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정신과적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마주하면, 자살 위험이 있는지를 꼭 파악해야 한다고 우리 의사들은 배운다. 진료실에서 한숨을 쉬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거나 기운이 없어 보여도, 자살 위험이 있는지 파악해야 한다고 배운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넌지시 물어서는 안 되고, 아주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아… 머리가 울렸다. 맞다, 그렇지. 과호흡은 살고 싶어서 하는 거지. 의사가 되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나는 과호흡을 해결하는 좋은 방법을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따면서 배웠다. 프리다이빙은 숨을 참고 물에 들어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과호흡을 하고 들어가면 뇌가 저산소증에 빠지는 상황을 인지할 수 없어 결국 블랙아웃이라고 하는 저산소증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프리다이빙 전에는 반드시 들숨과 날숨을 1:2 비율로 하도록 준비시킨다. 날숨을 천천히 하여 체내에 이산화탄소를 쌓이게 하고, 그럼으로써 호흡 충동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은 산소를 마시고 싶어서가 아니가 이산화탄소를 뱉고 싶어서 숨을 쉬려고 하기 때문이다.

내 눈동자를 보고, 나와 같은 속도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도록…. 아무 말도 필요가 없다. 눈동자로 전달하는 것이 더 강력하다.

나는 첫 프리다이빙을 끝내고서, 친구에게 부탁했다. 혹시라도 내가 자살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을 땐 프리다이빙에 데려와달라고. 그러면 내가 숨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일인지 다시 깨달을 것 같다고.

신환이 입원하셨다는 병동 간호사의 콜을 받고 나는 응급실 진료기록과 검사 결과부터 찾아보았다. 응급실에서 촬영한 흉부방사선 검사 결과를 보니 폐암이 의심되었다. 입원 수속이 끝나자마자 흉부 CT를 찍었다. 다음 날 낮이 되어야 나오는 영상의학과의 판독을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이건 폐암, 상당히 진행된 폐암이다. 그것도 폐암이 상대정맥을 짓누르고 있어서 얼굴이나 팔에서 심장으로 내려가는 피가 정체되어 있는 ‘상대정맥증후군’이었다. 이것은 종양내과의 응급 상황이다.

할머니는 산소를 공급하는 콧줄을 코에 끼고 가쁜 숨을 쉬며 병실 침대에 기대어 계셨다. CT를 확인한 내가 환자를 만나기도 전에 미리 내린 오더였다. 산소를 공급할 것, 기대어 앉으시도록 할 것, 팔에 잡힌 수액 라인을 뺄 것. 나는 얼굴과 상체 쪽으로 가는 피를 최대한 줄여서 할머니를 편하게 해드리려고 했다.

아, 독거노인…! 순간, 독거노인에 따라붙는 여러 가지 이미지들이 떠올랐다. 돌봐주는 사람 없음. 책임지는 사람 없음. 관심 있는 사람 없음.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음. 그렇지만 뭔가 할머니 신상에 문제라도 생기면, 지금까지 아무 관심도 없던 가족들이 나타나 세상에 없는 효자인 양 행세를 하지. 그래서 의료인들은 환자분이 ‘독거노인’이라고 들으면 난감 일색이다.

폐암 덩어리가 상대정맥이라는 큰 정맥 혈관을 누르고 있어서, 머리로 올라온 피가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길이 좁아져 얼굴이 붓고 숨이 찬 거라고. 이 상황은 폐암으로 인한 응급 상황이라고. 그래서 오늘 밤에라도 당장 큰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하고, 그건 제가 지금 바로 알아봐드리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차분하게 들으시다가 얼핏 눈시울을 적셨고, 나는 엉엉 울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나이 든 내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말하는 동안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폐암이라고 정확히 말씀드리기를 잘했다. 그분의 생명력을 믿기를 잘했다.

나도 저렇게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 폐암의 응급 상황이라는 설명을 듣고 오히려 의사를 위로하는 할머니, 의연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던 모습….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았어도 절에서 서로를 돌보고 돌봄 받으면서 공동체로 생활해온 분이었다. 그 관계가 있기에 할머니는 암 진단을 받는 상황에서도 의연하실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단 하루 환자와 의사 관계로 만난 그 큰스님 할머니께 크게 반하고 또 배운다.

