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13
요시다 타로 지음, 안철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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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평화와 쿠바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님께서 평화라는 단어가 한자로는‘平(평평할 평)’과‘和(화할 화)’를 쓰고 있는데‘평’은 저울을 가리키는 공평하다는 뜻이 되겠고,‘화’는 벼화(禾)자와 입구(口)자를 합한 글자로서 풀이해 보면‘입안으로 먹을거리 들어가고 그것이 공평한 상황’을 곧 평화로운 상태라고 풀이 하신 걸로 기억하고 있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읽고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평화’의 한자 뜻 풀이었는데 그것은 지구상의 몇 남지 않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의 모습과 90년대의 식량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인민들에게 단순히 호구지책 이상의 유기농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도시 생태농업은 ‘평화’의 실현이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거창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계기였다고 생각한다.

 

2. 쿠바라는 나라, 그 국가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매력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쿠바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나라...그리고 담배와 설탕, 남미특유의 음악과 춤의 나라라는 것 정도였지만 2년 전 소설가 ‘유재현’씨가 쿠바를 직접 여행하고 돌아와서 펴낸 ‘느린 희망’과 ‘담배와 설탕 그리고 혁명’이라는 2권의 책을 읽고 난 후에, 쿠바의 오랜 식민지 항쟁의 역사와 1959년 혁명이후의 사회주의 건설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카스트로의 지도력과 인민의 노력 등은 나의 마음을 완전히 빼앗아 갈 정도로 대단한 것들이었다.

학창시절 아니 현재라도, 조금이나마 사회주의 이론의 세례를 받은 사람치고 쿠바의 역사나 사회주의 시스템, 그들의 고난 극복과정에 흥미를 가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다.

쿠바라는 나라의 깊은 이해를 위해 쿠바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과정을 잠시 살펴보겠다.

에스파냐의 오랜 식민지였던 쿠바는 미국과 에스파냐의 전쟁 이후 1902년 독립하였지만,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책에서도 지적한 미국자본에 종속된 사탕수수 단일작물재배 경제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나 마치가지였다.

토지가 미국자본과 쿠바인 대지주들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국민들은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독재정권의 부패도 심화되어 여러 차례의 민중봉기가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미국의 비호 하에 진압되고 말았다고 한다.

1953년 7월 26일 카스트로의 주도하에서 몬카다 병영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면서 게릴라전을 포함하는 독재 권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노선을 가진 ‘7월 26일 운동’이 결성되고, 1956년 12월 2일 ‘그란마’호로 본토에 상륙한 후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의 17명이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출발한 게릴라운동은 온갖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루게 된다.

쿠바혁명이 지금처럼 출발부터 사회주의적 성격을 뛴 것은 아니었고 초기에는 토지개혁 등 민주주의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나,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1960년 후반 이후부터는 사회주의혁명으로 이행하기 시작하였고, 1961년 1월 미국과 국교를 단절, 이어 미국기업의 국유화와 농업의 집단화를 단행하면서, 그해 4월 16일 카스트로가 마침내 혁명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선언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소 길게나마 이러한 쿠바의 혁명사를 나름대로 알아보고 나열하게 된 이유는 1990년 들어 쿠바 인민에게 닥친 미증유의 위기에서 다른 나라에서 자주 보았던 그 흔한 군중폭동하나 없이 정부를 믿고 의지하게 만들었던 이유가 위에서 설명한 혁명정부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에 대한 인민의 지지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인민의 삶에 최우선을 둔 정부의 비상조치들과 이후의 도시유기농업으로 대표되는 식량증산이 이유였겠지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지도자와 정부를 믿고 의지했던 쿠바의 모습은 자신들이 뽑은 대통령의 지지율이 100일도 채 되지 않아 한자리 수를 기록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버리는 불신의 지도자가 있는 우리나라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혁명후의 사회주의 건설과정 역시 초심을 잃지 않고 배후에 소련의 경제원조라는 거대한 버팀목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온전히 인민의 삶의 질 향상과 골고루 잘사는 사회건설을 위해 노력한 점은 비슷한 시기 독립한 제 3세계 국가들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1세계 국가들의 또 다른 형태의 식민지 경제정책과 독재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음해 왔던 것을 비교해보면 쿠바체제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유기농업,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아바나

