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강남구청 역에서 점심약속이 있다. 

 남편은 9시 반쯤 출근을 했고 10시 반에서 1시 반 사이에 온다는 택배는 정확하게 10시 30분에 도착을 했다. 나는 어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으므로 생략하고 아침설겆이를 마치고 아이를 보행기에 태운채 옷을 갈아입고 구두를 신을 요량으로 스타킹을 신었다. 세수를 하고 렌즈 세척제를 사는 것을 자꾸 잊어서 렌즈를 세척할 수 없으므로 안경을 그냥 쓰고 나갈 생각을 하고 스킨을 바르고 수분크림을 바르고 아이크림을 바르고 SPF 30이라는 크림을 바른다.  

아이는 아까 세수를 시켰고 손과 발도 닦았다. 얼굴에 크림을 발라주고 벌겋게 건조해서 일어난 부분에 새로 산 비싼 크림을 더 덕지 덕지 발라줬다. 아이의 기저귀와 물티슈와 가제수건과 수유패드와 구강티슈는 언제나 가방에 상비되어 있고 나는 지갑과 아이의 모자와 카메라와 지하철에서 아이가 잠들었을 때 읽을 내일이면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책을 한 권 가방에 넣는다.

아이의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갈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아이가 입을 두툼한 카디건도 가방에 넣고 무릎담요도 돌돌 말아 가방에 넣고 빵빵하나 어깨끈은 애매하게 짧은 가방을 준비하고 아이를 안고 띠로 졸라맨다. 가방을 어깨에 메고 창문을 닫고 현관앞에서 열쇠를 챙기고 유모차를 들고 문을 닫고 좁디 좁은 문앞 현관에 서서 문을 잠근다. 구두를 신으면 키가 갑자기 커지기 때문에 계단 아래가 잘 보이지 않는 위험함이 있다. 아이를 안았을 때 내 발끝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계단 한 칸 한 칸은 그야말로 낭떠러지와 같다. 그 계단을 나는 한 참 내려가야 한다. 우리집은 7층의 고도를 지닌 5층에 있다. 엘리베이터는 커녕 유모차를 들고 내려가기도 좁은 계단과 계단 뿐이다.

집앞에서 운 좋게 택시를 바로 잡아타서 트렁크에 유모차를 싣고 근처 지하철역까지 간다.

손주가 10개월이라던 택시기사아저씨는 친절하게도 트렁크에서 유모차를 꺼내주셨다.

나는 아이를 안고 유모차를 들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을 두 번 돌아 개찰구가 나오고 개찰구를 지나 또 계단을 내려간다. 유모차를 들고. 아이를 안고, 가방을 들고.

승강장에 도착하여 지하철을 기다린다. 지하철이 오면 유모차를 들고 가방을 들고 아이를 안고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 안에 사람이 적지 않아 마땅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으나, 노약자 석이 없는 열차의 끝자리쯤에서 유모차를 펴는데 그 쪽에 서 있는 등산복 차림의 여편네들은 발끝하나 비켜주지 않았다. 유모차를 펴고 가방은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있는데 건너편 노약자석에 버젓이 앉아있던 양복입은 젊은 남자가 자리를 양보해준다. 그는 자리를 양보해주기 위해 거기에 앉았던 걸까. 아무튼, 나는 아이의 유모차를 나를 보게 돌려놓고 아이와 눈을 맞춘다. 내 옆에 앉은 할머니는 나의 아이를 보고 "네가 꽃이다"라고 말하며 계속 아이와 눈을 맞추고 웃어준다. 자리를 양보했던 남자는 몇개월이냐고 묻고 아이의 볼을 살짝 만져본다.

