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돌아서서 성큼성큼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쪽에서는 또다시 짐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만하게 명령을 내리는 듯한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서두를 일이 있을 때면 하인들에게 그런 말투를 썼다. "레이디 제시카께서 중앙 홀에 있다. 즉시 가서 도와드려라."

"아니에요. 공작님은 결혼한 적이 없어요. 내가 공작님의 유일한…… 배우자죠. 그의 후계자로 지정된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제시카는 말하면서 자신의 말 속에 자부심이 숨어 있음을 느끼고 속으로 조소를 머금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뭐라고 했더라?정신이 몸을 지배하며 몸은 그에 복종한다. 정신은 스스로 명령하며 저항과 맞부딪친다. 그래, 요즘 들어 난 점점 더 많은 저항과 부딪치고 있어. 혼자 조용히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시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왜 이런 사기극에 장단을 맞추고 있는 거지?’ 그러나 베네 게세리트의 방법들은 원래 기만적이었다. 그리고 그 방법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이 아니라면 나를 죽이는 도구로 사용되겠죠." 제시카는 느긋함을 가장하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전투에서 베네 게세리트 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그렇게 무서운 존재로 만들어주는 게 바로 그 느긋함이었다.

메입스가 칼을 내렸다. "부인, 예언과 함께하는 삶이 너무 길어지면 계시의 순간이 충격으로 다가오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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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쓰신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서 추린 글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글쓴이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가기를 얼마나 기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알려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죽고 싶었던 두려운 마음을 고백하며 쓴 글에서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대범한 목소리에 기운을 차립니다.

혼자 걷는 게 좋은 것은 걷는 기쁨을 내 다리하고 오붓하게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다리를 나하고 분리시켜 아주 친한 남처럼 여기면서, 70년 동안 실어 나르고도 아직도 정정하게 내가 가고 싶은 데 데려다주고 마치 나무의 뿌리처럼 땅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늘 내 가슴을 울렁거리게 한다.

다시 한눈을 팔 수 있게 되었을 때 내 열쇠가 바로 길가 내 눈높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걸 발견했다. 누군가가 주워서 그렇게 눈에 잘 띄게 걸어 놓았을 것이다. 그 산책 길은 나 혼자만의 길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길은 내가 낸 길도 아니었다. 본디부터 있던 오솔길이었으니 누군가가 낸 길이고 누군가가 현재도 다니고 있어서 그 길이 막히지 않고 온전한 것이다.

길은 사람의 다리가 낸 길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이 낸 길이기도 하다. 누군가 아주 친절한 사람들과 이 길을 공유하고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내가 그 길에서 느끼는 고독은 처절하지 않고 감미롭다.

그가 큰 소리로 하품을 했다. 하품을 하려면 그냥 할 것이지, 호랑이가 우짖는 것처럼 ‘어흥!’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가락까지 붙이니까 졸던 사람까지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남이야 그러건 말건 그는 자기 집 안방에서처럼 거침도 없고 눈치도 없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나보다는 착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고, 그런 날은 살맛이 난다.

"원 뭐 눈엔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 그런 것밖에 못 보냐? 난 부처님 한 분 우러르기에 그저 감지덕지하느라 그런 건 눈 귀에도 안 들어오더니만……."

사람을 믿었다가 속았을 때처럼 억울한 적은 없고, 억울한 것처럼 고약한 느낌은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어떡하든지 그 억울한 느낌만은 되풀이해서 당하지 않으려든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

