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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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깨나 읽고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이언 매큐언을 모른다고 할 리가 없다. 아, 이언 매큐언, 알지. 잘 알지.《속죄》. 좋지. 조오은 작가지. 그게 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기도했다. 어느 부분이 마음이 들었는지, 어떤 등장인물에 가장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그런 거 제발 묻지 않게 하소서. 신은 있다. 내가 이언 매큐언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온 세상이 모른다는 것이 그 증거겠다. 무려,《속죄》의 이언 매큐언인데. 


그리하여 내게는《넛셸》이야말로 이언 매큐언의 첫 책이자 유일한(아직까지는) 책인 셈인데, 딱 그 정도 아는 서먹서먹한 사이에 이런 말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양반, 웃긴데?


이 책은《햄릿》이다. 햄릿이긴 햄릿인데 나이가 음수(陰數)인, 식사 시간에 포크와 나이프 대신 탯줄을 사용하는 '배냇햄릿'인 셈이다(쓰고 보니 영어 이름 같기도 하다. Bennett Hamlet. 구글링해 보니, 이런 사람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태아인데, 어떤 태아인가 하면 엄마 뱃속에서 시대별 건축 양식과 희귀종 우표의 이름들을 좔좔 꿰고 있는 태아다. 북한 인민들의 참혹할 실상도 알고, 드뷔시와 부동산 업자간의 차이도 숙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장막스 로제 상세르'라는 와인의 심오한 맛도 멋드러지게 표현할 줄 아는 아주 되바라진 놈이다. 게다가, 자꾸 인용하는 걸로 미루어 보면 이 자식은 무슨 수를 쓴 건지《율리시즈》도 벌써 다 읽은 것 같다. 이쯤 되면 독자는, 혹시 나는 바퀴벌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쐐기를 박듯, 그 많은 지식을 팟캐스트를 통해 익혔다고 고백함으로써 내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처참히 불싸지르고 동시에 수천 수만 개 대학교 커리큘럼을 장쾌하게 폭파한다. 도대체 팟캐스트로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백만 년만에 팟빵에 접속해 즐겨찾기 되어 있는 방송을 확인했더니, 영어 단어. 영어 회화. 영어 문법......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쟤는 벌써 영어로 된 팟캐스트를 듣고 있잖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건 절대적이다. 나를 버리려는 어머니의 계획에는 동의할 수 없다. 추방되는 것은 내가 아닌 그녀일 것이다. 나는 이 미끄러운 탯줄로 그녀를 묶어둘 것이다. 내 생일에 기진맥진한 신생아의 시선으로, 외로운 갈매기의 울부짖음으로 그녀의 심장에 작살을 꽂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강압적인 사랑에 굴복해 나의 충실한 유모가 되고 그녀에게 자유는 멀어져 가는 고국의 해안을 의미할 것이다. 트루디는 클로드가 아닌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나를 버리는 건 그녀의 흉곽에서 젖가슴을 뜯어내 배 밖으로 던지는 일일 것이다. 나도 무정할 수 있다. (65)

아주 이렇게 되바라진 놈이다. 문장을 따라 가노라면 이 이름도 없는 녀석이 되바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는데, 그것은 이언 매큐언이 어마무시하게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그 유려한 글솜씨로는 도저히 되바라지지 않은 주인공을 탄생시킬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작가도 얼마나 고충이었을까. 팟캐스트로 현자가 되었다는 택도 없는 변명을 띡 던져놓고서는.


이야기하는 놈이 간단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다. 햄릿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엄마가 택한 태교 방법이라는 게 삼촌과의 잦은 섹스, 아빠를 죽이려는 음모부터 실행까지의 전 과정이라는 점이 햄릿의 고민거리인 동시에 이 소설의 이야깃거리다. 이 엄마는 작가의 창작노트에서부터 이미 아빠를 죽이려는 의도를 지닌 채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왜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알 길이 없는데, 아빠라는 작자의 말본새를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실패와 슬픔의 연회장을 떠도는 옛 행복의 유령이지.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 우린 영웅과도 같았어. 그 누구도 현실에서든 시에서든 오른 적 없는 정상에 우리 둘만 서 있다고 믿었으니까.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멋지고 장려해서 우리에겐 하나의 보편적 원리였지......