나는, 고운외모가 사람의 심성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나의 아이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웃어주고 예뻐해주며 감탄한다. 모두들, 아이를 보고 귀엽다 예쁘다. 라고 말을 해준다. 아이는 자기를 보고 인상을 쓰거나 미워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지만. 호감가는 외모를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유리한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갈아타는 역에 도달했다. 그러나 이수역에서 내려야 할 것을 이촌역으로 착각했고 다행히 이촌역에는 개찰구까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잠든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채로 다시 이수역으로 돌아갔다. 예전엔 이수역에서 7호선을 갈아타려면 두 번의 엘리베이터로 끝났던 것 같은데 뭔가 잘못되었는지 내가 길을 잃은 것인지, 이번엔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수번씩 갈아타야했고, 배낭여행할 때 10시간동안 쉬지 않고 달리던 버스가 펜스도 없는 낭떠러지 산길에서 트럭을 추월하며 달리던 것처럼, 나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쉼호흡을 했다. 다시 아이를 일으켜서 안고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유모차에 가방을 던져놓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를 몇 차례 반복하여 나는 무사히 7호선으로 갈아탔고 강남구청역에서 내렸다.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다시 나는 아이를 안아올리고 유모차를 접어야 하나 망설이던 차에, 꼭 희정이의 남자친구처럼 생긴 총각이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더니 들어들이겠다고 하며 번쩍 유모차를 들어 환한 출구까지 올려주었다. 그 청년은 여자친구를 거기서 만나기로 했는지 유모차를 들 때는 혼자였는데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어보니 한 머리긴 여자의 어깨위에 팔을 두르고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강남구청역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하였는데 식당의 통로가 매우 좁아 동행이 아이를 안고 나는 유모차를 들어 올려 사람들이 다리 사이를 비켜가며 식당의 안 쪽 방으로 들어갔고 밥을 먹는 내내 답답한지 보채는 아이를 외면하고 내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와 길을 건너 스타벅스에 들어갔는데 뭔가에 성질이 난 바리스타라는 알바생이 내가 주문한 까페모카 두 잔과 에스프레소 두피오를 찍다말고 사라져버렸으며 그는 우리가 내내 앉아있는 동안 커피 수저를 거칠게 두들겨 저자가 지금 단단히 뭔가에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렸다. 

 스타벅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커피를 마시고 나온 나는 동행에게 아이를 안게 하고 나는 가방을 유모차에 얹은 채 계단을 두 바퀴 돌아 개찰구로 내려갔고 개찰구에서 아이를 안아 띠로 묶고 유모차는 동행에게 들게 하여 승강장까지 내려갔다. 동행은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릴 예정이었고 나는 다시 이수역으로 가야했다. 지하철이 들어왔고 동행은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먼저 내렸고 나는 이수역에 내렸는데 이번에도 아까처럼 반복된 길을 다시 걸어야했다. 키가 작은 할머니 두 분이 4호선 갈아타는 길을 물어서 나도 4호선을 갈아타야 하니 이쪽으로 가시면 된다고 했다.

할머니 둘에게 방향을 알려드리고 나는 내 갈길을 갔는데 이번에는 아이가 잠이 들어 다시 안아올렸다가는 심하게 보채며 울 듯 하여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기로 대단한 결심을 하였다. 한 번 시도를 했다가 다시 에스컬레이터에서 급하게 내리고 다시 숨호흡을 고른 채 인적이 드물어진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나는 뒤로 돌아서고 아이의 머리를 아래쪽으로 향하게 하여 거꾸로 든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으며 다시 올라가야 할 때도 아이의 발을 위로 향하게 하여 아래쪽에서 내가 유모차를 받쳐든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보기에는 매우 쉬워보였겠지만, 등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수번의 에스컬레이터 타기로 나는 마치 밤늦게 도착한 둔황역에서 2시간동안 가로등 하나 없는 자작나무길을 달리던 택시안의 어둠속에 다시 들어온 것 같았다. 