믿었다가 속은 것도 배신당한 것에 해당하겠지만 못 믿었던 것이 실상은 믿을 만한 거였다는 것 역시 배신당한 것일 수밖에 없겠고 배신의 확률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높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못된 사람 만난 일 없다고 술회할 수 있듯이 세상엔 믿을 만한 게 훨씬 더 많다. 우리가 믿음에 대해 쉬 잊고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타인에게 풍기지 못해 하는 것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의 바탕이 결코 불신이 아니라 믿음이기 때문일 것이다.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 봄에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나는 전에 그를 봤을 때 각별하게 불쌍히 본 적도 없었고 그가 앉은뱅이라는 것조차 믿었던 것 같지가 않다. 앉아서 주춤주춤 자리를 옮기는 것도 봤고, 앉아서 다니기 편하게 손에다 슬리퍼를 꿰고 있는 것도 봤지만 그게 반드시 앉은뱅이란 증거가 될 순 없었다. 허름한 바지 속의 양다리는 실해 보였고 아마 아침엔 걸어 나와 온종일 저렇게 흉물을 떨다가 밤이면 멀쩡하니 털고 일어나 걸어 들어가겠거니 하는 추측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약아빠졌달까, 닳아빠졌달까 그렇게 되어 있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거리에서 거지에게 돈을 주어본 일이 거의 없다. 한겨울에 벌거벗고 울부짖는다거나 끔찍한 불구라든가 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었거나 해서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가엾은 거지를 보고 주머니를 뒤적이다가도 문득 마음을 모질게 먹고 그냥 지나친다.

그까짓 몇 푼 보태주는 것으로 자기 위안을 삼는 것 외에도, 대체 무엇을 해결할 수 있나를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내 눈앞의 앉은뱅이 거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를 못하면서 거지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이고 피상적인 예비지식을 갖출 만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예비지식 때문에 나는 거지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내 눈으로 확인한 그의 비참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속아만 산 사람처럼, 정치가의 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세무쟁이를 믿지 않던 버릇으로, 외판원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장사꾼을 믿지 않던 버릇으로, 거지조차 못 믿었던 것이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통증과 함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누를 수 없다. 믿지 못하는 게 무식보다도 더 큰 죄악이 아닌가도 싶다. 거지에 대한 한두 푼의 적선이 거지를 구제하기는커녕 이런 적선이 있기 때문에 근본적인 구제책이 늦어져 거지가 마냥 거지일 뿐이라는 제법 똑똑한 생각을 요즈음은 어린이까지도 할 줄 안다. 사람들이 갈수록 더 똑똑해지고 있다. 그럴수록 불쌍한 이웃을 보면 이런 똑똑하고, 지당한 이론 대신 반사작용처럼 우선 자비심 먼저 발동하고 보는 덜 똑똑한 사람의 소박한 인간성이 겨울철의 뜨뜻한 구들목(온돌방의 바닥 중 아궁이에 가까운 쪽 - 편집자 주)이 그립듯이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고 세상인심 따라 영악하게 살다 보니 이런 소박한 인간성은 말짱하게 닳아 없어진 지 오래다. 문득 생각하니 잃어버린 청춘보다 더 아깝고 서글프다. 자신이 무참하게 헐벗은 것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나는 그녀의 피곤하고 불안한 낮잠에서 그녀의 중노동, 불량한 생활환경, 불결한 잠자리, 조악한 식사, 업주로부터의 인간 이하의 모욕적인 대접, 그리고 그녀가 도망친 가난한 농촌 등 버스 차장이란 직업에 대해 갖고 있던 일반적이고 알량한 상식을 한꺼번에 확인한 것처럼 느꼈고, 그래서 얼싸안고 내 품에 편히 재우고 싶을 만큼 감상주의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차장 아가씨한테 몹시 화를 내지는 않았다. 나이 탓인지도 모르겠다. 꼿꼿이 선 채 불안하고도 달게 자던 소녀에 대한 한 가닥 모성애 같은 게 그때까지도 내 내부에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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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에는 중고라는 것이 없지.
천년을 가도 만년을 가도 영원히 청춘인 돌."
- 박완서

올겨울도 많이 추웠지만 가끔 따스했고,
자주 우울했지만 어쩌다 행복하기도 했다.
올겨울의 희망도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봄이고,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여기저기서 달콤하게 속삭이는봄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하늘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수많은 믿음의 교감 중에서

달이 나를 따라다닌다는 걸 알고부터는내가 쓸쓸할 때는 달도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가 기쁠 때는 달도기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향집을 떠나 처음 서울에 와서산동네 빈촌에서 마음 붙일 곳이 없었을 때달이 서울까지 나를 따라왔다는 걸 발견하고는얼마나 놀라고 반가웠던가달구경」 중에서

또 한 살 먹는구나.
설이 심란하다가도 몰라보게 자랐을 손자들 조카들세배 받을 생각을 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렸을 적에 늙은 사람을 보면저렇게 늙어서도 사는 재미가 있을까 의심했었는데사는 재미란 죽는 날까지도 있게 마련인가보다.
새해 소망」 중에서

우리들의 삶은무엇으로구성되어 있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그리 거창한 것은 없다.

