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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이세요?



작년 태국으로 청소년 봉사활동을 하러 갔을 때 치앙마이 현지 직원들이 한국 관광객들에게 배웠는지 ‘빨리 빨리’라는 말을 우리에게 능숙하게 사용하는 걸 보고 신기하기도 했지만, 어디선가 들은 해외에 여행나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이 ‘빨리 빨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해서 기분이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참 빠른 나라이다.

해방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압축적인 고도 경제성장 속도는 서양 선진국들에 비해 몇 배나 빨랐고 그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도 불과 4-5년 전을 무색하게 할 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사용 환경은 말할 것도 없고, 고속철도에다가 매년 늘어나는 고속도로.......게다가 이제 어디 낯선 여행지라도 갈라치면 좀 더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네비게이션’을 이용하는 것은 필수이고, 혹 없는 사람들은 불안해하며 주변에서 빌려서라도 자가용에 부착하고야 안심하고 떠난다.


기술의 진보와 변화 발전이 그 자체만으로 인간 삶의 질을 올려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주로 자본가에 의해 주도되는 기술의 진보와 속도의 가속화 사이에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누려야 할 ‘인권’의 개념이 축소되거나 아예 무시되는 경향 역시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총알배송’ ‘당일배송’의 현란한 문구 속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의 혹독한 노동환경에 처한 택배 노동자들의 삶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예정된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언제 도착 하냐는 항의 전화가 택배기사의 이동전화로 난무한다.


요즘 한참 문제가 되고 있는 대형마트의 경우, 지역 경제에 미치는 폐해도 문제지만 대형마트는 존재 그 자체가 현대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의 대형마트가 24시간 운영체제로 불야성을 밝히고 있으며, 매장안의 계산대 앞에서, 우리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사못 조이는 장면 못지않게(마트계산대에도 컨베이어 벨트는 있다.......) 빠른 속도로 각종 상품의 바코드를 찍어내며,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봉투 필요하십니까? 포인트 카드 있으십니까? 고객님 얼마입니다. 얼마 받았습니다. 거스름돈은 여기 있습니다. 고객님,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를 거의 자동 녹음기처럼 말하고 있는 수납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속에 수납노동자들이, 손님이 많은 주말에는 6-8시간 동안 계속 서있는 상태로 일하면서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고작 15분을 쉴 수 있는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수납노동자들의 어색한 미소 속에 묻히고 만다.

다만 우리는 조금이라도 기다리는 줄이 짧은 계산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계산을 마친 다음에는 영수증을 예리한 눈으로 점검하며 총총히 주차장으로 향할 뿐이다.


작년 몇몇 시민노동운동단체에서 수납노동자들에게 앉아서 일할 수 있도록 의자를 설치하라는 운동을 펼쳤지만 사업주 측에서는 정말 의자만을 설치했을 뿐이다.(가본 분들은 알겠지만 계산대 뒤에 의자는 있지만 앉아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내 돈 내고 상품을 구입하는데 판매자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정당하고 옳은 의견이다. 다만 돈이 오가고 그에 따른 상품이 건네지는 과정만을 챙기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힘든 노동자의 현실은 존재해도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사업주의 부당한 처사에 우리가 말없이 동조하는 ‘방관자’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들 의식의 흐름을 되짚어 봤으면 한다.

‘소비자가 왕’이라는 다분히 봉건적인 표현에서 혹시 우리는 ‘노동자는 노예’라는 봉건적인 인식마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4시간 영업’ ‘당일배송’ ‘계산오류 시 5배 배상’의 호기어린 문구를 접할 때 마다 힘든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하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짐은 물론이고 ‘노동자의 인권’마저 배제된 자본가와 소비자의 밀약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퇴근 후 가족들과 함께 대형마트에서 소비자로서 쇼핑을 즐겼던 당신은.......혹시 내일 아침에는 노동자로 출근하지는 않으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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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악녀일기
    from 木筆 2009-12-20 12:36 
              ---수리남 사탕수수농장주의 딸 14세 일기---(쿡!하세요----------- 노예들은 쟁반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았다. 아빠는 힘이 세다. 아빠는 쟁반 뚜껑을 손수 열었다. 한 작은 게 보였다. 쟁반 안에서 몸을 잔뜩 쪼그린 채 앉아 있었다. 그게 몸을 일으켰다. 무릎까지 오는 꼭 끼는
 
 
 

3년 전, 출근하다 내가 탄 택시가 운전사의 부주의로 신호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꽤 빠른 속도로 가던 터라 운전사는 크게 다쳐서 의식을 잃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나도 조수석의 시트가 찢어질 정도로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온 몸에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한 열흘 정도 입원했었다.

