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는데,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야말로 다친 마음을 알아보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 힘없는 말을 그래도 하는 것이 글 읽은 사람의 도리이고, 문학의 진정한 역할 아닐까 이야기했다.

누구를 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만든다면 생각해 볼 수 있고 논거도 만들어볼 수 있다. 어떻게 함께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로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로 문제를 내고 설득력까지 갖춘 답을 내게 한다면, 또 그 답을 낸다면 그거야말로 범죄라는 것. 세상의 큰 범죄들도 결국은 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지 않는가.

글 배웠으면 빛나는 논리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입장을 유리하게 할 수도 있고, 이득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생각 없이 순응함으로써, 혹은 작은 목전의 이득을 위해, 혹은 귀찮아서 잠자코 있음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문제를 악화시키는지.

그러나 높인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고 남들만 비난하는 것일 때, 그것이 무슨 진정한 힘이 있겠으며 거두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주 작은 접시에 담겨 내 방 유리장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2센티미터도 안 되는 몽당연필. 언젠가 몹시 지쳐서 딸과 함께 먼 나라의 기차 안에 앉아 있었을 때, 곧 그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 닿으면 내려서 차를 갈아타고 아주 멀리로 갈 딸이 문득,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부러뜨려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딸도 연필 한 자루밖에는 가진 필기도구가 없었다. 글을 쓰며 피로감을, 고독을, 온 인생의 짐을 지고 가라는 말없는 당부였다.

그 작은 몽당연필로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생을 감내한 것 같다. 글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느 제자로부터 선물받은 책 한 권 ? 황송하게도 "스승이자 친구이자 어머니인 선생님께"란 글귀가 적혀 있어 값진 책이 되었다.

그 작은 것들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준 기쁨이 간직되어 있다. 살면서 받은 헤아릴 수도 없는 이런 작은 선물들을 돌아보노라면, 가끔씩 치미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이나 삶에 대한 회의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이 작은 사랑의 징표들이 나를 삶에 붙들어두는 장본인들인 것도 같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은 무슨 날이 되면 무언가 그럴듯한 선물을 하기 위해 평생 그토록 조바심했던가. 무얼 해야 하나, 또 무슨 선물을 사야 하나, 정말 찾아뵐 시간이 안 되는데, 정말 형편이 안 되는데 어쩌나······. 그러다가 이제 찾아뵐 분들이 세상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의 쓸쓸함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다.

무언가 생색 나는 선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선물조차도 금방 가치가 평가되고 가격이 매겨질 것만 같은, 또 정말로 그렇기도 한 시류 탓도 있겠고 나를 돋보이려는 허영심도 얼마만큼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받아서 정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정작, 물건 값과는 무관한 것이다.

온갖 형태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또 조금은 전하기도 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오면, 사랑의 표시가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도 처음 마음을 담는 일일 것이다. 빚을 내듯 무리를 해서, 심지어 일말의 미움까지 섞어서, 무언가 물건을 마련한다는 것은 누구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건도 마음도 형편만큼, 분수만큼이어야 할 것은 사실 자명한 이치이다. 어쩌면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예금 잔액처럼 바닥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끼며 지키고, 또 늘려가야 할 무엇인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양수업의 하나일 뿐인 수업을 두 사람 다 어떤 지극정성으로 하는지를 보았기에, 그들의 전공이 되고 전업이 된 분야의 일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저 입신양명에 뜻을 두기만 한 사람들이라면 내게 그토록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일 리 없다. 한번은 내 시골집에 와서, 다들 조금씩은 낯설어 하는 곳에서, 사려 깊게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궂은 뒷정리를 가만히 다 해놓고 가는 걸 보았다. 세상에 그런 판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판결을 할 때 역시 저렇게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표 나게 무얼 이룬 사람들만 중요하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무정하든 지금 묵묵하게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그러면서도 남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이 그들 둘뿐이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튀어서 어지럽게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일 뿐. 제 아무리 세상에 개탄할 것이 많다 한들, 눈 맑게 해서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그런 사람들이 힘 잃지 않게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박수쳐주는 것이 내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죄 없는 짐승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자연을 거스르고도 무사할까. 인간이 잡식동물인 한, 먹이사슬 안에서의 죄야 시비해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넘으면 안 될 선을 이곳저곳에서 이미 넘어도 많이 넘은 것 같다.