미루어 보건대, 아빠의 죄목이자 사인은 다름 아닌 중2병이다. 이 만성 중2병 말기 환자는 싫다는 아내를 붙잡고 시를 읊어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는데, 평상시 말을(건배사라서 좀 더 힘주긴 했을 것이다) 저 따위로 하는 걸 보면, 그 시라는 것은 또 얼마나 지독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라는 것은 원래 공인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사회에서 지정하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읊어야만 하는 특수한 물건이다. 자격과 장소 요건을 갖추지 않은 시 낭송은 사람들에게 간접 흡연에 준하는 불쾌감을 안겨 주는 부도덕한 행동인 것이다. 내 여자친구는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내 고등학교 동창에게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는 횟수의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는데, 동창놈은 그 모든 여성들과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소개팅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음 소개팅을 요구하는 동창놈을 보며 혀를 차던 여친은, 마침내 자기가 소개해 준 여성들 중 한 명에게 재고의 여지도 없이 동창놈을 깐 이유를 심문했다.


여친 : 얼굴이 마음에 안들었니? 

소개팅녀 : 아니 그건 아닌데..... 

여친 : 그럼 성격이 빻았니? 

소개팅녀 : 아뇨, 딱히..... 

여친 : 그럼 혹시 돈을 안 썼어? 

소개팅녀 : 펑펑 쓰시더라구요...... 

여친 : 그럼 도대체 이유가..... 

소개팅녀 : 저..... 

여친 : 부담없이 말해도 돼, 걔한테 말 안 할게.

소개팅녀 : 저..... 그 분이요.

여친 : 그래, 그 분이.

소개팅녀 : 시를..... 읊더라구요.

여친 : ..... 실을 어째?

소개팅녀 : 아니오, 실이 아니라, 시요.....


즉시 우리는 소집 되었고, 가열찬 추궁 끝에 동창놈은 모든 소개팅녀를 대상으로 낭독회를 가졌음을 자백했다. 여친은 동창놈에게 차라리 실을 뜨지 도대체 왜 시를 읊고 말았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동창놈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은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것을. 자격과 장소요건을 갖추지 못한 시 낭송을 참아낼 수 있는 천사가, 살인이나 가정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인들 용서치 못하겠는가. 나의 짐작은 몇년 후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달 그 동창놈은 근 3년의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했는데, 결혼 전 청첩장을 주러 나온 자리에서 여친이 신부될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저놈이 시를 지어 읊지 않더냐고. 예비신부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동창놈은 득의양양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엄마는 아빠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만약 이언 매큐언이 그 시를 작품에 실었다면, 독자들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 위대한 작가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을 수 있다. 결국 독자에게 그 시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데서 우리는 이언 매큐언의 고고한 인류애를 엿볼 수 있다. 그랬다면 물론 이사를 가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트윗을 탈퇴해야 했겠지만, 우리의 친절한 이안은 할려면 충분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띨띨하고 욕정에 똘똘 뭉친 삼촌 또한 이야기에 즐거움을 더하는 캐릭터다. 시종일관 평범함과 멍청함의 경계선 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그의 청순한 뇌는 중요한 순간마다 빛을 발하고, 독자는 도대체 엄마가 어떻게 저런 모질이를 믿고 아빠를 죽일 계획을 세우는지 의아해진다. 이언 매큐언은 엄마가 삼촌과 동업을 선택한 근거로 언뜻 섹스를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현명한 독자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원인은 시다. 시. 아빠는 시를 읊고 삼촌은 시를 읊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놈의 개똥같은 시만 아니면 누군들 좋겠는데, 섹스까지 맞으니 잘 된 것이다. 섹스는 거들 뿐.