몇 년 전 내가 속한 단체의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유기농업 견학을 목적으로  충남 홍성의 ‘풀무마을’을 2-3차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유기농업이 단순히 농약 안치고, 화학비료 안 줘서 작물을 키우는 농법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때 가서 보고 들은 바에 의하면 유기농업이란 것이 단순히 어느 한 가구, 마을의 논 몇 평, 밭 몇 마지기를 유기농법으로 농사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적어도 마을단위, 그 이상의 단위가 다함께 참여해야 참다운 유기농업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유기농법으로 키운 볏단을 사료로 먹인 소의 배설물을 발효시켜 다시 논과 밭의 퇴비로 쓰는 전일적이고 순환적인 마을단위, 공동체 단위의 농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을 읽으면서 그때 견학했던 홍성 풀무마을이 기억났던 것은 아바나 역시 도시전체가 ‘유기농업’을 위해 도시의 사람과 기능이 복합적,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시스템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작은 농촌인 홍성과 대도시 아바나를 직접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농촌에서도 쉽지 않은 유기농업을 인구 200만이 넘는 대도시에서 무리 없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이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바나의 유기농업에서 내가 특히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유기농업에 있어서의 군대의 역할이었다. 식량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도시농업 대책인 ‘프로젝트X'를 만든 퇴역군인인 중국계 ’‘모이세스 셔원’ 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대단했지만 그것을 전체 군대의 사업으로 받아 안아서 군대가 시민들에게 유기농업을 전파하도록 하는 과정은 우리나라의 군과 정부를 바라보는 정서와는 여러모로 다른 그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콘크리트 벽돌과 돌, 베니어합판과 금속 조각으로 둘레를 친 뒤 그 한가운데에 퇴비와 구비를 섞은 흙을 넣고, ‘칸테로cantero'라 불리는 묘상에 집약적으로 채소를 재배하는 생산기술인 쿠바 도시농업만의 독특하고도 창발적인 ‘오가노포니코Organoponicos’를 개발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시키는 일만을 하고 마는 복지부동형 공무원 사회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대단한 ‘인민 사랑’의 결과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바나의 ‘녹색혁명’으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유기농업의 시작은 이 책에서도 나와 있듯이 구소련체제의 붕괴와 한층 강화된 미국의 경제봉쇄에 따른 고육지책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쿠바는 그러한 국가존폐의 위기를 오히려 ‘지속가능하게 발전’할 수 있는 국가시스템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내가 여기서 첫 번째로 주목한 것은 쿠바가 10년간의 경제붕괴 위기에서도 굴하지 않고 경제위기를 지나온 과정에서 철저하게 유기농업방식과 사회주의의 원칙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원자재와 식량을 수입에 의존해 온 쿠바 경제가 소련붕괴이후 얼마나 힘들어 졌는지를 보여주는 미국중앙정보부(CIA) 자료에 의하면 소련해체 이전에 비해 식료품 53%, 원료자재 89%, 연료76%, 화학자재 72%, 기계 88%, 일반상품 82%의 수치만큼 수입이 급락해 버렸다고 한다.

물론 초기에는 아사자도 생기는 등의 아픔이 있었지만 그 이후 쿠바의 식량위기 대응은 ‘더디 가도 우리식으로’란 말처럼 평등과 복지에 기반을 둔 쿠바 특유의 사회주의 체제와 유기농업 발전정책을 유지시켜 왔다는 것은 자유주의를 넘어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분명히 연구하고 벤치마킹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쿠바의 위기극복 과정에서 두 번째로 주목한 것은 경제위기 이전의 쿠바사회가 전형적인 수입위주, 소비위주의 국가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식생활 또한 그 당시 미국, 유럽 못지  않은 고기위주의 식단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러한 식생활을 전 국민이 골고루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을 폈다고는 하지만 과다한 고기위주의 식단은 필연적으로 국민건강의 악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과 생필품에서 원유를 비롯한 주요 원자재까지 거의 전부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민경제 구조가 계속 유지 되었다면 언제라도 90년대와 같은 위기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닥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 이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쿠바 정부가 자급자족의 유기농업과 그에 따른 채소위주의 식단, 대체에너지로 위주의 에너지 정책 등으로 경제위기 이전과 180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경제위기 이전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 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이 카스트로를 비롯한 정부가 인민들에게 진정성을 보이고 설득, 솔선수범하는 과정이 너무나 소중했다고 생각한다.


