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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 2007-05-0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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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05-03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말 대학 동아리 행사때 가족 모두 참여했었는데 후배가 찍어준 사진이다...
 

돌풍의 '닥터 K', 최창호
[야구의 추억, 마흔 다섯 번째] 돌핀스 '삼총사 전설'의 가운데 자리
김은식 기자
▲ 최창호의 투구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야구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선수가 있다. 선동열처럼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것도, 임수혁처럼 끔찍한 비운을 겪은 것도 아니며, 김홍집이나 박충식이 그랬듯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볼 때마다 삶의 어색한 구석에서 만난 미안한 친구처럼 애틋한 선수. 내게는 최창호가 그렇다.

야구명문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았고, 역대 최고의 야수들인 유중일과 강기웅을 잡느라 이정훈을 버릴 만큼 자원이 넘쳤던 연고지 프로팀 라이온즈에는 바늘만 한 틈도 없었다. 몇몇 실업팀 입단을 타진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최창호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약체팀 청보 핀토스의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대구를 떠나, 인천이라는 멀고도 막막한 땅으로 기약 없는 연습생의 길을 떠나는 아들을 온 가족이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숫제 인천 도원야구장 앞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가게 옥상에서 벌을 기르고 꿀을 모아 왜소한 아들의 몸을 돌보았다.

입단 2년차인 87년에 정식 선수지명을 받고 야구장에 설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2년 동안 1군 무대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23.1이닝동안 두 번의 패전. 그리고 8점에 육박했던 평균자책점 뿐이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팀의, 다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연습생 출신 2군 선수일 뿐이었다.

174cm의 작은 키에 눈초리도 밑으로 쳐져있는 순한 얼굴. 도무지 상대를 압도할 힘이나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한 시골 소년에게 특별한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88년, 최창호는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박정현이었다. 유신고를 갓 졸업한 그는 최창호와는 반대로 키가 190cm이 넘는 거한이었지만,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부실한 몸과 체력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잠수함 스타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나란히 서면 머리 하나 차이가 났던 두 소년은 돌핀스 2군 경기에서 하루 걸러 하루씩 선발을 주고받았고, 쉬는 날에도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니는 기괴한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그들은 또 한 명, 정명원을 만나 삼총사를 이루게 된다. 군산상고와 원광대를 다니면서 쓸 만한 타자로 알려졌던 정명원은 대학 졸업이 가까워서야 투수로 전향을 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영 다른 내성적인 성격에 낯선 팀과 보직의 막막함은 자연스레 숙소 한구석에 박혀서 야구에만 미쳐있던 최창호, 박정현과 이어지게 했다.

88년,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다

▲ 500경기 출장 기념(2002년 5월 10일)
ⓒ LG 트윈스 홈페이지
겉모습은 영 한목에 꿰어지지 않는 구색이었지만, 모두 뭔가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만 가득 찬 빈손들이었고, 또 야구 외에는 별 관심사가 없는 순둥이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가을 부임하자마자 돌풍의 설계를 시작한 김성근 감독의 눈에 곧 그 셋이 들었고, 그들은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선수들 스스로 경비를 모아 쌀이며 고추장을 챙겨 떠나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산악행군에서 흘린 땀을 계곡 얼음물 속에 들어가 식혔던 오대산 극기훈련을 시작으로, 고정시켜놓은 포수 미트를 겨냥해 하루 5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는 지옥훈련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언젠가는 정상에 서겠다던 막연한 포부가 거친 호흡 속에서 현실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작은 체격을 만회하느라 키워온 최창호의 단단한 상체근육에 바짝 "실전용" 기운이 들어가자 직구는 시속 150km 언저리를 넘나들었고 커브의 낙차는 예리하게 날이 섰다.

선동열이 21승에 1.17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198개의 탈삼진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던 89년, 박정현은 19승과 2.15의 평균자책점으로 두 부문 2위를 차지했고 최창호는 191개의 삼진, 2.22의 평균자책점으로 탈삼진 부문 2위와 평균자책점 부문 3위를 차지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던 정명원도 2.45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 4위에 오르며 11승과 6세이브를 곁들였다.

