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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처음 왔을때....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1892.1.14– 1984.3 6) was a Protestant pastor and social activist.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te.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들이 촛불 든 시민을 때리고 짓밟아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용산 철거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한 전교조 선생님을 해직하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을 때도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고 해고당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의 반대와 언론노조, 야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언론악법을 국회에서 통과 시켰을 때도

나는 괜찮았다.

어차피 ‘개그콘서트’와 ‘1박2일’은 계속 볼 수 있을 거니까...

 

 

마침내 그들이 나와 내 가족을 잡아 갔을 때

어떤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어떤 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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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KCY
 

이 책을 읽고 나신 후 아마 먼 내용인지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셨을 거라 생각이 됩니다. 저 역시도 막상 이 책을 읽고 나서 맥 빠지는 기분이 들었으니깐요.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고전을 읽어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주변에서 흔히 말만 들었던 이름 있는 책들, 어느 퀴즈 프로에서나 들어봤음직한 책들, 대충 줄거리나 작가만 알지 제대로 읽어본적이 없던 책들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 아직까지 회자가 되고 잊혀지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물론 있었구요. 이러한 이유들이 제가 이 책을 선정하게 된 이유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1915년에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다. 정작 본인의 유언은 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꺼려했지만 그의 친구 막스 브로트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되었다. 사연이 있는 책이라 그런지 내용에서도 주인공은 사연이 많은 인간이죠. 어느날 갑자기 커다란 ‘벌레’로 변해 버린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 다소 엉뚱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끝이 궁금한 책이다. 마지막에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일만 하는 인간의 자화상을 통한 사회의 비판과 이를 통한 가족애 등 다양한 생각과 결말을 예상케 하였지만 결론은 허망이었다. 기대가 커서 그랬을까, 아님 생각대로 되지 않아서일까, 책을 다 읽고나서는 왜 이 책을 골랐지? 왜 이 책이 계속 회자가 될까? 하는 생각만 너무 많이 들었다. 한편으로 이 책은 20세기의 산물이지만 난 21세기에 살고 있으니 당시와는 비교도 안되는 지적수준의 소유자이기에 책이 우습게(?)보인건가 하는 약간의 자만심이 잠시 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벌레’가 아니라 장애가 온다든지, 의식이 없다든지 등의 상태로 주인공이 ‘변신’을 하였다면 이야기 전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등 다양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기한 점은 변신을 하였는데도 주인공은 일 걱정뿐이었으며 마지막까지도 커다란 벌레가 아닌 ‘그레고르 잠자’의 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끝까지 ‘그레고리 잠자’로서의 의식을 지니고 행동을 하였으나 가족을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벌레는 그냥 ‘벌레’일뿐이었다. 그가 ‘벌레’가 되서 좋은 점은 가족들이 돈을 벌어다주는 사람이 없어지자 자신들 스스로 조금씩 ‘변신’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곤 주인공이 단절과 외로움 속에서 죽어만 가는게 이 이야기의 전부이다.

사람마다 각각 무서워 하는게 있다. 귀신, 트라우마, 뱀, 벌레 등등 하지만 가장 무서워 하는게 ‘고독’이라고 한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외형은 벌레이지만 마지막까지 ‘벌레’그레고르가 아닌 인간‘그레고르’로 비춰지길 바랬고 의식 또한 여전히 외무사원 그레고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도 인정해주지도 않았지만 그레고르는 여전히 ‘그레고르’였다. 난 외무사원 그레고르인데 왜 왜 나를 알아주지 않는 걸까 하는 외침만이 메아리치는 ‘고독’속에서 지쳐간다.
 

한 집의 생계를 꾸려가는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오빠로서 사람들은 그레고르처럼 가족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삶을 살아간다. 난 오늘도 고독속에서 살아가는지 아니면 어떤 의미를 부여받고 사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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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J

작품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시대적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자본과 인간간의 관계 규정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사회에서도 돈을 제대로, 많이 버는 것만이 인간의 정체성과 역할에 충실한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때 카프카의 ‘변신’은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들이 실직과 사업실패로 하루아침에 사회의 벌레로 변한 사연들이 얼마나 많은가?

경제력 없고 나이 많은 노인들,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을 바라보는 일부 시선이 이 작품 ‘변신’에서 가족들이 ‘잠자’를 바라봤던 시선들과 다를 것이 있는가?

‘벌레’에 대한 징그러울 정도의 충실한 묘사와 가족들 특히 여동생의 그레고르에 대한 점진적인 태도변화는 짧은 분량의 소설이었음에도 작가가 말하고자 한 의도를 잘 담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벌레’로 변했던 경험, 혹은 주변 사람들이‘벌레’로 변한 경험에 대해 이야기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이 사회가 사람을 벌레로 변신하게 하는 조건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이야기 해 보자...



OJH 

나라 안밖으로 경제적인 문제로 어두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서 실직한 가장이 가족을 살해 한뒤 자신도 자살했다는 어제의 뉴스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닌 듯 무감각해지고...

가끔은 집밖을 나오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가장인 우리 신랑도 그렇단다. "나 한달만 쉬면 안될까? 경제적 여유가 되냐?"

그레고르도 그렇고 싶지 않았을까?

변신이란 단어는 새롭고 긍정적인 모습이 그려지는데 이 책을 읽으며 뭔가 꺼림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변신이 아니였을까?

또 바라보는 입장에서 변신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쉽게 잊혀진다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였다.

왜? CY샘이 이책을 선정했을까? 단지 짧고 고전이라서만은 아닌것 같다.

일하는게 힘든가? 변신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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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서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의 깔끔한 문체와 내용전개가 느껴진다.  

