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려던 이건희 삼성그룹회장에 대해서 학생들이 반대시위를 벌였던 문제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대학 내에서는 혼란이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사태 직후 보직교수들의 총사퇴와 시위 주동학생들의 징계논의, 그리고 보직교수들의 사퇴반려 결정 등이 연이어 나오는 가운데 ‘총학 없는 평화고대’라는 학생단체에서는 “총학생회가 폭력시위로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총학생회 탄핵안을 학생대표자 회의에 부쳤다고 한다. 탄핵안은 19일 밤 장시간의 대표자회의 끝에 부결되었지만 학교당국 측에서는 여전히 주동학생들의 징계수위를 고심하고 있다고 하니 사건의 여진은 계속되고 있는 것 같다.

여느 사건의 경우처럼 이번 사건도 보수언론과 극성 네티즌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의 수순을 밟은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사태 후 상대적으로 ‘차분했던’ 언론이 밝힌 바에 따르면 애초 학생들의 계획은 학위 수여식장의 레드 카펫 옆에서 평화적인 피켓시위를 하려고 했지만, 이건희 회장이 기습적으로 뒷문으로 나가고 셔터를 강제로 내리는 과정에서 마찰이 있었으며, 더구나 학교 당국에서 같은 학생 신분인 체육학과 학생들을 시위대 앞에 배치함으로써 인해 시위학생들을 자극시켰다는 것이다. 같은 학교 체육학과 학생들을 시위대 앞에 배치한 고려대의 발상은 정말 지극히 ‘삼성스러운’ 발상이 아닌가?

그럼에도 앞뒤 살피지 않고 침소봉대하는 언론과 보직교수들의 사표를 받으면서까지 폭력학생 운운하는 고려대 당국의 처사를 보면서 나와 같은 세대들이 ‘91년의 외국어대학교 정원식 총리 밀가루 투척사건’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앞서 나가는 것일까?
91년 정원식총리의 밀가루 투척사건의 제대로 된 정황은 둘째 치고 사건직후 그 당시 언론이 보여줬던 행태는 그야말로 가관 그 자체였다.

우선 TV 방송은 그날 밤(혹은 그 다음날) 즉시 정규방송 대신에 “우리교육 이대로 좋은가”류의 토론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했다. 콧수염 단 김모 교수 등의 보수 우익인사를 출연시켜 학생들을 패륜아 취급하는 코미디를 연출했으며, 주요 일간지에는 ‘一人之下 萬人之上에게 어찌 그런.......’ 류의 제목이 일제히 1면을 장식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미 총리를 “一人之下 萬人之上”으로 비유했으니 행정수도 헌법소원 결정문에서 ‘경국대전’을 언급한 것이 뭐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언론의 이러한 대단한 활약으로 극도로 위축된 학생운동권의 시위는 거짓말 같이 사라지고 당시 분신정국으로 위기에 몰려있던 집권 민자당은 얼마 후 벌어진 지자체 선거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번 ‘고대사태’는 91년의 경우와는 여러 방면에서 크게 다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언론과 ‘고대학생 삼성 취업 다했네...’와 같은 저급한 논리를 재생산 해내는 네티즌의 시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10여전의 언론과 다르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매년 엄청난 매출을 올리는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의 주도적 기업 총수에게 명예 철학박사 학위 하나 주는 것이 아까워서 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삼성은 광고의 이미지에 나오는 것처럼 3세계의 지뢰를 제거하고 멀리 중국의 황사 방지숲까지 무상으로 조성하는 오지랖 넓은 초다국적 기업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 많은 계열사 중 어느 한곳도 노조를 허용하지 않고 무노조 신화를 고수 하고 있는 무지막지한 기업이기도 하다.

노조를 만들다 퇴직당한 노동자의 회사 앞 시위를 막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회사 앞에 빽빽하게 나무를 심어 시위자체를 못하게 한다든가 노조 설립 노동자에게 휴대폰 위치추적을 했다는 명백한 의혹(?)까지 받고 있는 것 또한 바로 삼성인 것이다.

