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남자 류택현, 이 선수가 사는 법
'새가슴'에서 '좌타자 전문 스페셜리스트'로
    이정래(golg94) 기자   
 

1994년을 앞두고 서울을 연고지 두고 있는 LG 트윈스와 OB 베어스는 각각 한양대의 유지현과 동국대의 류택현을 1차 지명 선수로 지명을 했다. LG가 지명한 유지현은 이종범의 뒤를 이를 재목으로 상당히 주목을 받던 내야수였고 두산이 지명한 류택현 역시 좌완 투수 기근에 시달리던 OB 마운드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 선수다.

바로 전 해 1차 지명자였던 이상훈에게 계약금만 1억 8800만원을 안겨준 LG가 어깨 부상 의혹 등을 이유로 유지현과 8000만원에 계약을 한 것이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같은 서울지역 1차 지명자 류택현의 계약금 4000만원은 기삿거리도 안됐을 만큼 그는 이른바 스타급 신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속 140㎞를 웃도는 직구,1m85cm, 80㎏의 당당한 체격에 좌완이라는 이점을 가진 류택현. 그러나 류택현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전지훈련에서는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경기에만 나가면 컨트롤이 흔들리며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워낙 담력이 약해 루상에 타자만 나가면 컨트롤이 잡히지 않았다. 류택현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새가슴' 투수였다.

결국 자연스럽게 선발 투수에서 밀려나 중간계투로 대부분의 시즌을 소화했고 승리를 따낼 기회도 그만큼 사라져갔다. 결국 프로 5년 동안 승리 없이 6패 2세이브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기록한 채 1999년 1월 22일 류택현은 같은 팀 외야수 김상호와 함께 1억원에 현금 트레이드 돼 OB를 떠나 LG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된다. LG에서 OB로 그리고 다시 LG 유니폼을 입은 김상호가 중심이 된 트레이드였다.

1월 23일 스포츠 신문은 '홈런왕 김상호의 찢겨진 자존심'이라는 제목으로 트레이드 사실을 보도했다. 나중에 "어, 류택현이 왜 LG에서 던지지?" 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류택현이 트레이드 됐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 포인트 투수' 류택현 ... 눈물의 첫 승


 
▲ 류택현은 14년 동안 마운드를 지켜왔다.
 
ⓒ LG 트윈스
LG에서 류택현의 보직은 '원 포인트 릴리프'였다. 말 그대로 경기 중간에 좌타자가 나오면 그 타자 한 명만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좌완 투수라는 것 이외에는 딱히 특별한 장점이 없었던 류택현은 좌완 투수가 좌타자에게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경기 좌타자들과의 승부를 위해 긴장을 하고 몸을 풀어야 했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상당히 전문화 된 보직 중 하나지만 당시 '원 포인트 릴리프'는 낯선 보직이었다. 당연히 그 중요성 또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택현이 나와서 달랑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강판되는 모습은 왠지 서글퍼 보였다. 누구 못지않게 청운의 꿈을 꾸고 프로에 들어왔을 텐데 겨우 한 타자 상대하자고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가 된 것이 안타까워 보였다.

그렇게 1999년 프로야구도 중반을 넘어 종반을 향해 치닫던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이미 한 차례 어깨 이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1군으로 복귀한 류택현은 복귀 당일이었던 8월 9일 잠실에서 벌어진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 5회말에 마운드에 올라왔다.

3-3 동점,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류택현은 5회 위기를 무안타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맞은 6회초에서 LG 타자들이 역전 점수를 뽑아냈다. 경기는 6-3 LG의 승리로 끝이 났고 5회 등판해 1.1이닝을 던진 류택현이 승리 투수가 됐다.

행운의 승리였다. 어찌 보면 쑥스러운 승리였다. 그러나 프로 생활 6년, 무려 181경기만에 거둔 첫 승은 류택현에게는 눈물 날만큼 감격적인 승리였다. 그리고 지난 6년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2군을 오르내리며 그나마 1군에서는 달랑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마운드에 내려가는 아들의 늘어진 뒷모습에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던 어머니 박영자씨에게는 노히트노런 보다 더 값진 그런 승리였다.

첫승을 행운의 승리로 따낸 류택현은 2000년 5월 3일 SK를 상대로 선발 등판해 7이닝 1실점 호투를 하며 당당한 승리를 따냈다. 류택현의 프로데뷔 첫 선발 승이었다.

강한 남자 류택현


 
▲ 좌타자 전문 투수 류택현.
 