집으로 가는 길,
나를 따라오는 달을 보며 받은
‘위로‘

엄마 품에서이야기를 들으며잠들었던유년 시절의‘향수’

매년 돌아오는 계절에도감동으로 반응하게 되는
‘사랑‘

모래알처럼 우리들의 삶을구성하는 작은 것들이 있다.

박완서 작가는그 모래알들을 손가락 사이로흘려보내지 않고 빛나는 진실들을길어 올렸다.

인생의 이야기를거르고 걸러,
가장 진실한 것만을남겨낸 그녀의 글

우리는언제나 그랬듯이그녀의 글을 통해조금씩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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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둘 다 고집이 세군요. 그것만은 분명해요." 그녀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해 재빨리 두 번 심호흡을 하고 말을 이었다.

"언젠가 그 방법을 나한테도 가르쳐줬으면 좋겠군. 걱정거리를 한편으로 제쳐두고 현실적인 문제로 주의를 돌리는 방법 말이오. 그건 베네게세리트의 방법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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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란하게 번쩍거리지 않는 식탁을 사랑할 줄 안다. 기쁨을 좋아한다. 뜻밖의 선물 같은 순간을 좋아한다. 드물게 가식 없는 대화를 좋아한다.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줄 안다. 존중이 좋은 것임을 안다.

매일매일 이러한 것들과 함께 살아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매일 사랑과 행복과 이해와 존중과 감사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온통 저항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광범위하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피난처가 된다.

피난처에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한다. ‘사랑하는 ??과 함께 살기’가 삶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면 ‘??’에는 인간뿐 아니라 개, 화분, 나무, 제비, 돌고래, 책, 태양, 바다 등 온갖 비인간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피난처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당하는 것에 대해 같이 욕하고 저항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성을 더 나쁜 것과 바꿀 필요가 없다. 굳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피난처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모인 곳이다.

피난처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곳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원하고 마는 세계에 저항하고 인간성을 하찮게 만드는 세계에 저항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훨씬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재창조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하면서, 서로 같이 그렇게 된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는 서로 꿈의 세계를 만들고 나눈다.

그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았지만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자주 싸우곤 했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피난처뿐이다.

모두가 새출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53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당신의 영혼을 다 바칠 가치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 프리드리히 휠덜린

제 생각에 상황이 어떻든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의 결론은 같습니다. 바로 아파트 준비입니다.

비옥한 어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기른다.
? 어슐러 K. 르 귄, 『세상의 끝에서 춤추다』54

히틀러는 다른 것이 탐났다. 그 다른 것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인류의 다른 유산은 러시아의 세계적인 식물학자 바빌로프가 1894년부터 모은 38만 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였다.

어린 바빌로프는 어려서 식물 표본 만들기와 어학 공부를 즐겼고 호기심이 많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진학 직전엔 인생의 방향키도 없고, 구체적인 목표는 아직도 안개 속에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나중에 페르시아어, 터키어, 암하라어 등 열다섯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유전학, 지리학, 생태학, 언어학, 진화 연구에 능통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능력을 갖췄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 지식을 온통 인류를 위해 썼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그는 안내인에게 버림받고 폭도들에게 붙들렸다 탈출하고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말라리아에 걸리고 무장 반군에게 총격을 받고 사자 떼에 쫓기는 등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2백 편 남짓 논문을 썼다.

그는 완두콩을 얼음물에 담가두면 그것만으로도 후대 완두콩은 추위에 더 잘 견디게 된다고 주장했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55

종자를 지킨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굶어 죽었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종자들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꼭 크리스마스 때 듣는 성인들의 이야기 같다.