소독을 끝내고 이제 새 기저귀를 반듯하게 깔아서 환자분의 가벼워진 다리를 들고 기저귀를 잘 채워드리려 했는데, 다 채운 듯하여 만지작거리다 보니 앞뒤를 잘못 채운 것 같다. 아이가 없는 나는 아이들의 기저귀도 별로 갈아본 적이 없어, 초보 티가 확 났던 것이다.

나는 기저귀 가는 일이 하찮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천추부의 욕창은 눌리지 않도록 자세 변화를 시켜주는 것과 위생 관리가 핵심이다. 물론 의료인들이 죽은 조직을 적절히 제거해주어야 하지만, 기본은(그리고 앞으로의 예방을 위해서도)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깨끗한 기저귀가 있다.

이날같이 나 이외에 아무도 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선, 일이 손에 익지 않아 거꾸로 채우는 실수를 하면서라도 어쨌든 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구라도 그 장소에 그 시간에 있었다면 해야 하는 일. 앞으로도 왕진을 지속한다면,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해오지 않았던, 하지만 환자분의 건강을 위해 정말 중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하나하나 하게 되는 이런 날들이 더해지겠지.

만화 『헬프맨』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 깨졌다. 일본 만화가 쿠사카 리키의 작품인 『헬프맨』은 일본 개호보험(우리나라의 장기요양보험과 비슷한 것)에 대한 내용을 다루는데, 어떤 것이 존엄한 돌봄이고 무엇이 웰 에이징well-aging인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만화의 주인공, 어리숙하지만 다정한 요양보호사 온다 모모타로는 ‘기저귀를 가는 것이야말로 간호·간병의 꽃’이라고 얘기한다. 한 신입 직원이 돌봄 시설에서 일하고는 싶지만 기저귀는 갈고 싶지 않다고 하자, 모모타로는 "누구도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초보자에게, 그것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 하지는 않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기저귀를 가는 것은 그만한 신뢰, 그만한 익숙함, 그만한 관계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만한 관계, 그만한 친숙함이 아닌데도 그분의 공간으로 너무 훅 들어갔던 게 아닐까. 누구에게나 다른 사람과 맺고 싶은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분도 ‘자신의 담당 주치의’와 맺고 싶었던 관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분이 설정한 그 관계의 선을 내가 너무 순식간에 아무렇지 않게 넘어버렸던 것이 아닐까.

그때 내가 어떻게 했으면 선을 넘는 불편함을 드리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선을 타고 넘을 수 있었을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렇게 넘은 선 밖으로 또 새로운 관계가 열릴 수도 있으니까.

수술실보다 병실을 구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의 수술이 주로 앞당겨지는 것이다. 의료가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와중에 엄마의 수술이 당겨지는 것을 본 나는 다행스러운 마음 한편으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묘한 기분이었다.

교수님과 마취과 선생님들의 배려로 나는 엄마의 수술방 안에 들어가 전신마취 전까지 엄마의 손을 꼭 잡아드릴 수 있었다. 대장암 수술을 앞두고 불안한 와중에도 미래에 의사가 될 딸의 손을 잡고 의식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던 엄마. 마취된 엄마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자, 교수님은 눈짓으로 나가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학생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묻어났다. 나는 다시 주저앉을 뻔했다. 이번에는 허탈해서. 아무리 학생은 공부가 중요하고 의대 본과 3학년은 연말고사가 제일 중요하다지만, 교수님, 그러시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저 스페시멘을 보고 대체 뭘 알겠어요? 저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고요! 내가 허탈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수술장 밖으로 걸어 나왔을 때, 십수 명에 달하는 우리 가족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놀라게 하셨다고요!

엄마는 퇴원할 때까지 계속 1인실에 입원해 계셨다. 가족들이 하지 말라는데도 스스로를 ‘달걀 껍데기 암 환자’라고 부르셨다. "나는 이제 달걀 껍데기처럼 깨지기 쉬운 사람이야. 너희 다섯 남매 낳아서 키우느라 너무 힘들었고 속이 다 상한 것 같아. 이제 장까지 잘려나가서 속이 더 비었어. 속 빈 달걀 껍데기 같아. 다들 그걸 알아줬으면 해." 자칫 우리가 ‘계란 껍데기’라고 잘못 말하면, 항상 ‘달걀 껍데기’라고 정정해주시곤 했다. 그 두 단어가 무슨 차이가 있느냐 물으면 ‘달걀 껍데기’가 발음이 더 예쁘고 더 나약하게 들린다고 하셨다.