ⓒ LG 트윈스
올 시즌 프로야구는 전반기도 지나지 않았지만 류택현은 벌써 38경기에 등판을 했다. 평균 자책점 2.08을 기록할 만큼 투구내용도 훌륭하다. LG에서만 무려 475경기를 뛰었고 2004년에는 당시 한 시즌 최다 기록인 85게임에 등판했을 만큼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투수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신인 시절처럼 빠른 볼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빠른 볼을 버리는 대신 류택현은 살아남는 법을 택했다. '새가슴'이 아니라 철저한 승부사로 거듭난 류택현은 이제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말 대신에 '좌타자 전문 스페셜리스트'라는 제법 세련된 이름으로 불린다.

어느덧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인 프로 14년차, 우리 나이로 38살이 된 류택현은 여전히 좌완 전문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류택현은 마운드에 오를 것이다.

프로 14년 동안 469이닝을 던졌다. 이 기록은 올해 20살로 지난해에만 201 이닝을 던진 류현진이 21살이 된다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그런 기록이다. 그러나 철저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낙오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14년을 살아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흔히들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고. 프로 14년 동안 겨우 8승을 거두었고 6500만원의 연봉을 받지만 류택현은 지난 14년 동안 마운드에 있었고 앞으로도 마운드에 오를 것이다. 그래서 류택현은 아주 강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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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2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류택현" 이란 이름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강한 사람이군요. 홧팅~. 소리가 절로나네요. ^^.
 

"이 그림은 '비매품', 희귀하거든요"
그림 기증하는 '바보 화상'... 부산시립미술관, '신옥진 기증작품전' 열어
    이충렬(yigura) 기자   
지난 몇년에 걸쳐 여러 공공미술관과 박물관에 330점의 그림을 기증한 화상이 있습니다.

자신의 화랑 벽에 걸면 계산하기 힘들 정도의 돈이 되는 귀한 그림들이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습니다. "좋은 그림일수록 영구히 보존될 수 있는 공공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야한다"는 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화상들의 작품 기증이 흔한 일이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작품을 체계적으로 선별해서 기증한 화상은,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가 유일합니다.

바보같은 기증, 모두 330점

▲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한 120점 중 일부
ⓒ 김창열, 권진규, 전혁림, 김종식, 안창홍, 우메하라
▲ 경남도립미술관에 기증한 100점 중 일부
ⓒ 이우환, 문신, 전혁림, 송혜수, 유강열, 이상욱
그가 그림 기증을 시작한 것은 IMF의 한파로 화랑경영이 어렵던 1999년부터였고, 첫 기증지는 부산시립미술관으로 53점이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여러 면으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지인들은 '저 좋은 작품들을 다 기증하면 화랑 운영을 어떻게 하려느냐'며 그의 앞날을 걱정했고, 어떤 이들은 '화상이 자기 밑천을 기증한다면 그건 화랑을 그만두겠다는 것'이라고 단정했으며, 또 어떤 이는 '바보같은 짓'이라며 기증을 폄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자들의 사회환원'이라는 미덕이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 사회에선, 그의 기증이 '바보의 행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랑은 지금껏 건재하며, 그는 기증을 계속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첫 기증 이후 경남도립미술관에도 100점, 부산시립박물관에는 고서화와 유물 30점 그리고 밀양박물관에 고서화 100점을 기증했습니다. 부산시립미술관에는 67점을 추가로 기증함으로써 120점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그 작품들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7월 17일까지 '신옥진 기증작품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부산시립미술관에 30점을 더 기증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화랑에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희귀성이 있는 작품은 '비매품'이라며 팔지 않습니다. 작품값이 수천만원 호가하고 애호가들이 돈을 들고와도 "이 작품은 훗날 미술관으로 보낼 작품이니, 감상만 하시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은 작품이기에, 그의 기증 작품에는 국내외 작가들의 수준작이 많습니다. 세계적 화가가 된 이우환 화백의 '조응', 권진규 화백의 흔치 않은 목탄화, 장욱진·김창열 화백의 초기 작품, 김종식·안창홍 등과 같은 부산 출신 화가들의 작품 등 작품성과 희귀성 그리고 향토성을 갖춘 수작들입니다.

