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를 시작으로 켜지기 시작한 ‘촛불’들이 그동안 새 정부의 시장만능주의 정책에 의해 억눌려 왔던 교육체제, 의료와 공기업의 민영화, 왜곡된 언론, 최근에는 일본정부의 독도 교과서 명기 등의 많은 사회 문제들과 만나면서 두 달여를 줄기차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시민’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한 계층, 계급만의 촛불이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노인을 아우르는 세대의 넘어섬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와 노동자, 학생, 실업자, 자영업자 등 각자가 처한 현실 경계의 넘어섬이 ‘미 쇠고기 수입반대’ 라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자유롭게 만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시작이 국민의 건강, 특히 자라나는 자녀들의 건강을 우려한 ‘광우병 위험 미국 쇠고기 수입’이 이슈였기 때문에 계층과 부문을 뛰어넘는 참여가 가능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이 시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촛불 광장이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된 것 또한,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상봉, 서경식 선생의 대담을 엮은 책 ‘만남’의 내용 중에 서경식 선생이 몇 해 전부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어린 아이를 위해 매월 얼마씩 후원하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은 국제적인 개발NGO들에 의한 후원 시스템이 쉽고 다양해 졌기 때문에 서경식 선생의 후원이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후원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은 알다시피 이스라엘과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인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아이를 후원하고부터는 신문 국제면의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폭격 소식이 그냥 넘어가 지지 않더라는 내용이었다. 굳이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경식 선생의 창(窓)이 팔레스타인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는 것이어서 새삼 가슴 뭉클하게 읽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의 21세기적 가치는 공동체의 가치나 사회적 연대의 틀 보다는 ‘부자 되세요’ 로 대표되는 나만 잘살면 된다는 ‘나’의 틀로 가두어 버림에 있었다는 가설이 일정정도 맞는다면, 2008년에 켜진 ‘촛불’의 의미와 가능성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열린 생각으로 마음의 창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개혁의 창, 의료보험 민영화의 창, 교육문제의 창 등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창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우리사회는 각자 개인들에게 좀 더 많은 창을 열기 원하고 있다.
당장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7월 1일부터 900여일에 이르는 긴 투쟁 끝에 다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는 1000일이 넘는 피눈물 나는 투쟁을 펼쳐오고 있다.
조금 멀리는 북녘의 동포들이 여전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살이에 남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창을 열고 좀 더 넓게 좀 더 멀리 창밖의 사회를 바라본다면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머지않은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2008년 여름, 우리의 창은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