1인실 입원료로만 천만 원 정도가 나왔다. 딱 예상했던 보험료만큼. 그 일로 인해 나에게 대학병원 1인실은 정말 비싼 곳, 아주 특별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남았다. 그리고 1인실에 입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으면 수술 일정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우리 가족에게는 다행이었지만 씁쓸한 자본주의 사회의 단면인 듯도 한 공공연한 병원의 비밀 한 가지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독시사이클린을 복용하느라 너무 고생하셨다. 이 항생제는 울렁거리고 소화가 안 되는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나도 인도 배낭여행을 갔을 때 말라리아 예방 목적으로 하루에 한 알씩 먹어본 적이 있다. 처음 며칠은 먹고 나면 울렁거리는 정도였는데, 1주일쯤 지나고 나자 먹기 전부터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아직 약을 먹지 않았는데도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다가올 울렁거림이 예상되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하루에 한 알로도 여행의 설레는 기분을 충분히 망칠 수 있는 약이었는데 엄마는 그 약을 고용량으로 하루에 두 번씩 꼬박꼬박 몇 달을 드셔야 했으니, 고충이 심했을 것이다.

몇 달을 꼬박 독시사이클린을 드셨지만 엄마의 암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커지지도 않았다. 엄마는 ‘싸구려 약’을 탓하기 시작하셨다.
"내가 약값이 780원 나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어. 희귀한 암이라니 희귀하고 비싼 약, 좋은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약이 너무 쌌어. 아무 효과도 없잖아. 다른 집은 항암 치료 한다고 집안 기둥뿌리 뽑힌다는데, 나는 암 환자 대우를 제대로 못 받네. 못 받아도 너무 못 받는 것 같아 서럽기도 해."

비싼 약이 좋은 약이라는 믿음은 환자들에게서 자주 보인다. 플라시보 효과라고 실제 아무런 약리적인 효과가 없어도 환자의 믿음만으로도 약효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진통제나 영양제 같은 종류에서 플라시보 효과가 특히 많이 나타난다. 이럴 때는 약이 비쌀수록 효과가 좋다. 한때의 나는 이 효과를 경시했었다. 믿지도 않았다.

전공의 때 파견 나갔던 지방 의료원에서 수액을 맞던 환자가 ‘이거 말고 좋은 거’를 계속 요구했다. 장염으로 인한 탈수를 교정하기 위해 수액을 맞으시던 참이었다. 대체 어떤 걸 드려야 할지 몰라 담당 과장님께 말씀드렸더니, ‘색깔 있는 비타민을 섞어주라’는 오더를 주셨다. 노란색 비타민이 수액에 섞여 들어가자, 아직 약효가 나타날 시간이 아닌데도 환자의 표정이 평화로워지고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과장님은 젊은 의사의 치기를 이해해주셨다. 그러면서 말씀하셨다. 내 주치의가 나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 나의 불편과 통증을 해결하기 위해 뭔가 알 수 있는(환자에게 직접 보이는) 시도를 해주는 것, 그 관계성의 확인이 환자에게는 필요한 것이라는 얘기였다. 꼭 의학적으로 필요한 치료만이 환자가 필요로 하는 전부는 아니라고. 플라시보 효과라고 우습게 보고 무시할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되게 활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이다.

뒤통수를 세게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싸구려 약이라 효과가 없는 게 아니냐며 서운해하셨던 내 엄마에게 필요했던 건 실제로 비싼 약, 희귀한 약이 아니라 천만 원 어치의 위로, 천만 원 어치의 사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요, 달걀 껍데기 엄마.

이 별것 없는 날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것은, 2년에 걸친 엄마의 암 투병기로 약간은 스산해져 있었던 가족 분위기가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왔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엄마가 대장 수술에 이은 생리적인 부작용을 가족들에게 거리낌 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여자들은 병을 앓는 순간에도 ‘여성성’을 잃지 않도록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려졌다. 암 투병이 얼마나 치열한 투쟁의 현장인데, 어떤 암을 앓을지 지정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명력을 박탈당하고 초상화처럼 박제되었다.

