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보며 - 2000년에 1887년을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3
에드워드 벨러미 지음, 김혜진 옮김 / 아고라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2014년 현재를 두고 113년 후인 2127년의 사회를 얼마나 예측할 수 있을까? 어릴 적 공상만화에서 길다란 에스컬레이터를 보고 그것을 그저 상상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금세 그것은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에드워드 벨러미가 1887년의 시각으로 113년 후인 2000년을 예측한 것이 모두 맞았다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당시의 비효율적인 여성의 복식이나 생활 방식을 비롯한 몇몇 부분은 예측이 정확해서 놀랐다. 하지만 진정 놀라야 할 부분은 그가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시작된 유토피아 사회를 구축하는 능력이 무척 세심하고 견고하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으며 작가가 구축한 사회, 정치, 예술, 교육 등 전반적인 이상사회의 요소들을 확인할 때마다 작가의 역량에 놀라게 된다.

 

그렇다. 이 책은 소설이다. 하지만 여느 소설가와 달리 에드워드 벨러미는 소설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점을 밝힌다.  가르치는 느낌을 적게 주기 위해 소설이라는 양식을 빌렸다는 점에서 그러한데 그렇다고 이 소설이 폄하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로서도 충분히 흥미롭고 가치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책은 출간 당시 [톰 소여의 모험]이나 [벤허]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고, SF문학의 효시가 된 작품이라고 하니 소설로서 인정받았다. 실제로 웨스턴이 잠이 들고 잠이 깨는 것은 해리 포터가 1과 1/2 역을 통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지므로, 우리의 판타지는 모두 조금씩 에드워드 벨러미의 [뒤돌아보며]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유한 계급의 귀공자 웨스턴은 역시 유한 계급의 아가씨 이디스와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집이 제때에 완성되지 못해 짜증이 나 있는 상태이다. 집이 그렇게 된 이유에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욕망이 다르기 때문인데 이건 1887년이나 2014년이나 같은 문제이므로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한 짜증은 불면으로 이어지고 평소처럼 최면술에 의지해 잠이 든다. 그리고 깨어보니 2000년의 세상이고 이때의 세상은 그가 살았던 1887년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그의 말처럼 변화는 때때로(어쩌면 때때로 보다는 자주) 급작스럽게 일어나왔으며 113년의 시간동안 세상은 그 급변을 다시 한 번 맞이했고, 그 사회에서 구성원은 자본가든 노동자든, 남자든 여자든 불만을 갖지 않는다. 유토피아, 그 사회가 바로 소설 속의 2000년이다.

 

2000년 9월이면 국가적으로는 IMF 외환위기 중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가난한 연애를 하고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유토피아는 커녕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돈 들어갈 일만 많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그린 2000년은 너무나 완벽하여 읽으면서 무척 재밌었다. 113년 후의 세상을 이토록 이상적으로 그릴 때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려낸 사회가 이상적일수록 당시의 사회는 그만큼 더 부조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 지금 누군가가 113년 후의 이상사회를 그려보라고 한다면 이 소설보다 더 멋지게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에드워드 벨러미가 그려낸 이상사회는 기본적으로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입장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이 말만 듣자면 굉장히 갑갑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생각이 좀 달라진다. 소설에서 말하는 국가 관리 시스템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조목조목 인간적이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45세까지 의무 산업 복무 기간이 있으며, 직업의 선택은 성장기에 충분한 관찰과 고려를 통해 스스로 선택한다는 점은 현재 취업 준비 대란을 겪는 젊은 세대들에게 무척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입대 전에 설렌다고 하니 요즘 젊은이들과 마음이 상반된다. 또한 능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 대한 급여 차별이 없는 점이 인상적인데 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도 그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점을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가치관 때문이라는 설명에서는 무릎을 쳤다. '평등'과 '복지'에 대한 작가의 혜안에 놀랐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그 신용 금액을 어떻게 정해주나요? 무슨 권리로 한 개인이 자기 몫을 주장합니까? 재화를 분배하는 근거는요?
"인간성이죠. 자기 몫을 주장할 권리는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인간이기 때문이라고요?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몫을 가져간다는 뜻입니까?"

"물론이죠."    (84쪽)

 

요즘 관심사병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에드워드 벨러미가 구축한 유토피아에도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태도는 우리가 탁상공론으로 만들어 놓은 매뉴얼보다 더 가치있다. 한 사람이 머리를 써도 이런 답을 마련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머리를 어디로 쓰는 것일까? 소설 속 2000년 미국에도 대통령은 존재했다. 다만 그 대통령은 국민들을 돕기 위한 그 목적 외에는 역할이 없으며 따라서 그 대통령은 의무 산업 복무를 모두 거쳐야 하고, 따로 관리되는 여성 산업 군대의 고위직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에게만 맡긴다고 한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지휘가 위험하다는 발상이다.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상당부분 공감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경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다양한 방면에 걸쳐 꼼꼼하게 구축한 에드워드 벨러미의 이상 사회 2000년은 14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지 않았지만 그가 조목조목 기술한 원칙들은 깊은 감명을 준다.

 

악취가 나는 군중 속에서 그저 자기 혼자만 향수를 뿌렸다고 해서 그가 만족스러울 수 있을까요? (204쪽)

 

아마 1887년의 유한계급과 2014년의 부유층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들은 자신 밖에는 뒤돌아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적게 노동하고 많이 가지는 시스템의 부조리가 그때나 지금이나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씁쓸하다 못해 화가 나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쯤은 꿈꿔보게 된다. 흘린 땀방울이 정직하게 돌아오는 시대는 올 것인가? 세상의 수많은 잣대들을 없애고 '인간성' 만으로 서로가 대등한 관계가 올 것인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어느 시대에건 유한 계급에게 읽히길 바라게 된다.

 

그나저나, 웨스턴은 다시 1887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게 된다면 이상 사회를 맛 본 자로서 1887년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니면 유한 계급이기에 다시 원래대로 노동자들이야 불행하건 말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기게 될까? 약혼녀 이디스와는 순조롭게 결혼하게 될까? 2000년에 만나 설레임을 갖게 된 이디스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거운 내용과 주제와 더불어 소설적 재미가 더한 이 책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