퇴원 후에도 몇 번의 물리치료 끝에 거의 다 나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사고 후 처음 택시를 탔는데... 나는 그야말로 식겁을 하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택시기사의 격한 운전과 한 박자 늦게 밟는 브레이크는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나의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게 했고 가슴은 몇 번이나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한 증세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가급적 택시를 타려고 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면 혼잣말로 “내 돈 내고 이게 무슨 고생이람......”을 몇 번이나 되뇌게 된다.


 

 

93년, 대전을 그야말로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대전엑스포’가 열리던 기간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대전을 찾았었는데 그 틈에 나의 친인척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삼촌께서 그 당시 일흔 즈음이셨던 외할머니와 때마침 방학을 맞은 외사촌동생과 조카를 비롯한 예닐곱 명의 코흘리개들을 데리고 대전의 이모님 댁으로 오셨던 것이다.

한 번 가봤다는 이유로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낮에는 엑스포 구경을 갔었고 저녁밥을 먹고 나서는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그 당시 엑스포 개최를 축하하며 매일 밤 벌어졌던 불꽃놀이 구경을 하러 둔산 방면의 신시가지 쪽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자 아이들은 제각기 탄성을 질러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외할머니는 승합차 안에서 꿈쩍을 하지 않고 나오시질 않는 것이다. 진짜 대포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나중에는 아예 고개까지 숙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불꽃놀이도 재미있지만 할머니의 이런 반응도 재미있는지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고.....나 역시 아무리 시골할머니지만 아기같이 너무 순박하신 것 같아 실없는 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지난해 어느 때 쯤, 그때 할머니를 모시고 왔던 외삼촌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하게 예전 엑스포 때의 얘기가 나와서 다들 웃는 중에 삼촌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너그 할머니가 그리 대포소리를 무서버 하능 거는 6.25때 폭격하는 비행기 피한다고 엉겁결에 논 옆 고랑에 빠져서 겨우 살아나신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걸 거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사전적 정의로는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외상성 스트레스장애라고도 한다.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 등에 의한 사고에 의해 발생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라고 하며 치료방법으로는 정신과적 치료, 최면치료, 그룹요법, 약물치료, 신경차단 치료요법 등이 있다고 한다.

택시만 타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놀라는 나의 증상이 ‘트라우마 증세’라는 걸 안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삼촌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불꽃놀이 당시의 할머니에 대한 나의 웃음이 정말 죄송스러웠다.

나는 겨우 타박상정도에도 후유증이 남았는데 생사를 오고갔던 전쟁터에서 할머니의 충격과 후유증은 얼마나 심각했을 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40년이나 지났는데도 치유되지 않는 ‘트라우마’의 끈질김에 놀라기도 했었다.



 

 

문득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을 포함한 우리의 현대사가 민중들 개개인에게 얼마나 많고도 깊은 트라우마를 입혔을까 생각해 본다.

해방이후 커다란 재난을 비롯한 사고도 많았지만 특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국가권력에 의한 폭압과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 민중들에 대한 국가의 가해와 위협은 ‘군사’와 ‘독재’라는 말이 ‘정부’라는 단어와 결별하기까지는 계속해서 우리의 현대사의 곳곳에 상존하고 있었다.

떡볶기를 먹다 포장마차를 나온 시민들과, 유모차를 앞세운 엄마들을 시위 주동 혐의로 입건하고, 평화시위를 외치며 아스팔트위에 누운 시민을 군화발로 자근자근 짓밟고, 촛불을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초등학생에서 국회의원까지 무자비로 연행하는 일이 불과 몇 달 사이에 벌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이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무원칙한 인사를 휘두르고 그에 항의하는 노조위원장을 해고하고 있으며, 정권에 비판적인 대표적인 시민단체 몇 곳은 5,6공씩 표현을 빌리면 검경에 의해 ‘털리고 말았다’.

커다란 충격후의 트라우마 증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나와 할머니의 경우처럼 비슷한 경험을 다시 겪을 경우에, 히스테리성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 정부가 펼치고 있는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에 대해 ‘트라우마’까지 언급하는 것이 소심한 소시민의 ‘오버’라고 할지 모르나, 아침마다 신문을 펼치는 나의 심정은 그 옛날과 똑같은 어떤 장면을 활동사진처럼 자꾸 떠올리게 한다.

트라우마는 고도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라고 한다.

그간의 국가권력이 민중 개개인에 끼친 트라우마에 대한 치료는 기대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다시 그 때의 일을 기억하게 하는 일련의 행태는 제발 멈추었으면 한다.