여주인공의 이미지들이 실제 투병 중인 여성들에게 자기 신체 이미지에 대한 훼손으로 작용하고, 생리적인 현상들을 잘 호소하지 못하게 하는 굴레로도 작용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여성은 심지어 아플 때조차 여성스럽게 아파야 한다니!

나는 엄마가 겪고 계셨던 대장 절제의 합병증을, 특히나 배설과 관련한 생리적인 이야기들을 이토록 솔직하고 가감 없이 들을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그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는 딸과 엄마 사이라서 행운이었다.

드라마를 보는 동안 사무치게 그리웠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맨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의사와 환자들. 저렇게 가까이에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신뢰를 나누는 그들. 온 얼굴로 안타까움과 기쁨을 드러낼 수 있었던 시절. 이제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 없겠지?

여러 다양한 과의 업무를 배워야 하는 가정의학과의 특성상 3년차인 치프 연차가 되어서도 매달 다른 과를 돌아다니게 되었다. 달마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동료들과 적응하는 것이 힘들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떠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달은 산부인과로 파견 가는 달이었다.

힘들었다는 얘기를 너무 자주 듣다 보면, 익숙하다 못해 식상해지는 구석이 있는 법이니까.

산모들이 겪는 소화불량, 두통, 우울과 불안, 피로, 입덧 등은 아주 충격적이었다. 엄마가 입덧이 심했다고 하실 때는 으레 그런가 보다 싶었지, 얼굴이 허옇게 질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힘든 거였어? 그리고 기형아나 유산에 대한 불안이 이렇게 큰 거였어? 임신이란, 도저히 어이쿠야, 싶었다.

산부인과 파견이 끝난 후 가끔 가정의학과 직장 동료들의 태아 얼굴 3D 사진을 찍어줄 일이 있었다. 아가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또 피곤에 지친 친구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문득, "잘 키웠네, 진짜 고생했다"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울컥하여 수습하지 못할까 봐 참곤 했지만.

어떤 남자가 부인에게 무통분만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분개했다. 그 남자는 자신의 부인이 신께서 내려주신 성스러운 산고도 없이 아이 낳는 걸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그 절정의, 환희의 순간이 현대 의료 기술로 오염되는 것 같다나 뭐라나. 무통주사가 아이의 탄생이라는 기적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 같다나 뭐라나.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산모가 거부할 수는 있다. 똑같은 이유로 거부하는 산모들도 있다. 그래도 그건 본인이 감내하겠다니까 그러려니 하는 것이지, 감히 남편이 반대할 수는 없는 문제다. 차라리 돈이 없어서 무통분만을 하기 힘들다고 하면 안타깝지만 이해는 간다.

우리는 언니의 입원실에 모여 앉아 그 남편 욕을 했다. 그런 자식은 마취도 안 하고 사랑니를 뽑아버려야 한다고 했다가, 마취 없이 개복 수술을 해야 한다고도 했다. 여성들이 겪어내야 하는 힘든 순간에 대해서만 어찌나 ‘자연화’하려는 시도들이 넘쳐나는지. 임신·출산의 고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둥, 생리통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둥, 심지어 여자는 자연 미인이 최고라는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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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의 마지막 집으로 옮겨앉는 각별한 일을, 이 여름에 했다.

나는 겁이 많아서 토끼띠가 그냥 토끼띠가 아니고 겁토끼띠라고 하는데 우리 선생님은 나보고 늘 이러신다. "덜덜 떨면서도 하고 싶은 일은 다하지." 그렇기도 한 것 같다. 꼭 해야겠다는 일은 하는데 그 대신 다른 일은 전혀 못한다. 아마도 해야겠다 싶은 일이, 내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일은 대체로 아니었기 때문에 덜덜 떨면서도 해낸 것 같다.

이번에도 해내기를 바랄 뿐이다. 또 고단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이 다 가질 수는 없는 바에야, 하나를 얻으면 또 버려야 할 것도 하나 있기 마련 아니겠나 생각하며 즐겁게 오갈 생각이다.