휴대폰 위치 추적으로 노조설립에 관계한 노동자를 감시했다며 삼성관계자들을 고소한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은 오히려 지금 감옥에 있다고 한다. 검찰의 증거 불충분 사유로 인한 무혐의 결정 후 곧바로 법원이 김씨에게 삼성측이 고발한 명예훼손죄에 관하여 징역 10월의 실형을 선고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건희 회장의 박사학위 수여를 저지한 사건보다 더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이 적반하장의 뉴스거리를 주요 언론에서는 철저하게 외면해 왔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현 정권에 대해서는 융단폭격식 공격을 가하는 주요 언론들이지만, 살벌한 자본주의 논리아래서 국내 최대 광고주에게 쓴소리를 뱉어내기에는 여전히 언론의 힘은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대전충남 민언련 회보 기고글 200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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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전 쯤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의 통일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시작할 때는 특별히 통일운동에 대해 거창한 사명의식 같은 건 없었고, 학교를 그만둔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배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시작한 이른바 첫 직장생활이었다.

학생운동 할 때의 얄팍한 능력을 가지고 뛰어든 운동판이었으니 힘들고 어려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통일운동을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뿌듯함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향출신의 음악가란 사실만 알고 있었던 ‘윤이상’선생님이 현대음악계의 거장으로서 ‘동백림’사건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켰다.

비교대상은 될 수 없었지만 같은 고향이란 점과 통일운동의 끈으로 윤이상 선생님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역의 보잘 것 없는 활동가였던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자랑거리였다.


얼마전 국정원에서는 민청학련, 인혁당사건, 등과 함께 윤이상, 이응노화백 등이 연루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도 과거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진실위원회의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매년 이맘때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님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Memory'란 주제를 가지고 3월 17일부터 그의 정신적인 고향 통영에서 열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재계와 학계, 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발기한 ‘윤이상 평화재단’도 공식 출범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고 하며, 윤이상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곧 만들어진다고 하니 10년이란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행사를 지켜보면서도 왠지 허전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은 왜일까?


윤이상 선생님은 살아생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올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1994년,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강제추방된지 25년만에 서울, 광주, 부산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리고 윤이상 선생님도 김영삼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고 입국을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정부는 선생님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고 오히려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국입국을 준비했던 윤이상 선생은 당연히 각서를 거부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일년후인 95년 11월 4일 고향 통영의 푸른 바다를 베를린 자택에 걸린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란 비통한 말씀을 남기고, 고향 통영에서 가져온 한줌의 흙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영원히 잠들고 만다.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에서 동백림사건이 우선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늦게나마 잘된 것이지만 40여년이 흐른 세월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사뭇 걱정이 앞서는 것은 기우일까?