프로야구사상 한 팀이 배출한 가장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의 출현이었다. 물론 신인왕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졌던 박정현에게 돌아갔고, 만년 꼴찌의 늪에서 허덕이던 돌핀스는 별다른 전력보강 없이도 그들 삼총사의 힘으로 일약 3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해 삼총사의 활약은 타선과 수비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었다. 특히 최창호는 89년부터 91년까지 해마다 평균 220이닝 가량을 던졌고,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탈삼진 3위 이내를 지키는 빛나는 투구를 했지만 그가 거둔 승수는 간신히 10승, 9승, 그리고 15승이었다.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

박정현이 등판했을 때는 아쉬운 대로 두세 점을 뽑아주던 타선이 최창호의 차례에서는 무득점으로 침묵하기 일쑤였고, 더구나 수비조차도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90년에 그가 9승과 함께 기록한 9번의 패전 중에서 무려 7번이 1점차 패배였고, 그 해 그가 허용했던 86개의 점수 중에서 수비 실책 등으로 내준 비자책점이 무려 16점이나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최창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타선이 받쳐주든 아니든, 수비들이 잡아주든 아니든, 심지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그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공을 뿌렸다. 그것은 그리 애타고 비장한 표정도 아니었고, 또 무덤덤한 돌부처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제 할 몫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되뇌듯, 그저 힘 닿는 대로 뿌리고 이따금 모자를 벗어 땀 한 번 닦아내는, 어쩌면 고단한 벌판에서 누가 보든 말든 묵묵히 혼자만의 깜냥대로 쟁기를 다루는 어느 농부의 표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표정으로 그는 왼 다리로부터 시작된 몸의 대각선을 축으로 웅크렸던 온몸을 빙글 돌리며, 마치 발석차(發石車)에서 돌을 날리듯 공을 쏘아 날렸다. 작은 체구에서 시속 140km대 후반의 강속구를 짜내기 위해 온 몸의 힘을 순간적으로 모으는, 최창호만의 투구동작이었다. 공터의 아이들은 하나 둘 그 동작을 흉내 내기 시작했고, 학교의 야구코치들은 어린 투수들에게 그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느라 바빠졌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그들 삼총사는 정명원, 박정현, 다시 최창호의 순서로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것은 단순히 많은 이닝동안 그들을 마운드로 내몰았던 코칭스태프의 탓만은 아니었다. 바로 타선도, 수비진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온전히 한 몸으로만 경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현실인식이 그들의 어깨를 긴장시켰고 확실한 삼진을 위해 매 타자에게 서너 개의 공을 더 던지게끔 했기 때문이다.

최창호는 박정현이나 정명원과 달리, 부상중에도 "화끈하게" 쉬지를 못했다. 때로는 부상도 "확실한" 것이 "애매한"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는 법이다. 91년에 생애 최다승인 15승을 올렸던 그는 그 해를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92년에도 부상 와중에 100이닝 가까이 던지며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선방했지만 3승에 머물렀고, 그 이듬해는 다시 162.1이닝동안 2.99의 평균자책점으로 호투하고도 7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94년에는 한층 살아난 타선의 덕으로 12승을 올렸지만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치솟고 있었다.

91년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

▲ 아령을 든 최창호
ⓒ LG 트윈스 홈페이지
그 뒤로도 그는 크고 작은 부상을 안은 채로 묵묵히 공을 던졌고,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삼진을 잡고 승수를 올리는 그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몇 경기 쉬면 상승세를 탔고, 조금 무리한다 싶으면 내려앉았다. 무심한 이들은, 그저 "원래 작은 선수들이 나이 먹으면 좀 일찍 내리막길을 타는 법"이라고 웅성거릴 뿐이었다.

98년. 프로야구에 뛰어든 지 3년째를 맞던 현대는 그 해 기필코 첫 우승을 이루고 말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97년 겨울, 이미 해체지경에 몰리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 9억을 주고 박경완을 데려온 현대는 98년 7월 31일, 또 한 번 회심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레이더스에서 조규제를 데려와 불펜을 다지고, 트윈스에서 박종호를 데려와 "인간종합병원" 2루수 이명수의 뒤를 받치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조규제의 대가로 현금 6억원에 얹혀 레이더스로 보내진 것은 "재기불능" 판정을 받은 박정현이었고, 박종호 대신 트윈스로 보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 진단을 받은 최창호였다. 삼총사는 그렇게, 쓸쓸히 해체되고 말았다.

현대는 그 해, 선발투수로 부활해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린 주장 정명원과 뒤 세대 에이스 정민태의 힘으로 첫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한국시리즈 6차전 혈투 끝에 유니콘스에 무릎을 꿇은 것은 트윈스였고, 유지현의 마지막 타구가 중견수 이숭용의 글러브에 빨려들면서 인천 하늘에 축포가 터지던 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트윈스 덕아웃에는 최창호가 앉아있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정명원과 정민태와 김경기가, 다시 이숭용과 박재홍이 엉켜있었지만, 맞은 편 덕아웃 구석의 최창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한 번, 우승반지의 꿈이 사라진 허탈감과 10년 넘게 기다려왔던 인천팀의 우승이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흥분이 묘하게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상대팀 덕아웃에서 지켜본 인천팀의 첫 우승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 쪽 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싶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상황이 너무나도 나를 화나게 하더라." (최창호, 06년 9월 20일자 <스포홀릭>과 한 인터뷰 중에서)

굳게 입을 다문 선수들이 각자 가방을 챙겨 떠나기 시작한 트윈스의 덕아웃에서 최창호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장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왔다. 우승 소감 인터뷰에 응하는 유니콘스의 주장 정명원의 목소리였다. 흥분과 감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목소리였다.