미셀린 이샤이 교수의 원본을 읽고, 감히(?)추가 내용과 개정을 건의한 조효제 교수나 그것을 흔쾌히 수용해서 한국어 개정판에 조교수의 의견을 받아들인 이샤이 교수의 아름다운 교류가 돋보인 서문이었다. 

인권개념이 서구지향적인가? 라는 강의실에서의 논의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줄 수 있는 내용이 책의 앞머리에 펼쳐진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기독교, 유대교 등에 뿌리를 둔 서양의 인권 전통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불교, 유교, 힌두교 등의 폭넓은 인권논의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부록을 빼고도 600p나 되는 책의 여정이 설렌다. -1월 9일 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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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를 시작으로 켜지기 시작한 ‘촛불’들이 그동안 새 정부의 시장만능주의 정책에 의해 억눌려 왔던 교육체제, 의료와 공기업의 민영화, 왜곡된 언론, 최근에는 일본정부의 독도 교과서 명기 등의 많은 사회 문제들과 만나면서 두 달여를 줄기차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시민’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한 계층, 계급만의 촛불이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노인을 아우르는 세대의 넘어섬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와 노동자, 학생, 실업자, 자영업자 등 각자가 처한 현실 경계의 넘어섬이 ‘미 쇠고기 수입반대’ 라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자유롭게 만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시작이 국민의 건강, 특히 자라나는 자녀들의 건강을 우려한 ‘광우병 위험 미국 쇠고기 수입’이 이슈였기 때문에 계층과 부문을 뛰어넘는 참여가 가능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이 시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촛불 광장이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된 것 또한,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상봉, 서경식 선생의 대담을 엮은 책 ‘만남’의 내용 중에 서경식 선생이 몇 해 전부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어린 아이를 위해 매월 얼마씩 후원하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은 국제적인 개발NGO들에 의한 후원 시스템이 쉽고 다양해 졌기 때문에 서경식 선생의 후원이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후원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은 알다시피 이스라엘과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인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아이를 후원하고부터는 신문 국제면의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폭격 소식이 그냥 넘어가 지지 않더라는 내용이었다. 굳이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경식 선생의 창(窓)이 팔레스타인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는 것이어서 새삼 가슴 뭉클하게 읽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의 21세기적 가치는 공동체의 가치나 사회적 연대의 틀 보다는 ‘부자 되세요’ 로 대표되는 나만 잘살면 된다는 ‘나’의 틀로 가두어 버림에 있었다는 가설이 일정정도 맞는다면, 2008년에 켜진 ‘촛불’의 의미와 가능성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열린 생각으로 마음의 창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개혁의 창, 의료보험 민영화의 창, 교육문제의 창 등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창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우리사회는 각자 개인들에게 좀 더 많은 창을 열기 원하고 있다.

당장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7월 1일부터 900여일에 이르는 긴 투쟁 끝에 다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는 1000일이 넘는 피눈물 나는 투쟁을 펼쳐오고 있다.

조금 멀리는 북녘의 동포들이 여전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살이에 남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창을 열고 좀 더 넓게 좀 더 멀리 창밖의 사회를 바라본다면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머지않은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2008년 여름, 우리의 창은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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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게 참 어렵게 느껴진다. 내 주변에서는 아직까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죽은 일이 없고 병으로 인해 죽음으로 다가가는 일을 한번도 지켜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죽음에 대한 글을 쓴다는게 어렵게 느껴진다.

몇주전 왕래가 많지 않았던 작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간암으로 투병하던 작은외할머니의 장남인 삼촌이 돌아가셨다. 이 두 분의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달랐다. 작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모두가 잘된 일이라며 차라리 돌아가시는게 더 잘된 일이라고 말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삼촌의 장례식장에서는 모두가 다른 이유로 울고 있었다. 우리 외할머니와 이모들은 삼촌과 같은 나이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과 젊은 나이에 죽은 삼촌의 인생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렸고 자식들은 병든 아버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에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작 병간호와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외숙모는 의외로 담담했다. 이미 이러한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한 것처럼.. 그런 외숙모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모든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럼 이 진리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난 길을 지나다 혹은 엘리베이터를 타며.. 만약 내가 지금 불의의 사고로 혹은 시한부 선고로 죽는다면 지금의 인생에 후회가 없을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다. 내 대답은 항상 ‘아니다’였다. 안 해본게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다 해본 후 만나는 죽음 앞에서 난 겸허하게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인 김치영 목사처럼 자신의 죽음을 서서히 준비할 수 있을까? 믿음의 자녀였던 그에게도 죽음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이러한 인간적 고통을 난 믿음으로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난 이번 독서모임을 통해 묻고 싶은 게 있다. 현재 독서모임을 하고 있는 우리 회원들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sm-







sm: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jh : 신앙과 죽음의 관계 - 신앙이 있으면 좀 더 편한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sj : 인간 존엄을 지키면서 맞는 죽음의 조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종교가 인간의 죽음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ye :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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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7-1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윗글은 독서모임에 참가한 후배의 글인데...글쎄..저도 종교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죽음은 그냥 죽음이었으면 좋겠어요...언젠가 철학자 이**씨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났는데 자기는 죽을병 걸리면 미련없이 복어독을 먹고 자살하고 싶다고...위에 소개한 책은 우연히 읽었던 책인데 종교가 없는 저에게도 삶과 죽음의 의미, 죽음을 맞는 자세와 주변사람들의 반응 등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계기를 만들어 준 책이었어요...뭐 사실 요즘은 용량딸리는 대통령 한놈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팍팍하지만...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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