윤이상 평화재단측의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남한에서 윤이상선생님에 대한 민간차원의 다양한 행사와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윤이상선생님은 거의 명예회복을 이룬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명예회복이었다면 윤이상선생님은 1994년에 이미 남한에 들어왔을 것이다. 윤이상 선생님은 생전 한반도의 휴전선 남쪽을 제외하고는 세계음악계에서 현존하는 6대 현대음악가로 인정받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비록 노무현정부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 할지 모르지만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바르샤바의 옛 게토(집단수용지)지역을 찾아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사죄한 것은 나찌도 독일이었고 빌리 브란트도 독일이라는 상식적인 역사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윤이상선생님 타계 10주기에는 평양의 윤이상관현악단도 초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정중한 초청으로 윤이상 선생님의 미망인이신 이수자여사가 고국땅을 밟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이 한반도에서 당신의 노력으로 음악을 통한 평화적 남북 교류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조용히 하고자 한 말씀을 우리는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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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모 프로축구단이 경기 전 행사에 애국가 연주를 없앴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매일 크고 작은 사건들이 터져 나오는 마당에 프로축구 식전행사에 애국가를 없앤 것이 뭐 대단한 사건이 될 수 있겠냐 만은, 이번 시도가 국내 프로스포츠 경기 사상 최초로 이뤄졌다고 하니 그 의의가 작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국내 모든 프로스포츠 경기는 일률적으로 모든 경기 전에 애국가 연주를 했다고 한다. 프로야구 관람을 좋아하는 내 개인적 경험을 생각해 봐도 이미 경기 전에 얼큰하게 취해서 고래고래 고함치시는 아저씨들과 이제 막 입장해서 자리 잡으려는 사람들 등 각종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나라 만세’는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애국가 연주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학창시절의 기억이 있는데, 중학교 3학년때 쯤으로 기억한다. 고교입시를 우수운(?) 성적으로 힘겹게 합격하고 겨울방학을 맞은 절친한 3-4명의 청춘들에게, 지방 소도시는 너무나 한가롭고 심심했다.
그때 불쌍한 청춘들에게 무리 중 한 녀석이 외친 구원의 한마디는 “영화 보러 가자!” 였다.
물론 그냥 단순한 영화는 아니고 ‘성숙한’ 우리들의 수준에 맞는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자는 얘기였다. 선생님의 단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졸업만 남겨둔 상태에서 설마 걸려도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배짱을 부리며, 두 달 남짓 되는 겨울방학동안 우리는 참 열심히 보러 다녔다. 물론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엄격했다. 영화 출연자들의 의상비가 적게 들어갔을 것 같은 영화, 실외보다는 침대가 있는 방 등의 실내촬영에 집중한 영화, 과일제목의 영화(딸기, 앵두 등), 우리 전통 사극도 빠지지 않고 봤었던 것 같다. 거의 다 2편 동시상영이었는데 한번은 우리나라 최초의 실사와 애니메이션 합작영화인 심형래씨 주연의 아동영화 ‘우뢰매’와 성인영화 ‘어우동’을 같이 동시상영 했던 적도 있었다.
나중에 너무 자주 가니까 극장 앞에 앉아서 관리하던 기도 아저씨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할인까지 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영화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목소리와 함께 ‘행복의 전당’ ‘미의 향연'등의 ‘세련된’ 카피와 함께 예식장, 미용실 등의 지루한 지역 광고가 지나가고 드디어 장엄한 ‘애국가’가 흘러 나왔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내 고향 어른들은 어찌나 애국심이 투철하셨던지 영화내용에 상관없이 애국가 전주 시작과 함께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 엄숙한 표정으로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서 계셨다. 물론 우리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고개를 푹 숙이고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도대체 ‘뽕’ ‘변강쇠’ ‘애마부인’등의 영화가 애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기야 그때만 해도 가수들이 내는 모든 음반의 끝 곡은 ‘건전가요’(대표곡 ‘어허야 둥기둥기’)란 것을 꼭 삽입하도록 의무화 하는 시절이었긴 했지만,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웅장한 애국가가 나올 때 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이미 세뇌수준으로 다짐한 나로서도 애국가와 성인영화의 양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경기라면 모르겠지만 국내 프로축구는 팀당 매주 두 경기씩 8개월간 계속 경기를 하고, 프로야구도 연간 500여 경기를 하는데 그때마다 매번 애국가를 연주하는데 대해 이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각종 프로스포츠에는 외국인 용병들도 2-3명씩 뛰고 있는데 그 선수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애국가를 듣고 있는 것일까?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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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7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흥분 속에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원로 노정객 ‘자오쯔양’이 16년간의 가택연금 상태에서 향년 85세를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사실 ‘자오쯔양’만 해도 중국 이름을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부르던 때의 인물이라서 그런지 이름만 들어서는 누군지를 알기가 쉽지 않았지만 조자양(趙紫陽)이란 한문이름을 언론에서 보고 나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1980년대 중국의 개혁개방은 자오쯔양과 후야오방(胡耀邦)이 진두에서 이끌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당시 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정치분야를, 자오쯔양은 국무원 총리로서 경제분야를 책임지고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면서, 국내외에 사실상 덩샤오핑의 후계세력으로 자리매김 했었다.