4. 지속가능한 체제를 위하여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이라는 이 책이 나에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이유 중의 하나는 앞서 많이 언급했던 유기농업뿐만 아니라, 의료, 환경, 교통, 커뮤니티, NPO등의 다양한 방면에서 현재 우리 시민사회가 지향해야 될 가치를 이미 추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의료문제만 봐도 우리나라의 경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논의가 가열되고 있는 것이 ‘의료보험민영화’ 인 것을 보면 쿠바사회가 이룩한 질 높은, 그리고 누구나 무료 내지는 값싸게 이용할 수 있는 평등한 의료체제는 우리사회에서는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꿈같은 얘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바나의 도시 유기농업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90년대의 경제위기 이후의 자구책에서 연원한 것과 같이, 이 책에서 언급한 쿠바의 교통, 환경 등의 문제는 경제위기 이후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려놓으려 하는 것처럼 자급자족과 생태계가 어우러지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중점을 두고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 오고 있었다.

예를 들면 에너지 부족의 대안으로 만들려고 하던 원자력 발전소가 불가능해지자 태양열과 바이오 에너지 등의 각종 대체에너지로 시선을 돌려 그것을 현실화 시킨다던지, 교통문제 또한 적극적인 자전거 보급대책으로 오히려 국면을 인민들의 건강까지 생각하게 하는 쪽으로 바꿔 나가는 것을 책을 통해 확인하는 과정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러한 변화들은 경제위기 이후 단지 배고픔의 해결에 머물지 않고 그들이 정작 추구해야 할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에 대해 전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이 되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결과였을 것이다.

 

5. 아바나에서 북한을 생각하다.

작년 신문기사에서 흥미롭게 읽은 기사가 있는데 다시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다시 찾아보니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대북 비료지원에 유기질비료가 포함되지 않고 있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북한의 거부’다.

지난해 통일부가 비료지원 품목에 유기질비료를 포함시키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지만 북한이 난색을 표명해 성사되지 않았다. “남측의 쓰레기를 받을 수 없다”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기사내용에서 보듯이 북한 측에서는 남측의 유기질비료를 ‘쓰레기’로 치부하면서 그동안 받지 않아 왔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북한 식량사정이 워낙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 있는 화학비료를 선호한다는 저간의 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북한의 식량위기설이 거의 매년 흘러나오고 있는 이유가 위 신문 기사내용과 같은 잘못된 사회주의 특유의 경직성과 관료적인 행태가 원인은 아닐지 의심스럽기만 하다.

특히 올해는 식량위기가 더욱 심각하다는 정보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듣고 있자면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식량위기를 겪고도 쿠바와는 너무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북한의 현재 사정에 대해 미국의 군사적 위협, 분단 상황 등의 일면 이해하는 측면이 있으면서도 그러한 위기탈출의 방안을 쿠바와 같은 사회에서 찾지 않고 이웃나라 중국과 같이 거의 자본주의나 다름없는 사회주의 국가의 발전 형태를 기웃거리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뿐이다.

특별히 남한의 대북한 원조도 배고픈 이에게 직접 생선을 주는 것에서 벗어나 그들을 노련한 어부로 만들기 위한 거시적인 대북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실천해야 될 때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다행히 올해 처음으로 전북 김제에서 돼지 축분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 40t이 북한으로 보내질 예정이라고 한다.)

북한역시 바닥에서 출발하여 전혀 다른 그들만의 지속가능한 발전 체계를 이룩한 쿠바 모델이 그들에게 좋은 발전 대안이 될 수 있음을 고민해 봤으면 한다.