▲ '기증전'이 열리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장
ⓒ 부산시립미술관
▲ 밀양시립박물관에 100점의 작품을 기증한 후 명예시민증을 받았습니다. 왼쪽이 이상조 밀양시장, 오른쪽이 신옥진 사장입니다.
ⓒ 밀양시
그는 밀양 박물관에 들렀을 때 전시품이 빈약한 걸 보고 기증을 결심했고, 박수근미술관을 열 때 당자의 작품이 없다는 소식에 소장했던 박수근의 작품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화단의 원로 전혁림 화백이 미술관을 열면서 초기작이 없다고 하자, 자신이 30여년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흔쾌히 돌려드렸습니다.

"신옥진 선생의 미술품 기증은 보다 많은 미술동호인이나 애호가들에게 작품감상의 기회를 넓히고, 나아가 작품의 영구보존을 소망하고 준비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 김상훈 부산일보 사장 <공간 30년> 13쪽

지금껏 그가 기증한 작품들은 근현대 그림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수집했던 고미술들도 많습니다. 발품을 팔아 고미술 경매장엘 가고 그곳에서 경합을 벌여 소장한 고서화와 유물들도 '마음을 비우고' 기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옥진 사장'이 아니라 '신옥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사장'이 아닌 '선생'으로 불리는 까닭

▲ 부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한 고서화와 유물 30점 중 일부. 호생관 최북의 '난'과 추사 김정희의 간찰 그리고 부산출신의 서예가 운여 김광업의 희귀 전각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 부산시립박물관
▲ 부산청년미술상 수상식에서 축사하는 모습
ⓒ 청년미술상 운영위원회
그는 기증 외에도 원로 향토화가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향토전'을 개최하고, 젊은 청년화가들을 위해서는 '부산 청년 미술상'을 만들어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계속되어온 이 상을 통해 부산 지역의 많은 청년화가들의 작품 세계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제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화단의 중진 혹은 유망작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산지역의 작가들만 배려한 게 아닙니다. 서울이나 해외 거주 화가 중에서도 작품은 좋은데 형편이 어려워 전시회를 하지 못함을 알게 되면, 흔쾌히 전시회를 열어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 오윤 화백의 전시회입니다.

▲ 1986년 6월 20일, '오윤 전시회' 오픈행사. 오윤 화백은 이 전시회 2달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공간화랑
오윤 화백 생전에 개인전을 열어준 상업화랑은 부산 공간화랑 뿐입니다. 80년대 당시 오윤 화백은 민중미술의 전위그룹인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그의 전시회는 대부분 민중미술 전시장이었던 '그림마당 민'에서 열렸을 뿐, 상업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윤 화백의 작품성을 알아보고 또 그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초대전을 열어줬습니다. 또한 간경화로 투병 중인 화가의 건강을 고려해 왕복 비행기표값도 보내줬습니다.

"그러나 화가 본인은 그 돈을 아껴 기차를 타고 왔다. 병세가 완연해 얼굴은 핼쓱하고 혈색은 좋지 않았으나 가끔씩 미소를 띠며 상대를 편하게 해 주었으며, 마호병에 미음을 넣어와 중간중간 마시기도 했다. 거의 별 말이 없었던 작가는 오픈 때 직접 케익에 초를 꼽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타를 꺼내 몇 개의 초에 일일이 불을 붙인 다음 입으로 정성스럽게 불어 끄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신옥진 <공간 30년> 98쪽

당시 오윤 화백의 작품값은 7~25만원 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작품은 1/3 밖에 팔리지 않았습니다. 화랑의 수익은 고사하고 화가에게 보낸 비행기 값도 건지지 못했음에도, 그는 오윤 화백의 맑은 영혼에 도취되어 오랫동안 행복했다고 합니다.

▲ 이인영 유고시집 <어느 소명> 표지
ⓒ 공간화랑
그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지역 원로 문인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생전에 다 하지 못한 것은 사후에도 챙겼습니다.

가난과 술과 시로 한 생을 산 '불운의 천재시인' 이인영 시인, 그분에게는 남몰래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시인이 치매 걸린 어머니 옆에서 숨진 지 닷새 만에야 발견될 정도로 허망하게 생을 마치자, 그가 교유하던 부산지역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유고 시화집'를 만들어 시인의 무덤 앞에 바쳤습니다. 생전에 시집을 내드리지 못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시인의 유고시 중에서는 이런 시도 발견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빽이 세 분이 계시다./ 한 분은 '공간화랑' 신옥진백작이시고/ 한 분은 어머님/ 또 한 분은 하느님이시다/
대낮에 한 밤에/ 길을 잊어버리고/ 투 아웃/ 투 쓰리 절대절명의 위기에/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저기다./저기가 끝이다라고/ 가르치는 이 분들/
교과서로 삶을 살기 보단/
퇴학으로, 사람으로 있고 싶은/ 나에게/ 빽이 세 분이나 계시다./
- 이인영 <어느 소명 5> 전문