이쯤되면 마치 내가 시 혐오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 나야말로 한 달에 다섯 권이 넘는 시집을 읽고 착실하게 페이퍼를 작성하는 국내 몇 안 되는 독자 중 하나임을 밝혀 두겠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에서 되바라진 햄릿은 과연 햄릿다운 고민을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러니까 태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실존의 고민을. 결국 되바라진 햄릿은 트래디셔널 햄릿처럼 복수를 선택하는데, 태아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뭐가 있을까. 태어나는 것이지. 엄마가 죄값을 치르게 될지 말지는 아직 모르지만,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스물 여덟 살 청상의 운명 앞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영국이니까 당연히 보낼 수 밖에 없는 영어유치원에, 수학 과학 과외는 이름 있는 선생 불러다 시켜야 되고......  


내 말은 요컨대, 은근히 웃을 곳 많은 책이니 우리, 웃으면서 읽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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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7-08-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죄>도 궁금했는데 이 책도 궁금하고
그런데 읽는 건 몇 년 뒤에나 가능하겠으니
리뷰.. 쌩유. ;

(근데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십셔. ;
하십시오. 하셔야 합니다. 하십디다?;)

syo 2017-08-11 22:07   좋아요 1 | URL
안 돼요. 이거 읽구 책은 몇 년 후에 읽으신다면 몇 년 동안이나 이 책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고 살아가시는 일이 될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하십디다 재밌었어요. 그걸로 고를게요.

2017-08-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12 06:44   좋아요 2 | URL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공인 자격과 공인 장소가 필요합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8-16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리뷰 너무 재미있어요. 리뷰 좋아요. 박수!!

그런데 쇼님, 저는 이 책 사놨으니 읽을 준비가 되어있고 말입니다, 이언 매큐언 소설 중에 [칠드런 액트]를 추천합니다. 이거 읽어보세요. 저는 이거 읽고 진짜 이언 매큐언 너무나 우아하다!! 감탄에 감탄을 했습니다요. 쇼님은 이거 읽고, 저는 넛셀 읽고,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납시다.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어쩐지 시적인 표현이다..)


syo 2017-08-16 16:03   좋아요 0 | URL
《칠드런 액트》를 획득했음을 일려드립니다.
 

1


제발, 제발 이대로 그냥 가을이 왔으면 좋겠다 싶은 어제 오늘이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헬대프리카. 불신자들이 영원히 고통받는 저주받은 내 고향.



2


날씨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것은 딱히 할 말이 없다는 아주 전통적인 의사표시이다. 일기장에 쓸 말이 없다니. 오늘 뭘까....



3


오라는 가을은 안 오고 슬럼프가 오고 있다. 오후 세 시 언저리부터는 어쩐지 활자는 냄새도 맡기 싫은 상태가 되어, 아무 이유 없이 종합자료실 모든 서가를 한 번씩 돌고 온다. 집 나간 의욕이라는 놈이 울며 돌아오면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몇몇 책에 눈도끼를 찍어 놓지만 다 허사다. 나는 조울형 인간이라 의욕이 과하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난데, 과할 때는 평소 같으면 안 볼 책들을 자꾸 읽고, 없을 때는 평소 같으면 볼 책들을 보지 않는다. 결국 "평소 같으면 볼 책"들은 영영 보지 않는 셈이다. 그러니 도대체 내게 무슨 교양 같은 게 있겠는가.



170801-170810


문학 9권




1. 간절하게 참 철없이

: 옆에 있는(있던) 평범한 이웃을 시로 불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눈 앞에 놓인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음식을 시로 조리한다는 것은 또 어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하물며 그렇게 만든 시를 읽히게 빚어내 또 읽는 사람의 마음을 찌르르 건드리고 지나가는 일은 또 어떻고.