여러 사람을 위한 집을 짓는 것은 오래 생각한 일이다. 아끼는 제자들이 많아서, 그 품은 뜻을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는 그들이 너무 생활에만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들이 가끔은 책도 읽고 쉬기도 하며 자신을 추스르고, 함께 이야기도 나누고, 뜻도 새롭게 할 작은 터를 일구고 싶다는 생각을 참으로 오래 해왔다. 그래서 일을 벌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받은 것이 참 많아서, 나도 세상을 위해 뭔가 작은 일이라도 해서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이제 아주 빈손이 되어버린 나 자신도 아주 불안하지 않을 수는 없고, 무엇보다 내 아이들한테 미안하다. 남들은 자녀 뒷바라지며 혼사 등등에다 많은 힘을 쏟는데······.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앞으로도 제 힘으로 살아가리라고 생각한다. 내가 덜컥 무슨 일인가를 저질러 그 애들을 괴롭히지 않기만 바랄 뿐이다.

제아무리 좋은 생각과 뜻이라 하여도 결국은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모르는 어미를 그래도 이해하고 격려와 지원을 보내는 내 아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그런데 마지막 거처에는 무얼 가지고 가야 하나. 무얼 버리지를 못하는 성격인 데다가, 특히 선물을 받은 것이거나 하면 더더욱 못 버려서 얼마 안 되는 짐 모두에 추억이 잔뜩 묻어 있다.

아이들 생각만 하면 늘 미안한 마음뿐이지만, 그래도 생각해 본다. 그 미안함과 간절함이 아이들과 나를 묶어주지 않았나, 그 마음이 말없이 전해져 아이들이 일찍 철들지 않았나 싶다.

그 옅은 노란빛 꽃은 아주 작은 등불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 켜져 있었다. 큰 별들이 길섶에 쏟아져내린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동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어둠 속에서 자그마한 꽃등을 켜고 이리 향기롭기까지 하다니.

젊은 날, 늘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괴로웠다. 그저 괴로웠을 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내가 저 아득한 어둠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소박한 꽃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듯 세상이 캄캄했던 것은 내가 그 어둠을 헤쳐서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만큼 힘껏 살아온 것 아닐까.

하는 일이 다 반듯하게 되기야 했으랴마는, 그나마를 위해서 그야말로 죽을 듯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가만가만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내게 나직이 묻고 있는 것 같다.
"형설의 공 ? 쌓았는가?"

어둠 속에는 저렇듯 어느 하룻밤 동안 달빛 속에 향기로운 꽃이 될 것을 위해 제 몸에 향기를 담아가는 것도 있고, 또 그 꽃에 의지하여 언젠가 하늘로 날아갈 제 몸을 키우는 것도 있다. 그리고 그런 고요히 어울려 있는 삶의 이치들을 이 어두운 들길에서 이제야 내가 조금씩 깨우치고 있다.

다시 생각해 본다. 어둠이 사람에게는 울고 몸부림치라고만 있으랴. 긴 기다림으로, 견딤으로 내 삶에도 조금 향기가 배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향기롭기까지 할 리야 없지만, 내 자신에게 혹시 어떤 양질良質의 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다스려온 긴 기다림, 견뎌온 어둠의 덕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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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인생을 배우다 - 소소한 일상에서 사람의 온기에서 시인의 농담에서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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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전에 읽었던 <꿈꾸고 사랑했네 해처럼 맑게>와 겹치는 내용이 좀 있어서 약간 아쉬웠지만, 오랜만에 보는 황규백 화백의 단아한 그림이 반가웠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 것을 아끼는 전영애 선생의 단정하게 읽히는 글은 여전히 놀랍고 감동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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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너무 거칠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대립하고 싸우면서 논리가 뒤틀린가짜 뉴스에 휘둘리기도 하는데, 토론 교육이잘 진행되면 우리나라는 굉장히 괜찮은 나라가될 겁니다. 우리나라 정치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달라지리라 확신해요. ‘지금 구태여 왜 교육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민도가 향상됐다. 합리성을 지녔다‘라는 말씀을
‘인권 의식이 향상됐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요? 저는 민도의 향상을 ‘인권 의식이 나아졌다‘라고 보아왔는데요. 옛 선조들이 말한 덕德을 요샛말로 하면 인권 의식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어요. 요즘은 서양인도 "우물에 빠진 아이구하기"라는 맹자의 표현을 많이 인용합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재지 않고 아이를 구하려 몸을 던지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건데요. 맹자의 말씀을 현대식으로풀이하면 인권 의식이 아닐까요? 그래서 ‘민도가 향상됐다‘라는 건 ‘사회 전반에 좀 더 서로를생각하는 마음이 자리했다‘라는 뜻으로 파악했어요.

