운서는 요즘 말하는 '스타아나운서'는 아니었다. 그는 20여 년간 묵묵히 스포츠 현장에서 아나운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스포츠 중계라는 자신의 전문영역을 개척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국 송인득 아나운서는 국내 처음으로 스포츠 전문아나운서라는 명함을 가지게 됐다. 시청자를 염두에 두고 아나운서 한 길을 걸어온 덕분이다.

송 아나운서는 생전 MBC 아나운서 커뮤니티 언사운사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에 스포츠 중계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얼굴이 되고 주목을 받는 것과 스포츠 캐스터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송 아나운서 역시 입사 초기 인기를 얻고, 돋보이고 싶은 신입 아나운서 중 하나였지만 이내 자신의 길을 정하고 그 길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송인득 아나운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방송이 아무리 달라져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한 길을 걸어온 ‘스타가 아닌’ 아나운서를 시청자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변화된 방송환경에서 아나운서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새롭게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나운서들이 먼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시청자를 향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 아닐까?

삼가 송 아나운서의 명복을 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5-2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야구 캐스터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분이었는데...너무 마음이 아프다...스포츠 중계란 것이 2-3시간씩 하는 생방송이기 때문에 간혹 말실수도 나올 수 있는데 송 아나운서는 그런 실수가 거의 없었고, 냉정함과 감성을 적절히 배치해서 참 맛깔나게 방송을 했었다고 생각한다...50살도 안된 나이에 가시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홍수맘 2007-05-2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놀라고 마음이 아팠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재소녀'의 시는 수업 시간에 쓰여졌다
[인터뷰] '그날'의 정민경씨 "난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
홍성식 기자
▲ '그날'을 쓴 경기여고 정민경씨.
ⓒ 광주일보 안현주 제공

백준(song2100)
어린아이의 글을 읽고 눈물이 나네. 젊은 시절 5·18에 가슴 아려하며 눈물콧물 흘리던 시대정신을 이십여 년이나 잊고 살아왔는데. 어린 녀석이 삭아있던 내 양심의 찌꺼기를 들춰내며 눈물을 밀어내네. 눈물이 나네.
천지창조(earthnsky)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 그 때 원한이 살아 꿈틀대어 나에게 점점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오월 광주는 우리 역사 속에 길이 살아 남을 생명수입니다.
- <오마이뉴스> 독자의견 중에서.

유미자님 생각
훌륭한 작품이네요. 5·18 묘역의 수많은 이름 모를 님들의 '넋'을 다시 한번 위로해 드리고 싶네요.
아라봐님 생각
지금도 겁은 없어지지 않고, 때때로 삶 속에서 비겁한 나를 본다. 이제부터 자전거를 제대로 보기 어렵겠다.
scorpion rock님 생각
소름이 쫙 돋아오르는 이 느낌! 대체 얼마만에 제대로 된 감동을 주는 시를 만난 건지!
- <미디어다음> 독자의견 중에서.


5·18민중항쟁 기념 제3회 서울 청소년백일장 대상 수상작인 경기여고 3학년 정민경씨의 시 '그날'을 읽은 후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이다.

관련
기사
5월 광주, 열여덟 소녀 천재시인을 낳다

심사위원들로부터 "1980년 5월 광주 그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 '그날'.

열여덟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하는 빼어난 시적 형상화와 역사인식 수준이 기자 역시 놀라웠다.

그 놀라움은 시를 쓴 학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고, 그 호기심은 결국 정민경씨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빼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범상치 않은 소녀와의 만남에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3일 오후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민경씨는 '시 읽고, 시 쓰는 것을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 평범함 속에서 어떻게 그토록 비범한 시가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아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정민경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지난해 5월 18일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의 선배이자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 열사를 참배했다. 이들 학생들은 매년 윤 열사에게 종이학 1천마리를 접어 선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 시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인가?
"유치원 때부터 동시 읽는 걸 좋아했다.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글로 남기는 것도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땐 독후감을 써서 당선돼 상품권 20만원 어치를 받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하더라(웃음)."

- 특별히 영향받은 작가나 좋아하는 시인이 있는지.
"이상 시인의 시는 매력적이다. 이어령 선생의 책도 많이 읽었다. 하지만, 책 읽는 것 이상으로 음악도 좋아한다. 피아노와 첼로·기타 연주하는 걸 즐긴다."