"아… 예… 감사드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 뭔가 애써 뜨거운 것을 씹어 삼키는 듯도 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이어졌다.

"같이 고생했던 창호랑 정현이가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선수로나 팀으로나, 다시 연고지로서나 사상 첫 우승을 맞이했던 바로 그 순간, 함께 그 자리에 어우러진 동료선수들 대신 이제는 다른 팀으로 떠나간 두 선수의 이름을 떠올린 주장 정명원. 그러나 그 경솔함을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인천 팀의 어제와 오늘을 보아온 팬들은 그 순간 물기어린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 있었다. 그 삼총사는 바로 돌핀스의 역사였으며, 90년대 인천 야구팀에 뿌려진 씨앗이자 거름이었다.

셋이 걸으면 190대의 장신 박정현과 정명원 사이에 머리 하나가 쑥 들어간 170대 단신 최창호의 자리가 두드러지곤 했다. 그리고 출발점에서는 신인왕 박정현의, 그리고 뒷날에는 구원왕 정명원의 빛나는 자리 사이에 그보다 빛은 덜했지만 소리 없이 한 시대를 지켜온 당찬 투수, 최창호의 자리가 있었다.

지도자 생활 후 사업가로 변신

▲ 최창호가 개발한 투수용 운동기구
ⓒ 초이볼
그 뒤로 다시 네 해, 연습생 시절부터 모두 17년 동안 이어간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잠시 모교에서 지도자생활을 했던 그가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해있다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변신"한 그가 만들어낸 것이 기껏 투수들의 변화구 그립 연습용 운동기구라니, 또 묘하게 우습다. 아무래도 그가 조만간 다시 지도자로 "변신"해 그 운동기구를 들고 불펜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아서다.

도원야구장 앞길에서라도 우연히 만난다면 무심코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래서 "누구신가" 하는 황당한 표정이 돌아오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인을 한 장 부탁하게 될 것 같은 내 마음의 에이스 최창호.

그래서 가끔 오랜만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박찬호가 다시 된통 얻어맞다 내려갔다거나 하는 씁쓸한 소식 뒤 끝에 이유 없이 종종 떠오르는 그 이름.

뜬금없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팀 돌핀스의 유민 중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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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05-0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야구가 시작된 82년 이후 대학1학년때까지 야구장은 텔레비젼으로밖에 보지 못했으면서도 참 징글징글하게 좋아했었다...왜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는지 남들에게 설명하라면 딱히 못하지만 이런 기사를 만나면 어느정도는 설명이 된다..."야구는 인생이다...
 

어제 내린 비로 무척이나 상쾌했던 아침이었다.

일주일에 두세번은 걸어서 출근하지만 특히 비온 뒤의 아침은 상쾌함이 더해서 무슨일이 있어도 걷고 싶은 마음이 더 든다.

오늘 아침도 사과 한쪽 베어 먹고 베낭 짊어지고 일치감치 집을 나섰다.  바람은 좀 불었지만 예상대로 괜찮은 아침 걷기 날씨...

조폐공사 정문 앞의 아스팔트를 지날때 우연히 달팽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보는 달팽이가 반가웠다.

많지는 않지만 출근하는 차들이 제법 있는데 거기 있다가는 형체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아서 주워서 흙있는 쪽으로 놓아 주었다.

좀 걷다 보니 몇 마리 더 눈에 들어 왔다. 아마도 간밤까지 내린 비의 영향 때문이리라...

아스팔트까지 나온 한마리를 더 화단쪽에 놓아주고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더디가도 똑 바로, 살 길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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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털을 보다가 가슴이 억 했습니다. 올봄 몽골發 `최악의' 황사테러 덮친다 라는 기사가 톱에 있더군요.

기억하시는 분이 있지만 모르지만 저는 그 전날 사막에 내린 폭설, 황사를 삼키다 라는 기사를 썼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뭣 같더라구요. 이 기사는 황사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단 몽골의 상태가 안좋으니 최악의 상태라는 기삽니다.