성 바빌로프의 날. 자신의 생존 말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무엇이 그들이 숨을 거둔 순간만큼 진실하고 깨끗할 수 있겠는가? 먼 곳에서 온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밥 한 끼 벌기가 수월치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찬양해야 한다. 먼 곳에서 우리에게 삶의 기회를 주었으므로.

후반의 이야기는 용기를 준다. 나도 때가 되면 바빌로프와 동료들처럼 해내고 싶다.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하면서 버티고 싶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걸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56

그들은 다가올 세상에 책임감을 가졌다. 최후의 순간까지 삶을 미래와 연결시켰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미 미래에 속해 있었고 미래의 일부였고 언제나 미래의 일부일 것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몰랐지만 당시 그들은 어두운 세상을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해?", "내가 그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위해 뭘 해주는데?"라고 묻지 않고 해냈다. 사실 이렇게 묻기 시작하면 사랑도 끝이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해줘야 하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건데?" 사랑과 연대는 이런 말들 속에서 깨져왔다.

그들에게는 다른 숨은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대가도 보상도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살아가는 이유 자체였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것,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사랑이다. 이런 자발성이 주체적인 인간을 만든다.

당신이 목성을 맡는다면, 달은 내가 맡을게요!" 바빌로프와 동료들이 식량을 맡았다면 나는 무엇을 맡으면 좋을까? 나에게도 나만의 노력, 나만의 어제가 있다면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변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내일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있을 것이다. 나만이 질 수 있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게도 단순하게 나아갈 길이 또렷이 보인다.

행복했다. 그런 행복이 다른 어떤 행복보다 더 행복같이 느껴졌다. 밀란 쿤데라는 "사람은 너무 기쁘면 한 가지만 원한다. 온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때가 그랬다.

온 세상의 손을 잡아끌어다 그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나는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그 경험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에만 담아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세상을 향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그토록 힘이 세다. 나는 이후로 몇 번 더 열대의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내게 열대 바다 여행의 의미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향기에서 출발해 생명으로 이어졌다. 매번 나는 바다의 많은 것들과 부드럽게 섞였다. 열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을 때, 바닷바람을 쐬며 걸을 때, 해가 뜨고 지거나 바다에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 때, 스콜이 쏟아지면 읽던 책을 들고 맨발로 뛰어 숙소로 돌아갈 때, 소금기 묻은 머리를 감을 때, 그럴 때 삶은 참을 수 없이 환했다.

세상엔 아직 아름다움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아야 할 세부사항으로 가득했다.

프루스트는 용해를 대략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사랑처럼 내 안에 번져가는 그 행복감과 더불어 내가 어떤 귀한 생명의 정수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그저 우연히 태어나서 살아가는 무의미한 존재, 결국 나중에는 덧없이 죽어가고 말 존재로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 단어를 알기 전부터 그 단어를 살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원히 좋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 또한 느낀다.?이것이 내가 내 일과 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뿐이다. 아마도 이런 고민 끝에 어슐러 K. 르 귄은 아름다운 의미를 담은 단어 하나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양은 통제고 음은 허용이다. 양이 음보다 강해 보이지만 둘 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도 혼자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의 성질로 변하려고 한다. 음양은 상호보완적이어야 하지만 그동안 대체로 지배자였던 양은 항상 음과의 상호의존성을 부인할 방법을 찾고 음을 부정적이고 열등하고 나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할 뿐 생명이란 원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어떻게 해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면 자연과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여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법학자 제데디아 퍼디는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발견했을 때 자신의 방식을 가장 잘 바꿀 수 있다.

두려운 것이자 꼭 피해야 하는 위협.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자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미덕. 두 충동 모두 인간의 손에 머물 수 있지만, 첫 번째 것은 태워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한 그 손을 멈추게 한다. 두 번째 것은 인사를 하거나 평화를 제안하기 위해 그 손을 뻗은 채로 있게 한다. 이 몸짓은 우리의 다음 집을 짓는 데 있어 사람들 사이의, 그러나 우리를 초월하는, 협업의 시작이다.58

이 위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홀로 애쓰고 있는 사람은 늘 감동을 준다.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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