- '5월 광주'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시적 형상화가 힘들지 않았나?
"일단 쓰기 시작하면 상상을 많이 한다. 그 상상으로 시의 뼈대에 살점을 붙인다. '그날'의 경우 첫 구절은 친척 어른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

- '그날'에서 보여지는 질박한 호남 사투리 구사에 놀라는 독자들이 많은데.
"1989년에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온 6살 때까지 광주에서 살았다. 유치원 시절까지를 광주에서 보낸 것이다. 게다가 나주에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그 분의 말투를 어릴 때부터 들어온 때문이 아닌가싶다."

"내 꿈? 소외받는 사람들 위해 무료 법률상담소 여는 것"

- 쓴 시를 보면 '5월 광주'와 '통일' 등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가?
"평소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오빠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턴 한국 현대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박노자의 책도 좋아하고…. <한겨레신문>도 매일 보긴 한다. 그런 것들이 종합돼 관심사가 그런 쪽으로 간 것 같다."

- '5월 광주' 때문에 고통받는 친척이 있는지. 또, 시인이나 소설가 친척이 있나?
"없다. 그림을 그리는 분은 있는데, 문학을 하는 친척은 안 계신다."

- 앞으론 뭘 하고 싶은가? 시인이 될 생각인지.
"현재로선 시는 취미에 가깝다. 법학이나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다. 내 꿈은 소외 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법률상담소를 여는 거다."

- 적지 않은 네티즌이 "대단한 시적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부끄럽다. 난 그저 시 읽고, 시 쓰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에 불과하다."

- '그날'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준다면.
"담임선생님이 ' 5·18 관련 백일장이 있다' 걸 조례 때 알려줬다.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수업 시간에 살짝살짝 몰래 썼다(웃음). 완성까지 40~50분쯤 걸린 것 같다."

- 광주 5·18묘역에는 가봤는지.
"아직 못 가봤다. 대학생이 되면 가보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항쟁의 피해자들을 만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들어보고 싶다."

- 시 쓰는 것 외에는 어떤 걸 좋아하나?
"록음악을 자주 듣는다. '자우림'의 김윤아가 좋다. 그의 앨범 모두를 가지고 있다. 악기 연주하는 것도 재밌다."

- 어려운 질문일 수 있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마음으로 느낀 것을 마음으로 전달하는 게 아닐까."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것... 감동 주는 시 만드는 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은 풀렸다. 정민경씨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3가지 조건, 즉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본다'는 불변의 대원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 오빠와의 토론과 부지런한 독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려는 노력까지.

'천재 소녀시인'을 만난다는 기대는 '비범함은 평범하고도 성실한 노력 속에서 태어난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실망스럽지 않다. 정민경씨가 그랬듯 다른 중고생들도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본다면 누구나 사람들을 감동시킬 빼어난 시를 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래, '통일'을 노래한 정민경씨의 또 다른 시 '니얄 봄'을 올린다. '그날'을 통해 선물 받은 눈물과 가슴 찡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앞날이 더 기대되는 한 소녀시인의 시 2편이 '감동하는 가슴'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의 감수성을 깨운다. 한없이 부드럽지만, 그 안에 역사가 남긴 상처와 교훈을 담고있는 5월 바람 같다.

▲ 2005년 8월.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이 이뤄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니얄 봄

큰마니 죽지마오.
니얄 봄 곱게 화장해
내 저 리북 보내줄테니
죽지마오.

내 저 가시난 쇠붙이 위 새에게 물어보았소.
-너는 어드메서 왔네.
-내레 큰마니 아들 뒷뜰에서 왔시오.
-울 큰마니 아들 잘 살고 있드나.
-그렇디요. 니얄 봄 큰마니 뵈러 온다 했수다.

내 저 약수 같은 강물에게 물어보았소.
-너는 어드메서 왔네.
-내레 큰마니 딸 앞뜰에서 왔시오.
-울 큰마니 딸 잘 살고 있드나.
-그렇디요. 니얄 봄 큰마니 뵈러 온다 했수다.

큰마니 죽지마오.
니얄 봄 곱게 화장해
내 저 리북 보내 줄테니
죽지마오.

2007-05-14 19:03
2007 OhmyNew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 날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올해 18세로 경기여고 정민경 양의 시라고 한다...정희승시인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비견되는 천재시인의 탄생이라고 흥분했다는데...과연 놀랍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법천자문 2007-05-11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고생이요? 진짜 후덜덜이네요, 우와...

고니 2007-05-14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평도 올려주삼
 

 

    

 

 

 

 

 

다시 봄이 왔다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루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

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

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灰層(석회층)

이 깊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