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 밀란 쿤데라 전집 10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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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겠지만 밀란쿤데라의 책은 처음이다. 그런 사람이 아직 여기에 있다. 아마 어렵다는 편견 때문에 쉽게 시도하지 않았을 것으로 합리화 해 본다. 처음 <향수>책 몇 챕터를 읽었을 때 좀 어려웠다. 어원을 풀이하는 거며, 체코의 역사를 알려주는 거며 둘 다 내가 무지한 이야기들이라 집중해서 읽었어야했지만 결국 이해는 포기하고 약간의 기억만 가지고 이야기를 읽어내려갔다. 잘 읽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을 두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읽었다. 물론 처음엔 이레나와 구스타프의 알랭 드 보통식의 그런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자고 읽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레나와 체코의 사랑이야기라고도 읽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 쪽에 더 치중해서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의 집중력이 필요하진 않았다. 느긋하게 글자들을 따라가다보니 나는 어느 새 체코에 와 있었다.

 

  기억이란 얼마나 조악한 것인지. 22번 째 챕터와 35번 째 챕터에 가면 기억에 대한 글이 나오는데 그것에 의존하는 우리들이란, 참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 돌아가고자 하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는 그녀에게 과거의 존재, 과거의 힘, 그녀의 과거의 힘을 단번에 드러냈다. 그녀 인생의 집에, 뒤를 향해, 자신이 겪어 온 것을 향해 열린 창문들이 나타났다. 그 후로 이러한 창문들이 없다면 그녀의 삶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83쪽)

 

  향수병이다. 작가는 이러한 향수병이 젊은 날(특히 더 어린 날일수록)에는 운명이나 사랑과 깊이 관계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아련한 기억들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더더욱 남은 인생이 얼마 없을 경우에 느껴지는 감동이란 커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라. 인생 말년에 떠올릴 유년의 기억, 사랑의 기억, 그리고 떠나온 조국에 대한 기억들이 얼마나 고귀하게 다가올지.

 

그런 점에서 비교적 젊은 나이인 조제프나 이레나의 귀향은 자신들에게 그리 큰 감동을 가져주지 못하는 것 같다. 도리어 그들은 그들이 떠난 이십 년의 기간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모른 척 하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하여 화가 난다. 그들에게 고국은 아름다움이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 뿐이라는 점에도. 

 

그녀가 외국에서 무얼 했는지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여자들은 그녀에게서 이십 년간의 삶을 잘라 내었다. 그리고 이제 질문 공세를 통해 그녀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꿰매려고 했다. 마치 그녀의 팔뚝을 잘라 내고는 손을 막바로 팔꿈치에 갖다 붙이려는 듯이. 마치 그녀의 장딴지를 잘라 내고 발을 무릎에 붙이려는 듯이. (47쪽)

 

  이러한 외과적 수술로는 그들의 향수병 결핍 증상을 고칠 수 없다. 조제프처럼 나 역시 일종의 '향수병 결핍' 혹은 '기억의 피학증적 왜곡'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일에 크게 즐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보기엔 그리워할 일들이 많을테지만, 물론 나 역시도 때때로 추억에 젖어 웃음짓곤 하지만 지금이 더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유년 시절의 집으로 귀향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조제프처럼 그 때의 기억은 나에 대한 힘을 잃었다.

 

  이레나가 말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유일한 때'와도 관련이 있다. 이레나와 조제프는 망명을 통해 자신들의 자유를 얻고, 의지와 일치된 자아를 갖게 되었다. 체코를 잊은 채로. 나 역시 그렇다. 부모의 그들에서 벗어나고 학교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가정에 포함되기 전까지의 시간이야말로 내가 돌아가고픈 고향이다.

 

  이레나와 조제프가 자신이 태어난 고향 체코에서 머물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는 내 유년 시절의 장소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이레나가 다시 가족 체제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나역시 종종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때로 돌아가고프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 나는 어떻게 될까.

 

  이런 저런 물음들을 조용히 머금으며 책이 끝났다. 작가의 큰 이름과는 달리 이야기가 매우 감각적으로 펼쳐져서 신선했다. 프랑스나 동유럽의 영화 한 편을 보고난 느낌도 들었다. 관찰 대상이 수시로 바뀌며 짧은 이야기들이 연결고리를 맺으며 교차되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밀라다와 구스타프와 장모에 대한 이야기가 내겐 남아있지만 그들은 그들을 닮은 사람들에게 맡겨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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