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들

▲ 전시회 참석차 부산에 온 장욱진 화백을 모시고 충무에 갔을 때. 쪼그리고 앉아 스케치를 하는 장화백의 모습과 왼쪽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 공간화랑
▲ 공간화랑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한 이우환 화백과 신옥진 사장이(오른쪽) 함께 화랑 입구 계단을 올라갑니다.
ⓒ 김홍희
이런 자세로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문화의 소외지역'으로 불리던 부산에서도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유한 환경 속에서 화랑을 운영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30여년 전 폐를 절단한 허약한 몸으로, 광복동 외국서점 거리의 허름한 찻집에 '공간화랑'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화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번 찾아가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찾아갔고, 장욱진 화백에게는 3년을 찾아가 명함이 든 과자봉지를 문 앞에 놓고 왔습니다.

"아직도 화랑을 하느냐" "아직도 부산에서 하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부산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화랑을 꾸려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공간화랑'은 서울의 어느 메이저 화랑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화랑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자수성가'하며 모았던 그림이기에, 그의 기증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 그림들 속에는, 그가 어려움을 헤쳐오면서 흘렸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옥진 기증전'에 가면, '기증을 통한 사회환원'의 의미뿐 아니라, 그림 한 점 한 점에 담겨있는 그의 깊은 '그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산시립미술관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시립미술관 역 (⑤번 출구) 하차, 부산시립미술관까지 약 100m 거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1413
전화 051)744-2602

관람시간 : 10:00 ~ 18:00
매주 월요일은 휴관(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을 휴관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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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6-0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확실히 각박해졌어요...
저런 아름다운 기증을 액면그대로 봐주질 않고...바보같은..이란 수식어가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동아일보 5월 31일자 사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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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그제 부산 시민사회연구원 초청 특강에서 “참여정부는 정치·언론자유를 1등으로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달 초 미국의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07년 국가별 언론자유 순위를 보면 한국은 ‘자유’ 항목에서 최하위점인 30점으로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등과 함께 세계 66위를 기록했다. 국제언론인협회(IPI)가 지난달 내놓은 ‘2006년 언론자유 보고서’도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언론규제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데도 이 전 총리는 현 정부의 언론자유가 1등이라고 한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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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설을 읽고, 약간 스턴 상태에 빠졌습니다. 과연 우리 언론 자유가 이정도 수준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대통령 까대는 사설과 만화와 왜곡된 기사들을 내뱉고 있는 언론이 있는데,
이렇게 자유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었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것도 잡스런 사설이 아닐까 하여 디벼봤습니다.
디벼본 사람은 오늘의 유머 키다리아찌입니다.

뭐, "정치,언론자유를 1등으로 유지했다" 라는 말은 사실이 아님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 뒤에 따라 나온 분석이지요.

우선 프리덤하우스에 올라온 해당 리포트를 보면
(http://www.freedomhouse.org/uploads/fop/2007/pfscharts.pdf
http://www.freedomhouse.org/uploads/fop/2007/fopdraftreport.pdf)

1. '자유'항목이라는 것은 특별히 없으며 전반적인 언론자유 순위를 매긴 것에 불과하고,
굳이 세부 항목이 따로 있는 것 처럼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의 상태가 '자유' 상태이긴 하지요.
STATUS: Free    아래에 30 이라는 수가 있다고 그게 30점은 아닌 것이지요. 상태가 자유라는 뜻이지.
스테이터스 잘 모르는 것 보니 주필께서 게임 잘 안해보신 분 같습니다.

2. '30'점이라는 것은 '등급' 내지는 '순위'에 불과하다.
언론 자유가 가장 뒤쳐지는 북한은 '97'점'으로 우수학생인가요?
100점만점 형식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30점이라는 의도적인 오역은 많은 오해를 부를 수 있지요.
'30' 이내의 국가, 즉 한국을 포함한 국가들은 '언론자유국가'로 분류되고,
'30' 초과의 국가는 '부분적 언론자유국가'로 분류됩니다.
숫자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닐걸요.
법적 환경 9위, 정치적 환경 11위, 경제적 환경 10위를 합산한 것이 30위인 것이지요.