6. 마치며

윗글에서 북한을 언급했지만 사실 아바나식 도시농업과 쿠바식 발전전략이 절실히 필요한 쪽은 우리 남한일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급속하게 도시가 확장해 가면서 도시가 아닌 곳이 어딘지 모르게 변해버린 우리네 삶의 모습과 땅에 대한 개념이 곧 돈과 직결되는 개발광풍은 땅에서 우리의 먹을거리 곡식이 자란다는 얘기가 얼마 안 있으면 먼 기억속의 추억이 될지도 모르는 현실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해방이후 우리사회가 죽으라고 매달려온 개념은 사실상 ‘경제발전’ 이것 하나뿐이었다고 생각한다.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서는 경제를 발전시켜야 했고, 배고픔을 잊고 나서는 너도 나도 부자가 되기 위해 ‘부자 되세요’를 외치고 다녀온 것이 지난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합의 아닌 합의를 진행시켜 온 적은 있으나 정작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합의는커녕 토론조차 생략하며 살아왔지 않았나 생각된다.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 언저리라고는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중병에 걸린 부모님 때문에 집안이 거덜 날 위기에 처하고, 청소년과 노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에 속하는 현실과 갈수록 벌어지는 빈부격차,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커져만 가는 자가용의 실태, 계속해서 심해지는 대기오염과 같은 주제는 여전히 ‘경제발전’과 ‘부자 되세요’에 묻혀 합의의 광장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다.

그러나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에서 살펴 본 쿠바는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을 차근차근히 만들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우리보다 단순지표상의 경제적 순위가 아래라고는 하나 위에서 언급한 몇몇 문제들조차 고려되지 않는 ‘경제발전’이 국민 개개인 한사람에게 얼마만큼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쿠바가 유토피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현실사회에서 유토피아가 과연 가능하겠는가?) 물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아픔과 부조리한 현실이 상존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감안하고서도 그들 쿠바 인민이 그동안 시험하고, 노력하고 또 앞으로 추구해 나갈 사회에 대한 이정표는 분명 우리가 꿈꿔왔던 사회를 가리키고 있음을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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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7
후지무라 미치오 지음, 허남린 옮김 / 소화 / 1997년 5월
평점 :
절판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제독인 페리에 의해 강제로 개항을 한 일본이 이후 1868년의 메이지유신을 거쳐 1894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산술적인 시간은 불과 40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개항당시에 경악스런 눈으로 쳐다보던, 미국의 쇠로 만든 배(군함)를 불과 20-30년 만에 건조해 내었고 성능과 규모도 당시의 동북아 전통의 강국이었던 중국을 능가한 것이었다.

중간에 메이지유신이라는 그들 나름의 효율적인(번체제보다는..) 정치적 변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아시아의 소국에 머물렀던 일본의 변신은 놀라웠다.

당시 일본이 근대화의 방법으로 선택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천황을 비롯한 관료집단은 물론, 특히 언론이 거의 모든 사안에서 한 술 더 떠서 선동하고 있음은 오늘날에도 시사  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일전쟁에 승리하고도 삼국간섭에 의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은 이 전쟁으로 국제무대에 당당한 제국주의체제의 일원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들의 근대를 위한 첫 발걸음과 그 이후의 행보는 이후 아시아 민중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을 선사했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헌법 개정을 완료하고 착실한 군비증강을 추진하고 있으며, 중국은 서북공정을 마무리하고(물론 요즘의 티벳 사태를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신문 어디를 찾아봐도 세계정세와 동북아 정세에 대비한 준비와 대안마련에 대해서는 찾을 수가 없다.


이 책들이 일본 제국주의의 시작에 대한 기록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당시의 일본 관리들이 세계정세를 보는 눈은 냉철했고 그들의 준비는 무서울 만큼 치밀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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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가끔 이런 책을 접하게 되면 새삼 책이 열어주는 새로운 세계와 책을 매개로 한 시공을 초월한 사람과 사람사이의 인문학적 연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열하일기’에 대해서는 인터넷 검색어를 치면 나오는 수준에도 못 미치는 텅 빈 지식창고를 가지로 있던 나로서는 열하일기와 연암과의 만남을 너무나 수월하게 만들어준 작가의 수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만약 이 책을 통하지 않고서 맞딱드린 열하일기와 연암은 가뜩이나 지적능력이나 이해력이 바닥인 나로서는 얼마나 힘들고 권태로웠을까?