2.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 시 짓는 사람의 산문은 큰 기대를 하고 읽지만 기대에 닿지 못하고, 산문 짓는 사람의 시는 기대 없이 읽지만 기대를 넘어가는 일이 잦다. 어쩌면 그건 내가 시인이라면 대체로 숭배하기 때문일지도. 박준의 글은 시도 산문도 정갈하고 울림이 있다. 늘 다정하고 물기가 느겨지는 시선은 산문 안에서도 여전히 영롱하다. 하지만 난 역시 산문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그해 OO"이라는 짧막한 시들이 더 읽기 즐겁다. 어마어마하게 마음에 차고 넘치는 글들(특히 4부는 정말 빼놓을 것 없이 좋다)이 있는가 하면, 솔직히 몇몇 글들은 오글거리고, 심지어는 낯 두껍게 에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돌아다니는 수많은 "오글책"에서 갓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는 글도 있다.


3. 마티네의 끝에서

: 추상명사가 난무하는 그 특유의 문장이 살짝 눈에 밟히긴 해도, 이 정도면 뭐 더 할말이 없다. 처음《일식》을 읽고 어느덧 10년, 나도 그동안 많이 자랐으리라 생각했건만, 10년 전 내 비루함에 눈을 뜨게 만들어준 이 천재는 더욱 높은 곳에 올라서서 여전히 내 마음에 구멍을 낸다. 앞으로 10년을 더 가는 동안 내가 어디서 무엇을 훔쳐와 그 열패감을 메워 본들, 그때 다시 그를 만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에 닿을까.


4. 유리문 안에서

: 누구나 가슴 속에 깡패 작가 하나쯤은 품고 사는거지. 표지에 인쇄된 이름 하나만 봐도 그냥 마음이 절로 발가벗는. 아무 말이 다 무슨 말 같고, 무슨 말을 듣고 있더라도 아, 제발 무슨 말이라도 더 해줘요. 현기증 난단 말예요, 하는 심정이 되는. 난 이 사람.


5.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시가 나를 보살핀다는 것을 느낀다. 내 어깨에 얹힌 눈을 털어주러 오기 위해, 시인은 시인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언어의 개울에 하염없이 돌멩이를 던져 징검다리를 놓으려 한다. 시어가 그 돌멩이다. 시가 다리다.


6. 詩누이

: 시 읽어주는 책은 고맙다. 시는 각자의것이지만 어쩐지 문턱이 높은 장르라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데, 이럴 때 다른 누군가 읽어 놓은 모양은 시의 껍질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준다. 느낌으로 가는 돌다리를 띄엄띄엄 깔아준다.


7. 오직 두 사람

: 어린 나는 김영하가 별로였다. 이야기가 승한 반면 문장이 말라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슬픈 이야기를 읽어도 울지 않고 부조리한 이야기를 읽어도 분노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중요한 뭔가가 빠진 게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그냥 나의 취향과 그의 글이 짝이 맞는 열쇠와 자물쇠가 아니었을 뿐이며, 그는 감히 내가 이러니저러니 평할 수 있는 작가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지만(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제대로 받아들였을 뿐이지) 여전히 좋아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모든 작품을 건조한 마음으로 읽는다. 그럼에도 좋은 작품임은 느낄 수 있다. 그가 <옥수수와 나> 단 한 편을 발표하고, 그 작품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던 그 해, 나는 읽지도 않았으면서, 상 줄라고 그냥 뭐라도 글 하나 나오기만을 기다렸구만, 하고 근거 없이 비난을 했다. 읽어보니 그 작품이 이 책에서 가장 좋았다. 웃었다. 김영하의 책으로 내가 웃다니. 깝치지 말아야겠다. 입 밖으로 꺼내든 말든, 읽어보지도 않고 평하고 비난하는 찌질한 짓은 다신 하지 말아야겠다.


8. 기사단장 죽이기 1


9. 제 7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행복의 과학>

: 아니 나는 도대체 왜 좋은 작가들(특히 젊은 작가들)의 글에 박수를 치며 순수한 마음으로 읽지를 못하고, 아 얘는 뭔데 이렇게 잘 쓰지 짜증나게, 얘는 천재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이에, 뭐 이런 모질이 반바지 같은 감정으로 읽게 되는 걸까. 좋겠네, 글 잘 써서. 쳇.




