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요란하게 번쩍거리지 않는 식탁을 사랑할 줄 안다. 기쁨을 좋아한다. 뜻밖의 선물 같은 순간을 좋아한다. 드물게 가식 없는 대화를 좋아한다.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줄 안다. 존중이 좋은 것임을 안다.

매일매일 이러한 것들과 함께 살아가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매일매일 사랑과 행복과 이해와 존중과 감사에 둘러싸여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온통 저항해야만 하는 이야기에 광범위하게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우리에게 피난처가 된다.

피난처에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한다. ‘사랑하는 ??과 함께 살기’가 삶의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면 ‘??’에는 인간뿐 아니라 개, 화분, 나무, 제비, 돌고래, 책, 태양, 바다 등 온갖 비인간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피난처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파괴당하는 것에 대해 같이 욕하고 저항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성을 더 나쁜 것과 바꿀 필요가 없다. 굳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다. 피난처는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모인 곳이다.

피난처는 계속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곳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원하고 마는 세계에 저항하고 인간성을 하찮게 만드는 세계에 저항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훨씬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재창조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하면서, 서로 같이 그렇게 된다. 이렇게 살면서 우리는 서로 꿈의 세계를 만들고 나눈다.

그와 아버지는 사이가 좋았지만 한 가지 주제를 들고 자주 싸우곤 했다. 세월호였다. 아버지는 아이들 죽었으면 이제 그만하고 돈 받고 합의하고 말지 왜 저렇게 하느냐고 유족들을 비난했다. 아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아버지, 내가 죽어도 그렇게 말할 거예요?", "아버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하던 아들이 죽어버렸다.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과 그 슬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없다면 부모들은 한시도 살 수가 없을 것이다. 죽은 자식을 둔 부모들이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편안한 숨이다. 그들에게 가볍고 상쾌하고 부드러운 숨은 없다. 앞으로도 그런 날은 드물 것이다. 숨 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시리고 찔리고 아리고 결국은 찢어질 테니까. 그나마 숨 쉴 수 있는 곳은 이해와 연민 어린 마음이 모이는 곳, 함께 울고 슬퍼하고 저항하고 목소리를 높여 싸워주는 곳?피난처뿐이다.

모두가 새출발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 알베르 카뮈, 『페스트』53

인간답게 지낸다는 것은 거대한 운명 앞에 스스로의 삶을 즐겁게 던지는 것이지요. 그래야만 한다면 말입니다.
? 로자 룩셈부르크

당신의 영혼을 다 바칠 가치가 있는 곳으로 가십시오.
? 프리드리히 휠덜린

제 생각에 상황이 어떻든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의 결론은 같습니다. 바로 아파트 준비입니다.

비옥한 어둠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영혼을 기른다.
? 어슐러 K. 르 귄, 『세상의 끝에서 춤추다』54

히틀러는 다른 것이 탐났다. 그 다른 것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불과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스탈린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인류의 다른 유산은 러시아의 세계적인 식물학자 바빌로프가 1894년부터 모은 38만 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와 열매였다.

어린 바빌로프는 어려서 식물 표본 만들기와 어학 공부를 즐겼고 호기심이 많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하지만 대학 진학 직전엔 인생의 방향키도 없고, 구체적인 목표는 아직도 안개 속에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이상 기후로부터 작물을 지켜내는 법을 아는 농부들을 찾아 인터뷰했고 종자 심는 법을 배워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일어, 이탈리아어, 영어, 라틴어, 프랑스어를 할 줄 알았고 나중에 페르시아어, 터키어, 암하라어 등 열다섯 가지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유전학, 지리학, 생태학, 언어학, 진화 연구에 능통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능력을 갖췄다는 게 놀랍기도 하지만 그 지식을 온통 인류를 위해 썼다는 것은 더욱 놀랍다.

그는 안내인에게 버림받고 폭도들에게 붙들렸다 탈출하고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말라리아에 걸리고 무장 반군에게 총격을 받고 사자 떼에 쫓기는 등 온갖 일을 겪으면서도 2백 편 남짓 논문을 썼다.

그는 완두콩을 얼음물에 담가두면 그것만으로도 후대 완두콩은 추위에 더 잘 견디게 된다고 주장했다.

연구원들은 문을 닫아건 채 얼어붙을 것 같은 음습하고 차가운 지하실에서 남은 종자와 씨감자를 지켰다. 추위로 몸이 얼어붙고 굶주림에 허덕이면서도 교대로 근무하며 계속 종자를 지켰다. 바빌로프의 동료 중 가장 헌신적이던 아홉 사람이 굶주림으로 죽었다. 그들은 끝내 자신이 돌보던 씨앗을 먹지 않았다.55

종자를 지킨 바빌로프와 동료들은 굶어 죽었지만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 종자들에서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이 나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꼭 크리스마스 때 듣는 성인들의 이야기 같다.