3.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등과 같은 레벨인 것은 맞으나,
굳이 이렇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비교할 것이 있을까요?
같은 등급에는 칠레, 홍콩, 우루과이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의도적인 국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4. IPI....국제 언론인협회....
그냥 용어만 들어 보면 상당히 공정한 기구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것은 국가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의 회원들이 가입하는 것이고,
주축은 각국의 주요 언론사 경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언론의 독립' 보다는 '언론 경영의 독립'측에 비중이 더 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조중동 우리나라 대표 보수 언론사들이 이사나 부위원장, 한국 위원장 등을 맡아온 단체입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을 때에 우리의 언론 수준을 미국, 스위스와 비슷하게 '평가해주었고'
전두환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유롭다'고 한 단체입니다.
뭐, '자유롭게 아부'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 할 말 없습니다만.

이렇게 각주를 달아놓지 않고, 위의 사설 일부분만 읽어본다면,
과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렇게 써 놓고도 '그래 너처럼 찾아보면 다 알 수 있잖아' 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어떻게 언론이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신문, 정신 바짝 차리고 읽읍시다.
사설 문단 끝의 부분을 그대로 다시 복사해 넣습니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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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0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정말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가 정답이네요. ^ ^.

2007-06-01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늘 아침..

 

연두부가 갈아놓은 토마토쥬스를..

아빠가 토마토 쥬스 엄청 좋아하는데

일부러 연두 주려고 이렇게 남기고 갔다는 말에..

 

기분좋아진 이연두.. 평소 그렇게 즐겨라하지 않지만

맛나게 쪽쪽 다 마셔버린다.

 

연두가 젤 좋아하는 할머니표 미역국.

며칠전 할머니가 끓여놓고간 미역국을

연두는 며칠째 계속 너무 맛있게 먹구 있다.

 

국물까지 쪽쪽 다 빨아먹는 연두를 보며

공연히 기분좋아져 한마디 거든다..

 

 

"연두야.. 연두는 국물을 잘먹는구나.. 엄마두 국물 좋아하는데..

홍홍.. 연두랑 엄마는 참 많이 닮았다.. 그치?"

 

연두의 생뚱한 한마디..

 

"엄마두 콩 좋아해?"

 

ㅠㅠㅠㅠ

 

아~ 콩..

 

밥에 한두알이라도 섞여지면

밥공기를 비울때까지 고민하게 만드는 콩..

내가 젤 싫어하는 콩...

 

다행히 연두는 좋아라 잘먹어서.

늘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던 콩..

 

결정적으로 그 콩이

오늘 아침 나와 연두를 갈라놓는다.. ㅎㅎ

 

 

연두부에게 '이제 정말 연두를 못당하겠다'며

푸념하니..

 

연두부 왈 

"벌써 오래 됐거덩.. 당신이 연두한테 밀린게~ "

 

웃어야할지....울어야할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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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5-29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오늘은 연두의 완승!!!

2007-06-01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0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송인득, 어서 일어나서 중계하러 가야지. 그러니 힘을 내.”

그가 숨을 거두기 두 시간 전쯤 마지막으로 그의 귀에 대고 해본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착시였을까. 그의 가쁜 숨 속에 맥박이 잠시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임종을 지켜보는 부인의 말처럼 의사 선생님이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믿고(실제 그렇지 않겠지만) 절절한 대화는 몇 마디 더 이어졌다.

“여보. 허위원님 말씀대로 중계하러 가게 일어나세요.”

그러는 동안 그의 혈압은 점점 떨어졌다. 마지막 호흡기를 떼어버리는 순간은 나에겐 가장 슬프고 긴 시간이었다. 어찌 나이 많은 나보다, 옆에서 흐느끼는 그의 노모보다, 연신 “아빠 미안해. 사랑해요”로 흐느끼는 예쁜 외동딸을 두고 그렇게 쉽게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이 못난 친구야’, 싶어 그가 숨을 거두기 전엔 속으로 얼마나 나무랐는지 모른다. 그토록 건강 챙기라고 했건만 말도 잘 듣지 않고….

그래도 마지막 그의 몸을 만져 봐야만 그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차가운 오른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쥐는 순간, 그 동안 참았던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꼼꼼하게 선수들의 경력, 경기기록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고 또 적던 그 손가락 움직임은 나를 감동시킨 손가락들이 아닌가. 몇 가지 칼라 펜으로 부문별로 나누어 기록하던 그의 손놀림을 이젠 영영 볼 수 없다니….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한 그와의 만남은 숱한 중계, 지방과 해외출장 등을 통해 표정만 봐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그의 숨소리만 들어도 ‘그래 맥주한잔 하러 가자’고 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다.