읽기 / 쓰기 7권



10.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 이제 책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은 그만 볼란다. 어차피 따라할 것도 아니고. 500권의 추천도서 목록도 그냥 무시할란다. 어차피 다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11. 서평 쓰는 법

: 아무래도 서평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다. 서평은 읽는 거지 쓰는게 아닌 거라 나한텐. 타고나기를 나는 천생 독후감쟁이고, 그 사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도 떳떳 잘만 산다.


12.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

: 이 책의 효용이야 누군들 비난할 수 있겠는가만은, 두 번쯤 읽으니까 저자의 글 욕심 혹은 작품 욕구가 느껴진다. 누구에게나 그렇지만 품기에 선하고 바람직한 욕심이다. 이를테면 다섯 번째 편지와 그 답장에서 보이는, 의미 있고 깊이 있고 멋까지 있긴 해도 갑작스레 밀도를 높여 스스로를 부각하는 부분들에서. 나중에 한 번 더 읽어야지.


13. 내 서재 속 고전

: "나의 고전"은 나를 드러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니까 내 서재 속 고전은 내 마음 속 고전이 그대로 옮겨간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 고전은 너무 많아 내 마음 밖 고전까지 모두 서재로 옮겨 올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저자의 고전은 그저 흘끗 보고, 이제 나의 고전을 만들자.


14. 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

: 이 책은 나쓰메 소세키 읽는 법을 빙자한 소설 읽는 법 책이다. 핵심은 네 멋대로 읽어도 된다는 말인데, 멋대로 읽으려면 이런 방법들이 있지, 하며 10개의 예를 내놓고 있다. 그러니가 이 책의 정체는《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가 아니라《"가뿐하게 읽는" 나쓰메 소세키》인 셈이다.


15. 글쓰기의 최전선

: 사실 글쓰기 책은 거기서 거기다. 저자가 자기만의 문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내 글이야 말로 독자 니들이 배워야 할 문장의 표본이다."라고 주장하면 똥된다는 상식 또한 당연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다. 결국은 공인된 몇몇 강령들을 기본으로 하여 아주 조금 자신의 견해를 섞고, 나머지 부분은 글쓰기 심성론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글쓰기 책은 나오긴 수두룩하게 나왔어도 읽을만한 것은 적은 편인데, 이 책이 바로 그 적은 편에서도 개중 좀 어깨 펴고 소개할만한 책이 아닌가 싶다.


16.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 읽기

: 이거다! 앞으로 이렇게 독서일기를 쓰는 거다! 했지만 '이렇게'가 어떻게인지, 책을 덮으면서 바로 잊기 시작하여 마침내 이렇게 재미라고는 없는 독후감을 또 쓰고 있다. 나는 왜 닉 혼비로 태어나지 못해가지고 이 모양일까. 내 팔자야. 세상에는 글 잘 쓰는 대머리들이 정말 많군.




과학 / 기술 3권



17. 김대식의 인간 vs. 기계

: 이 분야에 아는 바가 없어서 얼마나 후려쳤는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아는 바가 없는 사람에게도 쉽고 재밌고 부족함이 없다고는 말할 수 있겠다. 사진이나 그림이 많은데 설명은 커녕, 사진 밑에 글자라고는 한 자도 안 써놓는 희한한 컨셉을 도대체 왜 잡았을까. 무슨 그림, 누구 사진인지 제목이나 이름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단점. 아무리 생각해도 불필요한 사진이 한 페이지씩 떡하니 들어가 책만 무겁게 만든다는 것이 두 번째 단점. 두 번째 것에서는 어떤 얍삽한 의도조차 엿보인다. 쓰다 보니 욕을 길게 한 것 같아서 머쓱하지만, 결론. 진짜 괜찮은 책이다.


18. 최신 인공지능 쉽게 이해하고 넓게 활용하기

: 앞의 책이 진짜 괜찮은 책이라는 증거.