현재의 심각한 경제위기 국면에서 평범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97년판 'IMF 트라우마’를 걱정할 형편이다.

제발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정부는 다른데 삽질하지 말고 잘한다고 약속한 경제나 우선 신경 썼으면 한다.

하긴 신경 쓴다고 그 실력에 잘될 것 같지는 않지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03839

얼마전 읽은 오마이뉴스 기사인데 사무실에서 읽다가 눈물나서 혼났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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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




촛불의 온기가 고마웠던 때에 촛불을 처음 들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촛불의 열기가 부담스러운 열대야의 계절이 왔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부는 촛불의 자제 호소를 넘어 폭력적인 진압정국으로 국면을 바꾸었으나 일본의 독도 교과서 명기, YTN사장의 주주총회 날치기 통과 등과 같이 오히려 촛불에 기름을 붓는 사건들만 연이어 나오고 있어 여전히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다.

87년 6월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과 종교계가 대거 합세한 7월5일에는 전국 100만 인파를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드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작 2MB정권은 왜 했는지 모를 사과 한번 이후에는 요지부동으로 촛불들의 요구에 ‘쇠귀에 경 읽기(이 말도 미국소라 못 알아듣나?)’로 화답하고 있는 형편이다.

‘촛불’이 길어지면서 촛불의 진로에 대해, 그리고 그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성과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며 요구한 사항들이 이뤄진 것이 없기 때문에 촛불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현상적으로 촛불이 아직까지는 정부에 대해 얻어 낸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번 촛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민사회를 비롯한 각 부문과 계층에 많은 성과와 교훈을 남겨줬고 또 그렇게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집회의 형식에서 통행금지가 있던 박정희 정권 때를 연상시키는 일몰 후 집회금지라는 뚱딴지같은 집시법 때문에 생긴 ‘촛불문화제’는 그야말로 문화제의 성격을 가미하면서 매일매일 작은 축제의 모습을 연출해 오고 있다.

그동안 이른바 ‘권’들의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줄 맞춰 앉아, 같은 색의 조끼를 맞춰 입고, 일사분란하게 외치던 구호에서 탈피해 다양한 구호형식은 물론이고 참가하는 사람들도 유치원 아이들, 초, 중, 고등학생, 대학생,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주머니, 노인 분들에게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계층과 부문을 탈피한 평화롭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집회, 시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이 자기생각을 마이크로 옮기는 ‘자유발언’ 시간에, 줄을 잇는 참가자들의 신청과 그들의 입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다양한 ‘반정부’ 적인 내용들 역시 예전, 그 어느 집회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함이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과 자유스러움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다수가 이른바 ‘깃발’아래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와 문제의식 아래 참가한 ‘시민’이란 점도 무척이나 놀라운 장면이다. 오히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외로이 깃발만 들고 있는 몇몇 단체나 정당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려운 정치구호만이 가로지르던, 그래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은행문턱 만큼이나 높아 보였던 광장의 문턱이 대폭 낮아진 것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광우병위험 미국쇠고기 반대’라는 온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였다는 것과 남다른 활동력과 감수성을 지닌 누리꾼들의 나라이기에 가능했다는, 남들 다하는 수준의 이해 정도 외에는 이번 ‘촛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서구의 68혁명이 피상적으로는 프랑스의 대학 평준화외에는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요구를 획득하는데 실패했지만, 68혁명이 혁명 이전과 이후의 서구 젊은이들이 기존의 권위를 대하는 태도, 인생관, 연애관 등에 있어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처럼, 미완의 혁명이라는 우리나라의 87년 항쟁도 그 이후 사회 각 분야의 전반적인 민주화 수위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진전했던 것처럼, 이번 ‘촛불의 바다’를 경험한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소비자권리, 시민권리 의식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며 더구나 촛불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 자가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용량이 2MB밖에 되지 않은 정부가 이를 눈치체기는 커녕 5공, 6공식의 대응만을 일삼고 있기에 이 촛불의 유효시한이 길어질 것 같은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간 촛불집회에 참가할 때 마다 딱히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아서 대부분 7살 난 딸아이와 함께 참가했었는데 점점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구호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친 소 너나먹어’ ‘이명박 물러가라’...

君師父一體라는 정체성 속에 ‘대통령’이란 직위를 가두고 대학 입학 때까지 깨지 못했던 내 경험에 비해서, 딸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대통령을 비판하고, 야유하게 해준 촛불집회가 고마울 지경이다.

이전까지는 대통령이라는 공무원도 단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비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민주시민의 기본 임무와 권한이라는 것을 딸아이에게 설명할 계기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어이없는 짓거리를 연속적으로 쏟아내는 대통령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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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8-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주전에 원고청탁으로 쓴 글이라 정세가 또 많이 바뀐 것 같다...
 