우리가 마스크를 쓸 때 뜻밖의 설문조사 결과가나왔습니다. 왜 그렇게 마스크를 성실히 쓰느냐고 물었는데, 우리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남에게 바이러스를 옮기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라는 답을 했어요. 그런 생각이 ‘서양 교육을 받아서 습득한 합리성인가요?‘라고반문하면 아닐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시나리오 하나를 만들었어요. 1년내내 그 내용을 강의했는데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2021년 5월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진이 국제학술지〈종합환경과학Science ofthe Total Environment〉에 발표한 논문이 마치 제 강의를 듣고 쓴 것처럼 똑같은 거예요. 제시나리오는 이렇습니다. 온대와 열대를 포유류종 수로 비교할 때, 박쥐를 빼면 신기할 정도로똑같아요. 온대 포유류 종 수와 열대 포유류 종수는 큰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박쥐를 넣으면비교가 안 됩니다.

생물다양성의 불균형이 너무나 심해졌습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이주하려 할 때 만날수 있는 생명체는 인간 혹은 인간이 기르는 가축일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19 같은 팬데믹이 반복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다이아몬드선생님 말씀도 맞죠. 20~21세기에 우리가 겪은 바이러스가 한두 종류가 아닌데 전부 팬데믹이 되지는 않았잖아요. 21세기만 놓고 본다면, 신종인플루엔자와 코로나 19만이니까요. 초동 대응 실패가 팬데믹을 만든 원인이에요. 그러나 유행병이 잦아진 이유는 그 배후에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생태 사상가인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선생님이나 미래학자인 제러미 리프킨JeremyRifkin 선생님은 기후위기를 유발한 인간의 활동을 코로나 19의 원인으로 꼽습니다. 시바 선생님은 이전에 있던 인수공통 전염병zoonosis이 모두 숲에서 왔다는 점이 개발 중심 경제활동에 대한 경고라고 하며, 기후변화와 인간이 활동하면서 생긴 생물 다양성 파괴를 지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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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는데,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야말로 다친 마음을 알아보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 힘없는 말을 그래도 하는 것이 글 읽은 사람의 도리이고, 문학의 진정한 역할 아닐까 이야기했다.

누구를 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만든다면 생각해 볼 수 있고 논거도 만들어볼 수 있다. 어떻게 함께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로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로 문제를 내고 설득력까지 갖춘 답을 내게 한다면, 또 그 답을 낸다면 그거야말로 범죄라는 것. 세상의 큰 범죄들도 결국은 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지 않는가.

글 배웠으면 빛나는 논리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입장을 유리하게 할 수도 있고, 이득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생각 없이 순응함으로써, 혹은 작은 목전의 이득을 위해, 혹은 귀찮아서 잠자코 있음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문제를 악화시키는지.

그러나 높인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고 남들만 비난하는 것일 때, 그것이 무슨 진정한 힘이 있겠으며 거두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주 작은 접시에 담겨 내 방 유리장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2센티미터도 안 되는 몽당연필. 언젠가 몹시 지쳐서 딸과 함께 먼 나라의 기차 안에 앉아 있었을 때, 곧 그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 닿으면 내려서 차를 갈아타고 아주 멀리로 갈 딸이 문득,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부러뜨려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딸도 연필 한 자루밖에는 가진 필기도구가 없었다. 글을 쓰며 피로감을, 고독을, 온 인생의 짐을 지고 가라는 말없는 당부였다.

그 작은 몽당연필로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생을 감내한 것 같다. 글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느 제자로부터 선물받은 책 한 권 ? 황송하게도 "스승이자 친구이자 어머니인 선생님께"란 글귀가 적혀 있어 값진 책이 되었다.

그 작은 것들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준 기쁨이 간직되어 있다. 살면서 받은 헤아릴 수도 없는 이런 작은 선물들을 돌아보노라면, 가끔씩 치미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이나 삶에 대한 회의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이 작은 사랑의 징표들이 나를 삶에 붙들어두는 장본인들인 것도 같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은 무슨 날이 되면 무언가 그럴듯한 선물을 하기 위해 평생 그토록 조바심했던가. 무얼 해야 하나, 또 무슨 선물을 사야 하나, 정말 찾아뵐 시간이 안 되는데, 정말 형편이 안 되는데 어쩌나······. 그러다가 이제 찾아뵐 분들이 세상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의 쓸쓸함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다.