 이수역 4호선 승강장에는 창동역에서 사상사고가 있어서 사당행 열차는 늦게 들어온다는 메세지를 전했고 아까 그 할머니 두 분도 옆에 서 있었다. 그 양반들이 나보고 어디로 가느냐 물었고 그 분들은 사당으로 간다고 했다. 다시 이촌역으로 가서 루브르 박물관전을 볼까 했던 고민은 오이도행 열차가 너무 빨리 들어온 탓에 그냥 접었다. 그리고 나는 지하철을 타고 인덕원 역에서 내려서 아이를 다시 안고 유모차를 이번엔 접어 어깨에 메고 가방을 메고 한참을 한참을 걸어서 안양방면 버스 정류장쪽으로 나왔다. 버스 정류장이 눈에 보였고 그 전에 가판대가 하나 있었는데 목이 매우 말랐으나, 음료수를 하나 사면 그 역시도 짐이 될 것이라서 참았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오늘의 에스컬레이터 전을 기억하며 버스를 타겠다고 다짐했고 집근처 버스 정류장에 가느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한 버스기사의 버스를 탔다. 나는 한국에 들어온 이래 내내 이런식으로 버스를 타고 다니고 있다. 번호는 외우지 못하고 있다. 왜 버스 번호를 외우지 못하는가는 나도 모르겠는데, 수도권 도시라 그런지 11-1이 있으면 11-5까지 있는데다가 그중 일부는 빨간색 파란색으로 구분되어져서 너무나 어렵다. 게다가 버스는 그 번호를 기억했다가 늘 잊어버린 후에 다시 탈 기회가 생기므로.

아까 한 대는 집근처에 가지 않는다고 하여 보내고 집근처에 갈 것으로 기억되는 버스기사에게 방향을 물어 올라탔다. 버스카드로 버스비를 내고 2인용 자리에 앉아서 옆에 가방과 유모차를 세워두었다. 아이는 창밖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안양시내로 들어왔을 때 라디오에서는 원미연의 "이별여행"이 흘러나와서 나는 아이에게 조용히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사는 꽤 많았다.

버스에서 내릴 때 같이 내리는 50대 아주머니가 계속 나를 흘끗거리며 도움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미소를 건넸고 나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버스에서 내려 유모차를 펴고 아이를 다시 유모차에 태워 정류장 앞 슈퍼에서 콩나물과 바지락, 오렌지 주스 하나를 사서 아이의 유모차 아래짐칸에 싣고 오는 길에 바람이 많이 불어 낙엽이 휘날렸는데 아이가 그걸 보고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아이에게 모자를 씌우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 로 시작하는 가을이라는 동요와 가을이라 가을바람 솔솔 불어오니 - 를 부르고 나니 집앞에 도착했다.

유모차를 밀어 올려 1층 현관에 들어와서 아이 유모차의 짐칸에 실린 슈퍼의 까만봉지를 꺼내고 가방을 꺼내들고 아이를 안아서 띠로 묶고 유모차를 접고 어깨에 메고 계단을 한참 올라 집에 도착했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오늘 아침 티비프로에서 은행의 친절에 대해 이야기 하자 어제 거래은행에서 밥먹었냐는 인사를 세 번이나 들었다면서 사무실 이전식때 꼭 불러달라고 지점장이 그러더라는 남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는 그 은행에 가면 어깨에 띠를 멘 아줌마가 되도록 창구로 가지 않고 기계에서 일을 해결하도록 유도당한다고 말을 했던 것까지 자꾸 떠오른다. 남편의 그 얘기는 오늘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내내 떠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떠올랐다. 그리고 예전에 엄마는 은행에 가지 않고 지점장이 가게로 찾아왔었다는 얘기를 왜 하지 못했는가 내내 후회하고 있다. 하루종일. 
 

2006. 11.  

(이 때 내 아이는 약 7개월쯤 되었을 때다. 워낙에 몸이 좋으시어;; 당시 11kg 정도 나갔었다.) 

 

 

당시 내가 외출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던 유모차와 아이의 모양새,  그리고 저 뒤에 있는 기저귀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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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해로 서른 다섯이 된다.  그리고 가정주부이며, 아이의 엄마이고, 프리랜서 아닌 프리랜서 형태의 웹마스터 일을 종종 한다. 원격대학의 학생이기도 하고, 아직은 그래도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이긴 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서른 다섯에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들이 몇가지 있다. 그런 것중에 몇 가지는 다시 스무살로 돌아가 탱탱하고 젊은 몸을 가지고 피나는 연습을 해서 가수가 되는 일뿐만이 아니다.  