하지만 1986년 학생시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당내 보수파의 공격으로 다음해 1월 후야오방이 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면서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의 개혁개방 쌍두마차 체재에 변화가 오는데, 비록 후야오방은 실각했지만 자오쯔양은 덩샤오핑의 변함없는 지원에 힘입어 후임 총서기로 나서 중국내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그러나 승승장구 하던 자오쯔양은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사태’의 해결방법에 대한 당 원로와의 대립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중국 현대사를 언급 할 때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인 ‘천안문 사태’는 1989년 4월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사망이 계기가 되어 중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천안문 광장에 모여 후야오방의 재평가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한 대규모 시위를 말한다.
천안문 사태의 해결방법에 대해 덩샤오핑을 비롯한 보수파는 무력진압을 결정한 반면 자오쯔양은 끝까지 그에 반대해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여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것을 주장하며, 보수파와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덩샤오핑에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

하지만 당의 공식적인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실권이 없었던 자오쯔양은 결국 덩샤오핑과 당원로들에 의해 지위와 권한을 박탈당하고, 1989년 5월 19일 새벽 4시무렵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중이던 학생들에게 나타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학생 제군, 우리들이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 채 죽을 때까지 일체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물론 그 이후 덩샤오핑과 당원로들은 시위대가 모여 있는 천안문광장에 탱크를 비롯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해 수천 명의 부상자와 300여명의 사망자를 일으키는 대규모 유혈 참극을 일으키고 만다. 이처럼 중국의 민주화와 천안문사태, 자오쯔양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오쯔양의 사망이후 중국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실망스러움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중국 당국은 자오쯔양 사망소식을 관영 신화통신을 통해 짧게 보도하면서 중국 내의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 소식을 싣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한편, 심지어 우리나라와 같이 외국에서 들어가는 신문에서 자오쯔양 사망소식을 아예 통째로 오려버리고 CNN과 같은 외신보도에서도 자오쯔양 관련 소식은 철저하게 통제했다고 한다.

물론 천안문 사태가 후야오방의 사망으로 촉발된 것이기에 중국정부가 자오쯔양의 죽음으로 가졌을 부담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런 식의 유치한 언론통제나 하고 있는 중국정부를 보고 있으려니 중학교 때, 도무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중국을 일컬어 ‘죽(竹)의 장막’이라고 배운 것이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더구나 지금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천안문 사태의 무력진압에 연관되어 있는 ‘장쩌민’에 비해 천안문사태의 책임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데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은, 역설적으로 중국정부가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얼마나 부담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책에서 ‘역사의 미래는 과거로부터 온다’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1980년 광주항쟁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진 바탕위에서 오늘날 미흡하나마 민주주의의 정착과 또 민주주의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같은 맥락으로 친일문제가 해방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민족정통성이나 보수의 정체성에 대해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도 정치사회 전반의 민주화가 진행되지 않고 지금처럼 경제력만 높아진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기형적인 지독한(?) 자본주의 체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13억 인구를 자랑한다면서 그 많은 국민을 상대로 과거에 대한 진정한 반성없이 무식한 방법으로 언론통제나 일삼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쩐지 중국이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한 나라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권력과 사회전반에 어떤 부작용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이미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중국인민들도 월드컵 축구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 중국이 나가지 못했다고 창피해 할 것이 아니라 15년이 지난 현재도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천안문 사태’에 대해 더 안타까워하고 탄식해야 할 것이다.

이글을 쓰는 오늘 아침 신문에도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에 대해 쓴 베스트 셀러 전기(傳記)에 대해, 민감한 중국현대사와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책 내용이 중국 정부당국의 견해와 맞지 않는다며 판금을 당했다는 소식이 국제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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