하지만 편집자는 이 기사의 행간을 전혀 읽지 못합니다. 이 기사는 몽골의 상황이 나쁘기도 하지만 몽골의 상황이 나쁘니 와서 다양한 작업을 해달라는 몽골 정부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배제한 체 일단 황사 자체를 최악으로 몰고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털들은 메인에 배치해 우리나라 황사가 무척 심할 것으로 인식하게 하더군요. 사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도,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보도의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지난해 올 최악의 황사가 온다고 예측했을 때 무시했는지 몰라요.(후후)



사실 저는 지난 수년간 황사를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중국 이상 기온 한국도 위협한다 2002-02-23

- 올 황사 횟수 줄고, 강... 2003-03-21

-불청객 '모래바람', 2년만에 돌... 2004-03-11

- 올 황사 크게 약화할 듯... 2005-02-17

-'황사' 3년 침묵 깨고 다시 분... 2006-03-14



사실 제가 황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제일 위의 기사를 쓴 후입니다. 그때 따뜻한 겨울(暖冬) 현상에 강수량 부족으로 난리였죠. 저도 기사의 말미에 황사가 심해질 거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그때는 톈진에 살 땐데 어느 날 세상이 온통 노랗더군요. 결국 그해 수십차례 황사가 왔고 황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후 중국 기상자료를 참고하고, 운이 돼서 세미나도 들으면서 황사 예측보도를 했습니다. 해년마다 현장을 방문하면서 지리에 대한 감각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올해를 맞습니다.



사실 봄이 되기 전에 저는 이명처럼 황사에 대한 악몽을 꿉니다. 크게 주목받지 않는 기사지만 어떻든 올해는 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최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매년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체크하면서 기사를 씁니다.



사실 황사 예측은 신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빨라야 3월은 되야 가능하고 이후에도 기상 변화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떻든 운이 좋아서 저는 지난 몇 년간 황사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위 기사가 말해주니 거짓말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 지인들에게 보내는 메일에도 이런 부분을 잘 쓰는데, 지난해는 황사 관련주를 사라는 농담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담처럼 황사전문가라는 말을 합니다.



올해도 그런 악몽이 시달릴 무렵, 황사가 심할 거라는 예측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앞에 쓴 기사(황사 예보, 빗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도 썼듯이 심할 거라는 기사만을 인용하는 자가당착적 시각의 문제입니다. 중국 보도의 전반은 반반 정도였거나 오히려 심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인데, 우리 눈에는 심할 거라는 것입니다.



사실 황사에 대한 중국 기사를 읽을 때는 색안경을 끼고 봐야 합니다. 중국은 가능하면 심하지 않을 거라고 보도하는 습성이 있고, 거기에 책임자들은 아예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어렵기도 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거죠. 역으로 몽골은 심하다고 말해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녹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번 기사는 기상에 대한 관측도 있지만 그런 이해적인 문제가 행간에 있습니다.



사실 올해 예측에는 남들이 심할 거라니 나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황사 발생의 중요한 전기인 대규모 강우가 있었고, 여전히 바람의 강도가 세지 않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앞번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제 기사 전날 ‘시사매거진 2580’에서 심하다고 보도했고, 다음날 또 심하다는 기사가 나왔군요.



일단 제가 바보가 된 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요. 저는 여전히 자신합니다. 올해는 황사가 평년수준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일단 어제 몽골발 기사는 일부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황사 발생의 최대 지역이 네이멍구(내몽고)인데, 이 지역을 제외하고 몽골에서 온 황사가 한국을 장악할 거라는 예측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발생한 황사의 대부분이 네이멍구 발인데 올해는 왜 몽골에서 모든 게 날라올까요. 그리고 날라와도 20%도 안되는 힘이 전체를 최악으로 만들까요. 사실 몽골은 우리나라의 북서향에 있고, 거리도 멀어서 최악의 상황까지 만들기에는 힘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 지역 상황은 최악일 수 있지만 올해 이상하게도 바람의 강도가 약합니다. 기류도 부정확해서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몽골이 우리나라 황사를 지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갈공명이 와서 동남풍을 열심히 불면 정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올해간만에 긴장이 풀리면서 푸념을 해봤습니다. 사실 황사 예측 기사는 한번 제대로 틀렸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럼 다음해에는 이런 기사 쓰지 않을 겁니다. 반면에 올해도 황사가 심하지 않다면 내년에도 때가 되면 온갖 신경이 황사로 쏟아가겠지요. 때문에 정말 제갈량의 동남풍이 소중한 것은 저인지도 모릅니다.





적벽에 가서 기우제라도 지내고 와야 할 듯 합니다. 지난번 테마여행에 들린 적벽을 부적으로 붙여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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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04-2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초 오마이뉴스에서 본 기사인데 다들 "사상 최악의 황사가 온다"고 난리법석일때 올 황사가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사 내용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