서른 셋정도를 넘기면서, 나는, 아 - 내가 의사가 되었더라면 참 좋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병을 고친다는 보람과, 그에게 옳은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의 역할과, 치열하고 바쁘고 긴장된 일상이 내 적성에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인간군상을 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공감하면서 내 인격도 함께 부쩍부쩍 살 찔 수 있는 계기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언젠가부터 의술이나 약물치료, 혹은 한의학계통에 대해서 내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형태의 의사이든, 내가 의사라는 직업군에 속해있었다면 이렇게 방황하고 헤매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올해로 나는 서른 다섯이 된다. 의사라는 직업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인생의 방향을 잡아 10년 이상의 정규교육을 받아야지만 자격취득이 가능한 일이다. 내가 오늘부터 수능을 준비한다고 치자. 1년만에 합격을 한다고 하면 서른 여섯에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마흔여섯이 넘어 전문의가 될 수 있다. 과연 내가 10년을 투자할 만큼, 그 직업이 간절한가. - 그것은 또 그렇지 않다.  

이미 나는 의사가 아닌 삶을 삼십년 넘게 살아왔고, 의사가 아니더라도 잘 살고 있으므로, 가끔 개인적인 호기심 충족을 위해 의학관련 기사를 보고 약을 받아오면 약물검색 싸이트를 뒤져보거나 약상자의 성분들을 혼자 뜯어보고 가까운 의료계 지인들에게 이런 저런 의학 상식을 물어보고 의학이나 건강에 대한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하얀 거탑이나, 뉴하트 같은 의학드라마가 뜰 때 미친듯이 몰입하고 그에 관한 자료까지 섭렵하는 것으로 충분히 바쁘다.

의사와 같은 전문직종은 스무살이 되기 전에 그 꿈을 확립했어야 하는 일이다. 정규교육을 받고 그 직업으로 가는 길이 너무나 험난하기 때문에 젊은 열정이 아니라면 쉽게 시작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래서 오늘 내 주변을 살짝 원망해본다. 왜 그 때 아무도 나에게 의사가 되어볼 생각은 없냐고 묻지 않았을까. 특히, 외할아버지가 의학공부를 하셨다면서! 엄마는 왜! 나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을까. 하긴, 그 때 나의 어머니는 나의 진로에 대해서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하지 않았고 무엇이 너에게 어울린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토당토 않게 수녀나 경찰이 되는 건 어떠냐고 했었다. (이건 정말 자식을 몰라도 한 참 모르는 일을 넘어서서 자식의 특성을 모두 무시해 버린 처사다. 나는 제복을 증오하는 사람이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바로 그 날 집에 돌아와 교복을 가위로 아주 잘게 쪼게 버린 사람이다.)그리고 그 때 이과반 열풍을 몰았던 선생들은 왜 아무도 나에게 너는 수학을 잘 못하긴 하지만 이과쪽 적성도 있는 것 같다고 아무도 사려깊게 관찰해주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을 해 본다.  

모든 것은 본인의 결정이다. 그러나 스무살이 되지 않은 젊은 피가 평생의 결정을 하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는가. 다양한 직업군을 제시하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돈을 벌어야 하며 밥벌이를 해야하는데, 올바른 직업관이란 이런 것이고 너 자신은 바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으며, 너의 적성은 내가 관찰한 바로는 이러저러한 경향을 많이 띄고 있는 듯 하다. 라고, 왜 단 한 사람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루소의 에밀을 읽다보니, 에밀이 너무 부러워졌다. 이렇게 사려깊고 충실한 철학자를 (일부의 부족한 점은 일단 차치하고), 에밀이라는 학생을 교육시키는 데 온 힘과 정열을 다 바치는, (그게 그 교사의 인생의 큰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런 지도자 밑에서 성장하는, 청년의 에밀 (지금 15-20세 부분을 읽고 있다.)이, 참으로 부러웠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그랬을 것이다. 부모들은 원치 않는 밥벌이를 의무감으로 다해왔고 자식들은 운좋으면 좋은 선생님이 멋진 진로를 방향잡아주었을 지도 모르고, 형제들은 알아서 툭탁거리며 자랐다. 부모들은 늦게 들어와 지친 육신을 잠시 누이는 데 바빴으며, 자식들은 그런 부모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일찍 자고 착하게 굴어야 했다. 개성 따위는 개나 줘 버려라. 일단은 밥이 문제였다. 특히나 심한 컴플렉스로 자기 자신을 위장하며 살아왔던 나같은 부류의 인간들은 자신감과 오만으로 똘똘 뭉쳐 있었기 때문에 다들 나는 무엇을 해도 잘 할 것이니 상관하지 않겠다는 어른들이 많았다. 아니 ㅡ 그 무엇을 조금이라도 제시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 하고 나는, 오늘 아주 대놓고 그 때의 내 주변을 모두 타박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제 학부모가 될 것이고, 나의 아이는 별 다른 일이 없는 한 무럭 무럭 잘 자라날 것이다. 아이는 언젠가 나처럼 선택해야 할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워질 것이다. 그 때, 내가 올바로 아이에게 어떤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을 배우기 위해서 어미는 오늘도 고군분투 서른 다섯 인생의 중간쯤에서 - 나 자신을 다시 후벼파고 쪼개보고 있다. 내 아들도 언젠간 나에게 물을 것이다. 엄마, 엄마는 내가 뭐가 되었으면 좋겠어? 라고. 그 때 응 엄마는 어릴 때 과학자가 되고 싶었는데, 서른이 넘어서는 의사가 되고 싶더라. 라고 하지 말고, 현명한 답변을 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은 어차피 죽음으로 완성된다는 것도 아이에게 잘 말해 줄 수 있어야겠다.  