다이어트 이야기는 ? 이윤을 챙겨야 하는 산업에 부추겨지기까지 해서 ? 정말이지 너무도 요란하고 너무도 일상적이다. 건강상의 사유로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너무나도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는 다이어트 이야기를 한다. 남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허다한 배고픈 사람들은 우리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지식을 쌓고서, 밥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면서, 부끄러움마저 없어졌을까.

누가 묻겠지. 무얼 얻자고, 무얼 바라고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사느냐고. 무리는 확실히 하는데 바란 것은 없다. 무얼 얻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소득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얼마나 단순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여주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는 데 얼마나 조금만 필요한지를 몸으로 체득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정말 조금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 다들 목을 매달고들 사는지. 그 많은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얼마나 또 불행한지. 그런데 쓸데없는 것들을 좀 버리면 자유로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제법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물론 나도 병나서 주변 괴롭게 하는 일까지는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뜯어고쳐 무리해서 오래 살지 않고 웬만한 것은 그냥 껴안고 살만큼 살려고 한다. 그런 일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 하는 생각은 고작 그 정도이다. 그 점에서만은 하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

글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는데, 글을 많이 읽은 사람들이야말로 다친 마음을 알아보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황 자체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말이다. 그런 힘없는 말을 그래도 하는 것이 글 읽은 사람의 도리이고, 문학의 진정한 역할 아닐까 이야기했다.

누구를 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만든다면 생각해 볼 수 있고 논거도 만들어볼 수 있다. 어떻게 함께 상황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로 문제를 바꿀 수 있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를 죽여야 하는가로 문제를 내고 설득력까지 갖춘 답을 내게 한다면, 또 그 답을 낸다면 그거야말로 범죄라는 것. 세상의 큰 범죄들도 결국은 다 그렇게 해서 생겨나지 않는가.

글 배웠으면 빛나는 논리로 자신을 돋보이게 할 수도 있고, 입장을 유리하게 할 수도 있고, 이득을 취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다. 틀린 것은 틀리다고 할 줄 알아야 한다. 그저 생각 없이 순응함으로써, 혹은 작은 목전의 이득을 위해, 혹은 귀찮아서 잠자코 있음으로써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상의 문제를 악화시키는지.

그러나 높인 목소리에 자신에 대한 성찰은 빠져 있고 남들만 비난하는 것일 때, 그것이 무슨 진정한 힘이 있겠으며 거두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틀린 것은 틀렸다고 하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글을 읽어오면서 문학이란 무엇보다 사람의 마음을 남기고, 전하고, 읽는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글에는 사람이 담긴다.

우리가 가장 힘들여 남기고, 전하고, 읽는 것은 아마도 바른 삶이어야 할 것이다. 글 읽는 시간이란 것도 궁극적으로는 바른 삶을 생각하는 시간일 것이다.

아주 작은 접시에 담겨 내 방 유리장 안에 고이 간직되어 있는 2센티미터도 안 되는 몽당연필. 언젠가 몹시 지쳐서 딸과 함께 먼 나라의 기차 안에 앉아 있었을 때, 곧 그 기차가 다음 정거장에 닿으면 내려서 차를 갈아타고 아주 멀리로 갈 딸이 문득, 자기가 가지고 있던 연필 한 자루를 부러뜨려 나에게 건네준 것이다. 딸도 연필 한 자루밖에는 가진 필기도구가 없었다. 글을 쓰며 피로감을, 고독을, 온 인생의 짐을 지고 가라는 말없는 당부였다.

그 작은 몽당연필로 대단한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러나 인생을 감내한 것 같다. 글을 쓰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어느 제자로부터 선물받은 책 한 권 ? 황송하게도 "스승이자 친구이자 어머니인 선생님께"란 글귀가 적혀 있어 값진 책이 되었다.

그 작은 것들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게 준 기쁨이 간직되어 있다. 살면서 받은 헤아릴 수도 없는 이런 작은 선물들을 돌아보노라면, 가끔씩 치미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이나 삶에 대한 회의는 터무니없어 보인다. 이 작은 사랑의 징표들이 나를 삶에 붙들어두는 장본인들인 것도 같다.

그런데 왜 나 자신은 무슨 날이 되면 무언가 그럴듯한 선물을 하기 위해 평생 그토록 조바심했던가. 무얼 해야 하나, 또 무슨 선물을 사야 하나, 정말 찾아뵐 시간이 안 되는데, 정말 형편이 안 되는데 어쩌나······. 그러다가 이제 찾아뵐 분들이 세상에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의 쓸쓸함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다.