아나운서 수습 때부터 최고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는 내가 본 최고의 스포츠 캐스터 중의 한 명이자 최고의 야구 캐스터 중의 한 명이었다. 철저한 자료준비, 절제된 표현, 뛰어난 순발력과 애드립, 그리고 상대를 존중해주면서 죽어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며 학처럼 살다간 인물이다. 야구 캐스터가 얼마나 어려운 자리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자리인가.

‘형님 살짝 한 대만 필게요’라며 세인트루이스에서의 월드시리즈 중계 때 중계 방송석 아래로 몸을 잠시 감추며 그 짧은 광고시간을 활용하는 모습에 정말로 놀랐던 적이 있다. 그래서 놀려주고 싶어 “이 곳 야구장에선 금연인 것 알지, 방금 담배 연기가 올라가 카메라에 잡혔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자, 정말이냐며 눈이 휘둥그래지던 얼굴이 지금 왜 자꾸 떠오르는 걸까?

그와의 마지막 중계방송은 금년 4월7일 잠실구장서의 LG-기아전이었다. 전날 양궁중계를 마치고 또 마이크를 잡은 그는 가뭄에 콩 나 듯하는 지상파 야구 중계로 인해 “형님 정말 오랜만에 하니까 선수들도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쉽지않네요” 라며 불만족스런 방송 내용에 대해 자책했다. 그 모습이 나와의 마지막 중계였다.

“중계방송엔 퍼펙트가 없잖아”란 위로 말에 “그래도 그렇죠”란 말이 아직도 귓전에 맴돈다. 야구는 물론 아나운서의 꿈인 올림픽 개회식, 폐회식 중계뿐만 아니라 최근엔 스포츠 전문위원으로 스포츠 중계의 장인 반열에 올랐던 그가 적어도 15년은 더 활동 할 수 있었기에 그의 타계는 MBC 스포츠 중계팀에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오래 전부터 자주 그에게 해준 말이 있다.

“송 아나,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계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진짜야”, “당신이 예순살 넘어서 야구 중계를 할 때, 아 저 홈런은 1982년 개막전 때 이종도의 홈런을 생각나게 하네요 라든지, 저 투수는 마치 최동원, 선동렬을 보는 듯 하는데요 라며 머릿속에 많은 걸 담겨둔 방송이 진짜 값어치 있고 좋은 스포츠 중계방송이 아닐까?” 라며 스포츠 전문 캐스터를 꿈꾸도록 부추기기도 했으니 그의 죽음엔 내 잘못도 있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그 많은 경험, 해박한 방송 지식을 뒤로하고 간 그는 스포츠팬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지워질지 모르지만 그는 물과 물고기처럼 끊어 놓을 수 없는 사이, 수어지교(水漁之交)로 야구팬과 스포츠팬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빈소를 찾은 두산 김경문 감독의 “선수생활 때 인터뷰 했던 적이 엊그제 같은데 어찌 이렇게 허무하게 떠날 수 있냐”는 말처럼 그의 죽음은 충격적 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중계방송을 해야 하는데’ 라는 마지막 말을 가족에게 남긴 그는 야구를, 스포츠를 정말로 좋아하고 아끼며 최선을 다해 중계방송을 했던 캐스터로 우리에게 오래 기억될 것이다.

“잘가게 송인득.”

하늘나라에서도 요즘 한창 재미난 국내야구를 지켜볼 자네 아닌가. 잘 지켜보면서 정리를 해 두었다가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는 날 멋진 야구중계를 해보자고. 그 때엔 쫓길 것도, 눈치 볼 것도,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하늘나라에선 광고방송이 없으면 막간을 이용한 흡연은 언제 하지? 오늘 그대가 한줌의 재로 변하는 것을 보고난 후 내가 이승엽 중계방송을 해야만 하는데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방송 만큼은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힘을 좀 불어 넣어 주었으면 좋겠다.

송국장! 이제 마지막 인사를 팬들께 하고 떠날 시간이구나. ‘야구팬 여러분, 이상으로 중계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나운서 송인득 이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7년 5월25일 아침,

영원한 야구캐스터 고 송인득 아나운서를 떠나보내면서

MBC-TV 야구해설위원 허구연이 삼가 올립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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