 

 

 

 

 

성인영화와 함께한 ‘불량’의 기억들에 대하여...

그때가 아마 80년대 중반의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하고 있다.
고교입시를 우수운(?) 성적으로 힘겹게 합격하고, 겨울방학을 맞은 4명의 죽마고우 청춘들에게 남해안의 작은 항구 도시는 너무나 한가롭고 심심했다.
그때 불쌍한 청춘들에게 무리 중 한 녀석이 호기 있게 외친 구원의 메시아는 “우리 영화 보러 가자!” 라는 외마디 외침이었다.
물론 그냥 단순한 영화는 아니고 ‘성숙한’ 우리들의 수준에 맞는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자는 얘기였다. 선생님들의 단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졸업만 남겨둔 상태에서 설마 걸려도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나름대로의 배짱으로 서로를 위로, 격려하며 두 달 남짓 되는 겨울방학동안 우리는 참 열심히 영화관을 들락거리며 불량청소년들이 되어갔다.
물론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엄격했다. 영화 출연자들의 의상비가 적게 들어갔을 것 같은 영화, 실외보다는 침대가 있는 방 등의 실내촬영에 집중한 영화, 과일제목의 영화(산딸기, 앵두, 사과 등)와, 우리 전통 사극도 빠지지 않고 봤었던 것 같다.
시내에 3개밖에 없는 극장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우리들을 위해서 극장주들이 프로그램편성을 협의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로 영화는 한 주도 빠짐없이 시내 선전벽보판을 채우고 있었다. 나중에 대학에 입학해서야 우리가 그 유명한 전두환 정권의 3S정책(Sex, Screen, Sport)의 시혜(?) 당사자였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씁쓸해 지긴 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자주 가니까 극장 앞에 앉아서 관리하던 기도 아저씨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할인까지 해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동네 영화관은 거의 다 두 편 동시상영이었는데 한번은 심형래씨 주연의 아동영화 ‘우뢰매’와 당대의 톱스타 ‘이보희’씨가 출연하는 성인영화 ‘어우동’을 동시 상영하는, 그야말로 우리 동네니까 가능한 경악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간만에 어깨를 펴고 당당히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상영시간을 잘 못 알고 들어가 ‘우뢰매’ 를 먼저 관람하는 불상사가 생겼는데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초딩 녀석들과 만화영화를 관람하고는, 연달아서 기어이 ‘어우동’ 을 보고 나오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끈기를 과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생각만큼 극장 입장이 쉬운 건 아니었다.
영화관 앞에서 서성거리며 혹시나 모를 선생님들의 단속을 대비하는 놈과 입장하는 어른이 없는 때를 주시하며 기다리는 놈, 자주 봐서 안면을 튼 기도 아저씨가 언제쯤 오는지를 살피는 놈으로 역할분담을 하고 이 세 조건이 일치하는 때를 기다려 순식간에 서너 명의 ‘불량스런 놈’들이 입장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야만 비로소 어두컴컴한 우리만의 낙원으로 입성이 가능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목소리와 함께 ‘행복의 전당’ ‘미의 향연'등의 ‘세련된’ 카피와 함께 예식장, 미용실 등의 지루한 지역 광고가 지나가면 드디어 장엄한 ‘애국가’가 흘러 나왔는데 여기서 작은 문제가 시작된다.
그 당시 내 고향 어른들은 어찌나 애국심이 투철하셨던지 영화내용에 상관없이 애국가 전주 시작과 함께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 엄숙한 표정으로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서 계셨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혹시라도 아는 어른들을 만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도대체 ‘뽕’ ‘변강쇠’ ‘애마부인’등의 영화가 애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애국가가 나올 때 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이미 세뇌수준으로 다짐한 나로서도 애국가와 성애영화의 양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영사기 필름이 돌아가면서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들은 그 이전까지의 불안과 초조, 걱정을 모두 잊고 그야말로 느긋이 허리를 길게 빼고 앉아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영화 중간 중간 격정적인 정사 장면이 나오면 극장 안은 배우들의 신음소리 외에는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해 졌고 정사장면이 끝나고 나면 우리들 중 한 두 명은 으레 화장실을 갔다 오곤 했는데 그 친구들에게서 야릇한 밤꽃 냄새가 났었던 것 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우리들 모두는 그 친구가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친구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가슴 미어지는 배려와 연대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우정이었을까? 아님 어차피 우리는 공범이라는 동류의식이었을까?
어쨌든 매번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문을 나설 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햇볕으로 인한 ‘밝음의 부끄러움’은 아마 성인이 되어서는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한 낯 설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잣대로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가면 ‘불량’이 되어버리는 시대의 ‘기준 긋기’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효한 것 같다.
다만 내 ‘불량시절’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이 있어 소심한 ‘불량’ 행동이나마 과감히 저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가르쳐 준대로 착하고 바른 행동을 같이 하는 것 보다는 왠지 삐딱한  나쁜 짓을 같이 한 친구들과의 ‘동지의식’이 더 깊어졌었고, 그러한 일종의 연대의식이 나의 청소년기를 키워온 하나의 자양분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性)’을 예로 든다면 나의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어른들도 보기 민망한 ‘하드코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대가 지금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굳이 친구가 없어도 컴퓨터 모니터만으로도 ‘불량’을 접할 수 있는 요즘 세대가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불량’도 친구가 있고, 에너지가 있고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유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서 가장 에너지가 왕성하게 분출하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청소년기에 ‘불량’이란 녀석이 붙어서 ‘불량청소년’이란 조어가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황금 같은 시기의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공부’에만 쏟아 붓고 있는 2008년의 청소년들에게도 우리세대식의 ‘불량’을 허락하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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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 전의 이야기지만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고등학생 시절이란 것이 있었다.