무언가 생색 나는 선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선물조차도 금방 가치가 평가되고 가격이 매겨질 것만 같은, 또 정말로 그렇기도 한 시류 탓도 있겠고 나를 돋보이려는 허영심도 얼마만큼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받아서 정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정작, 물건 값과는 무관한 것이다.

온갖 형태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또 조금은 전하기도 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오면, 사랑의 표시가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도 처음 마음을 담는 일일 것이다. 빚을 내듯 무리를 해서, 심지어 일말의 미움까지 섞어서, 무언가 물건을 마련한다는 것은 누구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건도 마음도 형편만큼, 분수만큼이어야 할 것은 사실 자명한 이치이다. 어쩌면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예금 잔액처럼 바닥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끼며 지키고, 또 늘려가야 할 무엇인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양수업의 하나일 뿐인 수업을 두 사람 다 어떤 지극정성으로 하는지를 보았기에, 그들의 전공이 되고 전업이 된 분야의 일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저 입신양명에 뜻을 두기만 한 사람들이라면 내게 그토록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일 리 없다. 한번은 내 시골집에 와서, 다들 조금씩은 낯설어 하는 곳에서, 사려 깊게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궂은 뒷정리를 가만히 다 해놓고 가는 걸 보았다. 세상에 그런 판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판결을 할 때 역시 저렇게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표 나게 무얼 이룬 사람들만 중요하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무정하든 지금 묵묵하게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그러면서도 남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이 그들 둘뿐이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튀어서 어지럽게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일 뿐. 제 아무리 세상에 개탄할 것이 많다 한들, 눈 맑게 해서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그런 사람들이 힘 잃지 않게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박수쳐주는 것이 내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죄 없는 짐승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자연을 거스르고도 무사할까. 인간이 잡식동물인 한, 먹이사슬 안에서의 죄야 시비해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넘으면 안 될 선을 이곳저곳에서 이미 넘어도 많이 넘은 것 같다.

다이어트 이야기는 ? 이윤을 챙겨야 하는 산업에 부추겨지기까지 해서 ? 정말이지 너무도 요란하고 너무도 일상적이다. 건강상의 사유로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너무나도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는 다이어트 이야기를 한다. 남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허다한 배고픈 사람들은 우리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지식을 쌓고서, 밥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면서, 부끄러움마저 없어졌을까.

누가 묻겠지. 무얼 얻자고, 무얼 바라고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사느냐고. 무리는 확실히 하는데 바란 것은 없다. 무얼 얻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소득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얼마나 단순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여주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는 데 얼마나 조금만 필요한지를 몸으로 체득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정말 조금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 다들 목을 매달고들 사는지. 그 많은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얼마나 또 불행한지. 그런데 쓸데없는 것들을 좀 버리면 자유로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제법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물론 나도 병나서 주변 괴롭게 하는 일까지는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뜯어고쳐 무리해서 오래 살지 않고 웬만한 것은 그냥 껴안고 살만큼 살려고 한다. 그런 일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 하는 생각은 고작 그 정도이다. 그 점에서만은 하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

글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는데,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야말로 다친 마음을 알아보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 힘없는 말을 그래도 하는 것이 글 읽은 사람의 도리이고, 문학의 진정한 역할 아닐까 이야기했다.

누구를 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만든다면 생각해 볼 수 있고 논거도 만들어볼 수 있다. 어떻게 함께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로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로 문제를 내고 설득력까지 갖춘 답을 내게 한다면, 또 그 답을 낸다면 그거야말로 범죄라는 것. 세상의 큰 범죄들도 결국은 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지 않는가.

글 배웠으면 빛나는 논리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입장을 유리하게 할 수도 있고, 이득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생각 없이 순응함으로써, 혹은 작은 목전의 이득을 위해, 혹은 귀찮아서 잠자코 있음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문제를 악화시키는지.

그러나 높인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고 남들만 비난하는 것일 때, 그것이 무슨 진정한 힘이 있겠으며 거두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주 작은 접시에 담겨 내 방 유리장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2센티미터도 안 되는 몽당연필. 언젠가 몹시 지쳐서 딸과 함께 먼 나라의 기차 안에 앉아 있었을 때, 곧 그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 닿으면 내려서 차를 갈아타고 아주 멀리로 갈 딸이 문득,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부러뜨려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딸도 연필 한 자루밖에는 가진 필기도구가 없었다. 글을 쓰며 피로감을, 고독을, 온 인생의 짐을 지고 가라는 말없는 당부였다.