성 바빌로프의 날. 자신의 생존 말고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무엇이 그들이 숨을 거둔 순간만큼 진실하고 깨끗할 수 있겠는가? 먼 곳에서 온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들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준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밥 한 끼 벌기가 수월치 않아도, 우리는 그들을 찬양해야 한다. 먼 곳에서 우리에게 삶의 기회를 주었으므로.

후반의 이야기는 용기를 준다. 나도 때가 되면 바빌로프와 동료들처럼 해내고 싶다. 내가 해야만 할 일을 하면서 버티고 싶다.

일하는 게 힘들었죠. 매일 아침 일어나기도 힘들었고 손발을 움직이기도 몹시 힘들었답니다. […] 하지만 씨앗을 먹지 않고 견디는 일은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그걸 먹는다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죠. 씨앗에는 나와 내 동지들이 살아가는 이유가 들어 있으니까요.56

그들은 다가올 세상에 책임감을 가졌다. 최후의 순간까지 삶을 미래와 연결시켰다. 그들은 죽었지만 이미 미래에 속해 있었고 미래의 일부였고 언제나 미래의 일부일 것이었다. 그들 중 아무도 몰랐지만 당시 그들은 어두운 세상을 받치는 버팀목이었다. 그들은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해?", "내가 그 일을 하면 남들은 나를 위해 뭘 해주는데?"라고 묻지 않고 해냈다. 사실 이렇게 묻기 시작하면 사랑도 끝이다. "왜 내가 너를 사랑해줘야 하는데? 너는 나에게 뭘 해줄 건데?" 사랑과 연대는 이런 말들 속에서 깨져왔다.

그들에게는 다른 숨은 이유 같은 건 없었다. 대가도 보상도 이유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살아가는 이유 자체였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는 것, 이것이 가장 급진적인 사랑이다. 이런 자발성이 주체적인 인간을 만든다.

당신이 목성을 맡는다면, 달은 내가 맡을게요!" 바빌로프와 동료들이 식량을 맡았다면 나는 무엇을 맡으면 좋을까? 나에게도 나만의 노력, 나만의 어제가 있다면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변화, 나만이 만들 수 있는 내일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있을 것이다. 나만이 질 수 있는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게도 단순하게 나아갈 길이 또렷이 보인다.

행복했다. 그런 행복이 다른 어떤 행복보다 더 행복같이 느껴졌다. 밀란 쿤데라는 "사람은 너무 기쁘면 한 가지만 원한다. 온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때가 그랬다.

온 세상의 손을 잡아끌어다 그 자리에 세우고 싶었다. 나는 누구를 향해서인지 모르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그 경험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에만 담아뒀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세상을 향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그토록 힘이 세다. 나는 이후로 몇 번 더 열대의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내게 열대 바다 여행의 의미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향기에서 출발해 생명으로 이어졌다. 매번 나는 바다의 많은 것들과 부드럽게 섞였다. 열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을 때, 바닷바람을 쐬며 걸을 때, 해가 뜨고 지거나 바다에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 때, 스콜이 쏟아지면 읽던 책을 들고 맨발로 뛰어 숙소로 돌아갈 때, 소금기 묻은 머리를 감을 때, 그럴 때 삶은 참을 수 없이 환했다.

세상엔 아직 아름다움이 여기저기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아야 할 세부사항으로 가득했다.

프루스트는 용해를 대략 이렇게 설명했다. "마치 사랑처럼 내 안에 번져가는 그 행복감과 더불어 내가 어떤 귀한 생명의 정수로 가득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제 그저 우연히 태어나서 살아가는 무의미한 존재, 결국 나중에는 덧없이 죽어가고 말 존재로 더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 단어를 알기 전부터 그 단어를 살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원히 좋은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은 욕망 또한 느낀다.?이것이 내가 내 일과 내 삶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의 방향성을 바꾸는 것뿐이다. 아마도 이런 고민 끝에 어슐러 K. 르 귄은 아름다운 의미를 담은 단어 하나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양은 통제고 음은 허용이다. 양이 음보다 강해 보이지만 둘 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느 쪽도 혼자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의 성질로 변하려고 한다. 음양은 상호보완적이어야 하지만 그동안 대체로 지배자였던 양은 항상 음과의 상호의존성을 부인할 방법을 찾고 음을 부정적이고 열등하고 나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할 뿐 생명이란 원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이 어떻게 해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한다면 자연과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여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법학자 제데디아 퍼디는 인간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발견했을 때 자신의 방식을 가장 잘 바꿀 수 있다.

두려운 것이자 꼭 피해야 하는 위협.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자 지켜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미덕. 두 충동 모두 인간의 손에 머물 수 있지만, 첫 번째 것은 태워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한 그 손을 멈추게 한다. 두 번째 것은 인사를 하거나 평화를 제안하기 위해 그 손을 뻗은 채로 있게 한다. 이 몸짓은 우리의 다음 집을 짓는 데 있어 사람들 사이의, 그러나 우리를 초월하는, 협업의 시작이다.58

이 위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홀로 애쓰고 있는 사람은 늘 감동을 준다.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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