혹자는 그리운 학창시절 운운하며 그 시절을 떠올리곤 하지만, 나의 경우는 고등학교 3년 동안을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어떻게 그러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로 몸서리가 쳐진다.

입학하는 날부터 밤 10시 30분까지 계속된 야간자율학습은 명절과 개교기념일(이 날은 이른바 성공한 선배님들께서 밴드를 불러서 운동장에서 개교開校를 너무나 열성적으로 기념하셨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공부가 도저히 안 된다.)을 제외하고는 계속되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하라는 학교 측의 ‘친절한’ 배려로 청소는 아침에 주번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책상사이를 물걸레로 대강 한번 바르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몇 년을 묵혀온 먼지로 인해 항상 기관지 염증과 감기 증세에 시달리는 다수의 학생들은, 흔들어서 소리가 나지 않아야 진품이라는 진해거담제 ‘용**’이란 약을 늘 가지고 다녔다.

대학입시에 들어가지 않는 과목의 수업은 3년을 통틀어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시간만 수업을 했고, 당연히 음악과 미술, 체육 수업시간은 2학년 이후로는 공식 국, 영, 수 자율학습시간이 되어 버렸다.

짧은 머리와 단정한 옷차림에 저항하는 투사형 학생들에게 돌아오는 건 언제나 선생님들의  몽둥이 질이었고 지난밤 ‘자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유’를 찾아 내달음질 쳤던 야간자율학습 탈주학생들에 대한 몽둥이질 역시 매일아침 거의 모든 반마다 계속되었다.

그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수많은 이름 모를 나의 후배들은 학교정문을 나가자마자 이번에는 온갖 사설학원에서 마중 나온 승합차에 실려 가서 자정을 넘긴 시간까지 책걸상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4월 15일, 정부가 우열반 편성, 0교시, 심야보충수업에 대한 규제를 푼 ‘학교자율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는데, 정부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학교 자율화’를 통해 그동안의 부작용을 막겠다는 나름의 조치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율’이 누구를 위한 자율인지에 대해서는 애써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의 교육정책 안에 학교의 당당한 구성원이라 할 수 있는 학생에게 진정한 자율이 존재했었던가?  교장으로 대표되는 학교 내 권력의 자율이 모자라서 이 땅의 교육현실이 오늘날처럼 팍팍해 졌을까?

며칠 전 서울에서 있은 ‘학교자율화반대 청소년 촛불문화제’에 청소년들이 들고 나온 피켓에는 “밥 좀 먹자. 잠 좀 자자.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이런 구호는 ‘공부’를 ‘일’로 바꿔 놓으면 19세기 산업자본주의의 폐해가 극에 달했을 시기, 노동자들의 주장이었다. 1970년대의 대한한국, 밀폐된 다락방 같은 공장에서 하루 12시간 이상씩 미싱을 돌렸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자기 몸을 내던졌던 전태일 열사의 외침이었다.

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는 모르쇠에 가깝게 일관하며, 갑자기 튀어나온 정부당국의 “학교자율화 추진계획”이 청소년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행복추구권과는 별 연관이 없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학생들의 참 행복을 위해 그들에게 진정한 자율을 줘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다면 118년 전의 노동절에서나 들었을 법한 노동자들의 구호를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서 집단적으로, 조직적으로 들을 수 있음을 정부당국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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