그 작은 몽당연필로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생을 감내한 것 같다. 글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느 제자로부터 선물받은 책 한 권 ? 황송하게도 "스승이자 친구이자 어머니인 선생님께"란 글귀가 적혀 있어 값진 책이 되었다.

그 작은 것들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준 기쁨이 간직되어 있다. 살면서 받은 헤아릴 수도 없는 이런 작은 선물들을 돌아보노라면, 가끔씩 치미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이나 삶에 대한 회의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이 작은 사랑의 징표들이 나를 삶에 붙들어두는 장본인들인 것도 같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은 무슨 날이 되면 무언가 그럴듯한 선물을 하기 위해 평생 그토록 조바심했던가. 무얼 해야 하나, 또 무슨 선물을 사야 하나, 정말 찾아뵐 시간이 안 되는데, 정말 형편이 안 되는데 어쩌나······. 그러다가 이제 찾아뵐 분들이 세상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의 쓸쓸함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다.

무언가 생색 나는 선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선물조차도 금방 가치가 평가되고 가격이 매겨질 것만 같은, 또 정말로 그렇기도 한 시류 탓도 있겠고 나를 돋보이려는 허영심도 얼마만큼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받아서 정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정작, 물건 값과는 무관한 것이다.

온갖 형태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또 조금은 전하기도 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오면, 사랑의 표시가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도 처음 마음을 담는 일일 것이다. 빚을 내듯 무리를 해서, 심지어 일말의 미움까지 섞어서, 무언가 물건을 마련한다는 것은 누구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건도 마음도 형편만큼, 분수만큼이어야 할 것은 사실 자명한 이치이다. 어쩌면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예금 잔액처럼 바닥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끼며 지키고, 또 늘려가야 할 무엇인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양수업의 하나일 뿐인 수업을 두 사람 다 어떤 지극정성으로 하는지를 보았기에, 그들의 전공이 되고 전업이 된 분야의 일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저 입신양명에 뜻을 두기만 한 사람들이라면 내게 그토록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일 리 없다. 한번은 내 시골집에 와서, 다들 조금씩은 낯설어 하는 곳에서, 사려 깊게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궂은 뒷정리를 가만히 다 해놓고 가는 걸 보았다. 세상에 그런 판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판결을 할 때 역시 저렇게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표 나게 무얼 이룬 사람들만 중요하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무정하든 지금 묵묵하게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그러면서도 남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이 그들 둘뿐이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튀어서 어지럽게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일 뿐. 제 아무리 세상에 개탄할 것이 많다 한들, 눈 맑게 해서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그런 사람들이 힘 잃지 않게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박수쳐주는 것이 내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죄 없는 짐승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자연을 거스르고도 무사할까. 인간이 잡식동물인 한, 먹이사슬 안에서의 죄야 시비해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넘으면 안 될 선을 이곳저곳에서 이미 넘어도 많이 넘은 것 같다.

다이어트 이야기는 ? 이윤을 챙겨야 하는 산업에 부추겨지기까지 해서 ? 정말이지 너무도 요란하고 너무도 일상적이다. 건강상의 사유로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너무나도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는 다이어트 이야기를 한다. 남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허다한 배고픈 사람들은 우리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지식을 쌓고서, 밥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면서, 부끄러움마저 없어졌을까.

누가 묻겠지. 무얼 얻자고, 무얼 바라고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사느냐고. 무리는 확실히 하는데 바란 것은 없다. 무얼 얻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소득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얼마나 단순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여주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는 데 얼마나 조금만 필요한지를 몸으로 체득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정말 조금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 다들 목을 매달고들 사는지. 그 많은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얼마나 또 불행한지. 그런데 쓸데없는 것들을 좀 버리면 자유로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제법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물론 나도 병나서 주변 괴롭게 하는 일까지는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뜯어고쳐 무리해서 오래 살지 않고 웬만한 것은 그냥 껴안고 살만큼 살려고 한다. 그런 일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 하는 생각은 고작 그 정도이다. 그 점에서만은 하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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