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땐 그런 생각 하지 못했어요. 그냥 책 읽고 글 쓰는게 좋아서 늘 그렇게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다시 생각하니, 시골에서 자라던 어릴 땐 글 쓰는게 직업이 될 수 있다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 P115
첫 시간은 학생들의 성향을 알고 싶어서, 학생들이 좋아하는 단어들을 말하게 했다. 사랑, 만족, 기쁨, 엄마, 아빠/엄마, 아빠, 우정, 행복, 에콰도르, 한국, 나무, 과일/사랑, 동생, 여행, 남미, 파티/라면, 밥, 고기, 친구, 아보카도/엄마, 언니, 오빠, 주스, 고양이, 초콜릿, 미술, 예수/엄마, 아이스크림, 운동, 컴퓨터, 말, 별/엄마, 누나, 큰엄마, 큰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토끼/엄마, 삼겹살, 라면, 여자, MC 단백질, 탄산음료, 밥/기쁨, 만족, 행복, 축구, 공, 농구, 밥/엄마, 참치, 치킨, 후드티, 신발 등등, 가족과 반려동물, 먹을 것의 이름이 거의 공통적으로 나왔다. 그래도 중고생이니 한창 사춘기일 텐데 엄마, 아빠와 가족이, 좋아하는 단어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쩌면 외국에서 사니까 가족이 더 가깝게 느껴질지 모른다고, 나는 그냥 짐작만 했다. - P116
제법 살아낸 뒤, 낯선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야간버스를 탈 때면, 이대로 내가 사라져도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리라는 생각이 이상하게 위안이 되었다. - P116
쓰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음속에서 뭉게뭉게 피어났다. 자료를 모으다 보니 그 뭉게뭉게에 질식당할 듯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최소한 그 한 편은 마치고 가야 나 스스로에게 떳떳할 것같았다. - P119
글 쓰는 동료와 이야기하다가 말했다. 언젠가 내가 글을아주 안 쓰게 된다면, 가장 좋은 건 잠들기 전에 머리맡에 수첩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라고, 잠들기 전에 수첩 챙기기는 나에게 일종의 강박 같은 것이 되었다. - P120
기록하고 증언하겠다는 생각이야말로 내게 끈질기게 남은, 단 하나의 욕망이 아닐까. 어쩌면, 그 때문에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 건지도 모른다. - P121
열심히 놀았다. 열심히 뭔가 내 안에 있는 체했으며 거짓으로 살았다. 아무것도 중요한 일이 없었음에도 언제나 심각했고, 진짜 숨기고 싶은 일들이 쌓여만 갔다. 솔직하면 손해 본다고 믿었다.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는 체했고, 싫어해도 좋아하는 척했다. 그런 것을 배웠다. - P125
나는 작가가 안 됐으면 목수가 되려고 했다. - P128
아버지가 얼마 전 내 사는 곳을 어머니와 함께 다녀갔다. 이상하게도 이제는 셋이 마주 앉으면 쑥스러움이 늘어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더 많이 늙고, 나도 점점 늙는 것을 서로느끼기 때문인가. - P129
글을 쓰면서 가장 행복하고 좋은 일은 글 쓰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글을 쓰려는 많은 학생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두가 허물 많은 나를 좋아할수는 없었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했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그게 문학의 숙명이라고 여긴다. - P131
내 마음은 좁고편협하고 아주 작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자괴감은 커져만 갔다. 시간 강사 일을 해서 생활을 했다. 3년 전한 선생님이 내 이력서를 보더니 10년 안 되는 시간 동안 내가 강의한 시간이 보통 교수들의 26년 치에 버금간다는 말을 듣고 강사 일을 그만두었다. - P133
이성복의 시를 좋아했다. 감성적이면서 때론 깊이 있고, 멜랑꼴리 안에도 품위가 있었다. 아직까지 싫어하는 소설가는 없다. 내게는 장점만 읽힌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진그들이 부럽다. 하지만 질투도 나지 않으니 나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부족한 것만 같다. - P135
어떤 일에 막히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은 돌이킬 필요가없는 것이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되뇌곤 한다. - P136
‘빈문서 1‘의 세계는 고심한 시간만큼 문장의 길이 생기고 아무도대신 써줄 수 없다는 점에서 술수가 통하지 않는 아직은 정직함이 절대적인 가치로 통용되는 곳이다. 가끔은 ‘빈 문서1‘을 차곡차곡 채워가는 나 자신이 시계공이나 구두공 같기도 하고 뜨개질을 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 P140
나는 노트북에서 잠시 시선을 떼고 달력을 찾아본다. 소설공모에서 당선됐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2004년 겨울이고지금은 2018년 10월이니 올해로 등단한 지 14년째가 되었다. 생의 1/3 동안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온 셈이다. 노트북의 ‘출간도서’ 파일에 저장된 일곱 권의 책을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여 합산해보니 5,158장+a4가 산출된다. 엄청나게 부지런한 작가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게으르지는 않았다는 것에 안도한다. 안도하며, 바로 불안해한다. - P142
누가 내게 이런 삶을 살게 한 건가. 인간은 왜 태어나는 것일까. 생각을 하다 보면 어느새 공상이 된다. 공상은 구름처럼몽글하고 금세 부풀어 오르고 어디든 흘러간다. 내 미래를상상하다 보면 가상의 인물이 개입하게 되고 그 인물은 늘예기치 못한 사건과 함께 온다. 인물들이 늘어나고 무대가확장되고 사건이 복잡하게 얽히게 되면 현실의 ‘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 이야기 속 ‘나‘는 이제 내가 아닌 제3자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애초에 나 자신이 아닌 제3자의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나 자신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는 썩 재미있지 않았던 것이다. - P146
나는이야기꾼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각색하여 전해주는 이야기꾼이 아니라 내안의 이야기를 찾아 끊임없이 내면으로 파고드는 광부 같은 이야기꾼…………. - 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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