서른 다섯에 수신(修身)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수신을 이루지 못하면 제가(濟家)를 이루지 못하고 제가를 이룬다는 것이 바로 육아(育兒)이며 교육(敎育)이라는 것을, 내가 얻지 못했던 인생의 가이드를 내가 이루어 볼 차례가 되어버렸다. 누군가의 말대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대충 알게 되면 어느새 서른 다섯을 넘겨버리고 난 다음 이다. 나도, 결국 그렇게 되었다.  

2009.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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凱風 

 
凱風自南 吹彼棘心  


棘心夭夭 母氏劬勞  


凱風自南 吹彼棘薪  


母氏聖善 我無令人  


爰有寒泉 在浚之下  


有子七子 母氏勞苦  


晛睆黃鳥 載好其音  


有子七人 莫慰母心  


마파람이 남쪽으로부터 저 가시나무 끝에 불고
가시나무 끝이 야들야들, 어머니 고생하셨어요
마파람이 남쪽으로부터 저 가시나무 섶에 불고
어머니는 성스럽고 착하시거늘 우리에겐 착한 아들 없었네요
이에 맑고 시원한 샘이 준읍 아래 있네
자식을 일곱 사람이나 두었지만 어머니만 고생하셨어요
곱고도 예쁜 꾀꼬리가 비로소 그 노래를 잘하네
자식을 일곱 사람이나 두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했어요
 

 
詩經/邶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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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伽藍却是新羅舊  가람각시신라구
千佛皆從西竺來  천불개종서축래
終古神人迷大隗/외=阜+鬼(험할외)  종고신인미대외
至今福地似天台  지금복지사천태
春陰欲雨鳥相語  춘음욕우조상어
老樹無情風自哀  로수무정풍자애
萬事不堪供一笑  만사불감공일소
靑山閱世只浮埃  청산열세지부애 
 
   

 

 

가람()은 바로 신라의 옛 건물 그대로 이고
천개 불상은 모두 서쪽 천축(인도)에서 왔구나
옛날 신인이 대외산(大畏山)에서 길을 잃었다는 곳
지금 복지(福靈寺)가 있는 땅)는 천태산과 비슷해라
찌푸린 봄날, 비 오려나 새들은 지저귀네
늙은 나무는 무정한데 바람 홀로 슬퍼하네
세상만사 한번 웃음거리도 못되나니
푸른 산에서 세상사 굽어보면 떠있는 먼지 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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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館寒燈獨不眠 여관한등독불면

客心何事轉凄然 객심하사전처연

故鄕今夜思千里 고향금야사천리

霜鬢明朝又一年 상빈명조우일년

여관의 차가운 등불 밑에서 홀로 잠 못 이루는데
나그네의 마음은 웬일인지 더욱 처연하다
고향에서는 오늘밤 천리 밖 나를 생각하겠지
하얗게 센 귀밑머리, 내일 아침이면 또 한해가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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