솔직히 저자가 인용한 ‘열하일기’의 포복절도할 코믹한 장면들도 저자의 상세한 설명이 없었다면 나로서는 희미한 미소조차 짓지 못했을 것이다.

혹자는 저자가 너무 가볍게 ‘열하일기’에 대해서 접근한 것이 아닌가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어느 한 단어, 문장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연암’이고 보면 열하일기의 대중 교양서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18세기 ‘실학’ 혹은 ‘근대성의 발견’ 정도로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자유로웠고 또 너무나 천재적이었던 연암에 대해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열하일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다가가고 싶음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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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미숙, 몸과 우주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을 만나다
    from 그린비출판사 2011-10-20 16:55 
    리라이팅 클래식 15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출간!!! 병처럼 낯설고 병처럼 친숙한 존재가 있을까. 병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 어렵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 역시 살아오면서 수많은 병들을 앓았다. 봄가을로 찾아오는 심한 몸살, 알레르기 비염, 복숭아 알러지로 인한 토사곽란, 임파선 결핵 등등. 하지만 한번도 병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다만 얼른 떠나보내기에만 급급해했을 뿐. 마치 어느 먼 곳에서 실수로 들이닥친 불...
 
 
 
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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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한 인생’의 정의는 무엇일까? 실패한 인생도 아니고 패배한 인생이 있다면 당연히 ‘승리한 인생’도 그 옆자리 어딘가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 ‘위대한 패배자’는 그 제목에서 보여 주듯이 단순한 패배자의 이야기를 다룬 책은 아니다. 물론 ‘비참한 패배자들’과 ‘끝없이 추락한 패배자들’이란 소제목속의 몇몇 인간군상은 안타까울 정도로 패배의 늪으로 곤두박질 쳤지만 대부분은 ‘천재’ 혹은 부단한 노력으로 인생의 정상 언저리를 밟아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필부인 나의 눈으로 보기에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패배자’란 말을 -비록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있지만- 붙이는 것이 합당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엇이 한 때 성공의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의 삶을 패배로 이르게 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그 이유를 자기 자신의 지나친 자신감과 열정, 주변사람들(친구, 가족, 라이벌), 또는 시대를 타고 나지 못한 불운, 혹은 개인의 아둔함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이 패배한 인생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서술 분위기가 어두운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상에 올라서기까지의 과정도 함께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기까지 하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김대중 대통령과 비슷한 인생역정을 가졌던 라이너 바르첼(바르첼은 끝까지 집권하지 못했지만...), 아들에게 명성을 뺏긴 요한 스트라우스, 마르크스에게 부당하게 배척받은 라살 등의 삶의 이야기는 처음 접하기도 해서 인상 깊게 남는다.


언젠가 모 대기업 광고에서 역사는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카피가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었다.

역사는 과연 2등을 기억하지 않을까? 패배자를 기억해 주지 않을까?

학창시절 뭘 해도 10등 안에 들지 못했던 인생으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 책을 읽음으로서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등, 혹은 승리한 인생역시 한때 패배자였었고 패배한 삶의 조력이 있었기에 승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런데 2등이 패배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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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1-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 사회는, 전기들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로만 설정하고 기술하는 것일까? 협잡한 것도 아닐텐데. 황량하기만 한 사회란 야생속에 홀홀단신 헤쳐나가는 환상을 불러 일으키고 그 구도 속에 넣으려고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보이지 않는 묵직한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라는 자양분 속에 1,2,3등이 있을터인데. 인생을 개인의 실패-성공으로 구분하는 것은 또 다른 '아둔함'은 아닐까? 그 많은 성공의 그늘에 '우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리'의 명예회복을 꿈꾸며... 9할이상은 '우리'가 개입되어 있을터인데... '우리'의 시선으로 지난 사건들의 복원을 꿈꾸며...별네개씩이나 준데대해 공개적 반대의사 표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