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그래요, 폴 도련님. 누군가에게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지요. 저에게도 하나쯤은 있어요. 비록 당신의 사랑처럼 파격적이지도 오래 지속되지도 누군가의 파멸로 끝나진 않았지만 그 사랑에 빠져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해요. 사람들은 지나간 추억은 아름답다고, 추억을 먹고 산다고 해요. 그런데 나는 자신이 없어요. 내 사랑이 아름다웠을까? 그것을 추억하는 것이 내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당신은 수전을 올바르게 기억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것이겠지만 과연 얼마만큼이 진실인지는 당신도 확신할 수 없겠죠? 당신은 고통스러워 보여요. 동시에 평온해 보이기도 해요. 난 지나간 사랑을 굳이 들추고 싶지 않아요. 내 사랑이 당신의 사랑에 미치지 못한 걸까요? 그럴 지도 모르겠어요. 당신의 사랑은 두 사람의 영역 안에 그 무엇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사랑으로 보여요. 그에 비하면 내 사랑은 산만했네요. 그런데 우리의 기억은 완전한 걸까요? 정말 내 사랑은 당신의 사랑에 비해 산만했을까요? 알 수가 없네요.

 

아름다운 장면들이 있죠. 사랑을 속삭이던 때 그리고 침묵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떠오르기도 하죠. 하지만 사실은 그 아름다운 장면을 유지하기 위해 아름답지 못한 더 많은 장면을 외면하는 거예요.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라고 묻는 당신의 질문에 답이 되었을까요? 누군가를 올바르게 기억한다는 것은 그와 나의 수많은 불행 가운데 아주 적은 수의 행복을 놓는 거라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를 추억할 때  불행을 축소하고 행복을 마구 부풀리죠. 당신의 이야기가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당신의 이야기는 비교적 균형감은 있죠. 하지만 굳이 되새길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했죠.

 

당신이 아직도 수전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처음 만났을 때의 싱그런 수전을 일흔이 넘어서까지 그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당신 안에 수전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대상이죠수전은 당신 덕분에 행복했을까요? 아마도 행복했던 적이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불행했던 적도 적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이 이야기를 쓴 건 아닐 거예요. 당신에 대한 수전의 사랑을 숭고하게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썼을 거라는 생각을 해요. 그게 수전을 올바르게 기억하는, 아니 올바르게 기리는 방법일지도 모르겠어요. 일종의 애도서. 얼마 전 읽은 마거릿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라는 소설이 생각나네요. 아이리스도 로라를 애도하는 의미로, 로라를 바르게 기억하기 위해서 지난 시간을 최대한 진실 되게 썼죠.  도대체 오래 전 과거를 기억해내고 그것을 글로 쓴다는 것은 어떤 행위일까? 궁금해져요. 결국 그것은 자기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뿐이겠지만요. 당신을 조롱하려는 뜻은 아니에요.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기억을 완전하게 재생하려는 그 노력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을 당신의 글을 읽으며 줄곧 생각했어요. 당신이 수고롭게 쓴 글의 가치를 이해해요.

 

사람의 기억은 모두가 편집본이죠. 그게 연애에 관할 때엔 가위가 춤을 추듯 사정없이 편집되겠죠? 당신의 기억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모든 사랑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부른다면 당신의 기억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어요. 결코 완전하게 기억될 수 없는 연애의 기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요. 물론, 나 역시 그런 시도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건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그 사랑이 현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어야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야기가 수전에게 가 닿기를 바라고 덕분에 내 연애의 기억이 내게 차지하는 비중을 알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전해요. 이제 그만 기억에서 자유롭길 빌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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