무언가 생색 나는 선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다. 선물조차도 금방 가치가 평가되고 가격이 매겨질 것만 같은, 또 정말로 그렇기도 한 시류 탓도 있겠고 나를 돋보이려는 허영심도 얼마만큼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받아서 정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물건들은 정작, 물건 값과는 무관한 것이다.

온갖 형태로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 또 조금은 전하기도 해야만 하는 때가 찾아오면, 사랑의 표시가 어떠해야 할까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건 아마도 처음 마음을 담는 일일 것이다. 빚을 내듯 무리를 해서, 심지어 일말의 미움까지 섞어서, 무언가 물건을 마련한다는 것은 누구든 오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건도 마음도 형편만큼, 분수만큼이어야 할 것은 사실 자명한 이치이다. 어쩌면 사랑의 마음이야말로 예금 잔액처럼 바닥나지 않도록 조심스레 아끼며 지키고, 또 늘려가야 할 무엇인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양수업의 하나일 뿐인 수업을 두 사람 다 어떤 지극정성으로 하는지를 보았기에, 그들의 전공이 되고 전업이 된 분야의 일을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든든합니다.

그저 입신양명에 뜻을 두기만 한 사람들이라면 내게 그토록 소중하고 귀한 사람들일 리 없다. 한번은 내 시골집에 와서, 다들 조금씩은 낯설어 하는 곳에서, 사려 깊게 그러나 요란하지 않게 궂은 뒷정리를 가만히 다 해놓고 가는 걸 보았다. 세상에 그런 판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던지. 판결을 할 때 역시 저렇게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표 나게 무얼 이룬 사람들만 중요하겠는가. 세상이 얼마나 무정하든 지금 묵묵하게 어려움을 견디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그러면서도 남들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젊은이들이 그들 둘뿐이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튀어서 어지럽게 눈에 보이니까 우리가 못 보는 것일 뿐. 제 아무리 세상에 개탄할 것이 많다 한들, 눈 맑게 해서 그런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그런 사람들이 힘 잃지 않게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에게 박수쳐주는 것이 내가 생애의 마지막까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다.

인간이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죄 없는 짐승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이렇게까지 자연을 거스르고도 무사할까. 인간이 잡식동물인 한, 먹이사슬 안에서의 죄야 시비해 보아야 부질없는 일이다. 하지만 인류는 넘으면 안 될 선을 이곳저곳에서 이미 넘어도 많이 넘은 것 같다.

다이어트 이야기는 ? 이윤을 챙겨야 하는 산업에 부추겨지기까지 해서 ? 정말이지 너무도 요란하고 너무도 일상적이다. 건강상의 사유로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지만 너무나도 거침없이, 스스럼없이 우리는 다이어트 이야기를 한다. 남을 항상 생각하면서 살 수야 없지만, 적어도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도 허다한 배고픈 사람들은 우리의 안중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많은 지식을 쌓고서, 밥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되어버렸으면서, 부끄러움마저 없어졌을까.

누가 묻겠지. 무얼 얻자고, 무얼 바라고 그렇게까지 무리를 하고 사느냐고. 무리는 확실히 하는데 바란 것은 없다. 무얼 얻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진정한 소득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삶이 얼마나 단순할 수 있는가를 깨달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여주에 내려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이 사는 데 얼마나 조금만 필요한지를 몸으로 체득했다.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정말 조금이었다.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에 다들 목을 매달고들 사는지. 그 많은 불필요한 것들 때문에 얼마나 또 불행한지. 그런데 쓸데없는 것들을 좀 버리면 자유로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제법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저 자본의 메커니즘 속에서 마모되지 않고 이런 삶의 이치를 생각하는 순간도 좀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가끔씩, 잠시나마 그 사슬에서 벗어나서 그들의 젊은 날 모습을 유지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답게 있어야, 그런 사람들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세상은 유지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물론 나도 병나서 주변 괴롭게 하는 일까지는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뜯어고쳐 무리해서 오래 살지 않고 웬만한 것은 그냥 껴안고 살만큼 살려고 한다. 그런 일이 사람 마음처럼 되는 일이 아닌 건 알지만, 지금으로서 하는 생각은 고작 그 정도이다. 그 점에서만은 하늘이 좀 도와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