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vs 영화 

 

원작- 안개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 수록, 스티븐 킹)

                                               영화- 미스트    (프랭크 다라본트)

 

              

 B급 몬스터 공포물, 아리스토텔레스를 호출하다

(스포일러가 일부 있음) 

 

-단편집 <스켈레톤 크루>에서 재밌는 축에 속하는 중편 '안개'는 초중기 스티븐 킹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정확한 기원을 찾을 수 없는 외재적 공포, 그리고 극한 상황에 부딪힌 인간 군상의 자발적 붕괴. 특히 후자의 경우는 스티븐 킹의 초자연 공포물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으니, '안개'는 킹의 팬들에게는 작은 선물상자다.

  가시적인 공포 없이 불안감만을 쌓아오던 전반부가 지나면 서서히 '압력'이 가중된다. 고립된 슈퍼마켓 안에 갇힌 사람들의 불신과 불안이 어떤 임계점을 향해 다가간다. 이 불안의 압력은 어떻게든 배출되어야 하는데, 안개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바깥에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형형색색의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중이다. 압력은 계속 출구를 찾아 헤매지만 출구는 없다. 당연히 폭발은 내부에서 먼저 발생하고, 광기가 슈퍼마켓을 집어삼킨다. 

  그런데 주인공만은 사태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가 슈퍼마켓을 빠져나와 안개 속으로 피신(!)하는 장면은 어딘가 계몽적이고 냉소적이다. 주인공은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불안 압력이 자신에게 끼칠 위험 정도를 계속 가늠하다가 내부의 위험이 더 강해지는 순간 미련없이 밖으로 나선 것이다. 그는 행동하는 회의주의자다. 겉보기에는 괴물이 인간보다 훨씬 무섭지만, 인간 내부에서 발생한 위협이 괴물들의 그것보다 더할 수 있다는 냉정한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 '안개'의 열린 결말은 그래서 냉소적이다. 인간들 사이에 남느니 차라리 불확실한 위험들 속으로 몸을 던져야 하는 씁쓸함.

  문제는 영화다. 영화는 소설 이후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데, <쇼생크 탈출>로 각색 실력을 인정받은 프랭크 다라본트가 야심차게 준비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원작자 스티븐 킹이 격찬했다는 그 결말은, 적어도 국내에서는 희대의 낚시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 받았다. 그러나 더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이 비극적인 결말은 원작에서 성큼 나아간 것이다. 냉소적인 원작은 각색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던 좋은 비극의 형태로 탈바꿈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늘 열성적이고 최선을 다하며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최대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쓰면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그는 현대 드라마에서는 어색할 정도로 완벽한 인격체이며, 회의주의자가 아닌 뜨거운 영웅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대 비극의 주인공이다.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을 했음에도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소설의 가장 큰 적은 인간 군상이지만, 영화의 가장 큰 적은 절대적인 운명 그 자체다. 이 결말이 영화 전체를 한 단계 올려 버린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으로 차갑게 마무리된 원작을 밀어붙여서 고대 비극의 '뜨거운' 구성을 완성시켰다. 이 결말을 반전이라고 한다면, 배반당한 것은 관객들의 평범한 기대다. B급 외계 괴수 영화에서 설마 마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 그것이 이 영화의 '낚시'였다. 마지막 순간의 절망에 존속살인의 요소가 있다는 점은 감독이 고대 비극에 바친 작은 오마주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다른 미덕들도 두루 갖추고 있다. 저예산으로 최대한 열심히 만든 독창적인 괴수들의 비주얼, 그리고 사람들의 눈높이를 유지하며 불안하게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는 카메라워크가 그렇다. B급 영화만이 가진 미덕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이제는 구할 수 없는 감독판 DVD는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한 장은 원래 감독과 스티븐 킹이 개봉 버전으로 쓰려고 했던 '흑백버전'이 들어 있다. 흑백 화면 속에서 괴수들은 더욱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안개는 화면의 명암 대비를 지우면서 그야말로 장막처럼 들어찬다.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은 저예산 다큐멘터리 속의 인물들 같다. 이 흥미로운 버전을 볼 수 있다면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시길. 어떤 소설이 영화를 통해 한 걸음 더 나아간 극히 드문 사례이니까.

 

-외국소설MD 최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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