19. 사이언스 브런치

: 요즘은 과학책이 참 쉽고 재미있게 잘 나온다-라는 말은 아재의 말이다. 이런지는 꽤 되었고, 과학은 이제 독서쟁이들의 힙한 아이템이다! 대충 알면서 많이 아는 놈만큼 누리는 게 또 제일 힙한 법이다. 그렇다면 이 책부터.



젠더 / 인권 2권



20. 혐오표현, 자유는 어떻게 해악이 되는가?

: 무참한 번역의 장단점. 먼저 단점 : 제대로 안착해야 할 중요한 책을 수렁에 처박거나 날개를 날려먹은 채 활주로에 불시착시킨다. 그래서 장점 : 잦은 빡침은 게으른 독자로 하여금 마침내 원서를 찾아보게 만드는 유일무이한 동력이다. 농담이고, 사실 완전히 못 읽을 정도는 결코 아니며, 내 생각에 참 중요한 책이라 원서로 읽겠다는 욕심을 부려보는 것이다.


21. 지금 여기 페미니즘

: 깊이나 폭, 뭘로 보든 이 정도의 책이 시장에 나오는 사회는 별로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건 학교에 나와서 애들 책상 위에 올라가야 한다. 그런 책이다. 의무교육 마치면 누구나 이 책이 담고 있는 정도는 탑재하고 시작할 수 있는 나라 되었으면 좋겠다.



법 / 사회 2권



22. 지식재산 스타트

: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책 아닌가 싶다. 스타트라는 말에 걸맞게 사례를 중심으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주력하고 있다. 같은 분야의 다른 책들에 비해 편집 형태도 선구적이다.


23. 촛불의 시간

: 박근혜와 관련한 1부만 놓고 보면 도대체 이 책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눈에 저자는, 박근헤가 이럴 줄을 나는 미리 알았거든, 그래서 돕지 않았지, 하는 말이 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고, 뒤이어지는 분석들은 그저 구색 맞추기로 느껴진다. 게다가, 한국의 인사청문회는 문제가 많고,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었기에 나도 강남 아파트를 살 때 다운 계약서를 썼으며 "공교롭게도" 딸의 학교 진학과 겹쳐 위장전입을 하고 말았다는 뜬금 없는 고백이, 아무런 맥락도 필요도 없이 띡 삽입되어 있다. 또한, 편집과 교졍 쪽의 문제겠지만, 어떻게든 책을 빨리 내서 좋은 포지션을 선점하려는 욕심도 너무 빤히 드러난다. JTBC 폭로를 2015년 10월 24일이라 표기하고, 그 다음 꼭지를 "2015년 가을은 그렇게 흘러갔다."로 시작해 놓고 바로 다음 다음 문장을 "2016년 가을은 존재감을 잃었다." 라고 잇는다. 당시 대통령 변호사 이름은 유병하가 아니라 유영하인데 심지어 이건 마지막까지 고쳐 놓지도 않는다..... 나머지 말들은 누구나 아는 말이거나, 누구나 아는 말들을 아는 사람들이 더 알 필요까지는 없는 말이거나 하다. 그런 1부를 덜어냈다면, 아마 나는 감탄의 연속으로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과연 "소설가" 송호근 선생님답게 문체도 힘있고 경쾌하다. 저자의 주장이 향하는 곳이 내가 보고 싶어하는 세상과 다른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저 막강한 내공에 휩쓸려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하다가 독서를 마쳤을 것이다. 1부만 아니었다면.



인물 / 역사 / 종교 4



24. 열한 계단

: 일종의 성긴 자서전이나 자전소설이라고 생각해 본다. 책에 들어 있는 지식들의 다채로움이나 깊이와는 별개로,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로서 재미가 충분하다.


25. 반갑다! 이슬람

: 그림이 많고 글이 적어 쉬울 것 같지만, 친절하지 않고 말수 적은 선생 같아 썩 정겹지 않다. 이희수 선생님이 등판할 때다.


26. 만만한 하워드 진

: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이런 사람을 이미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 것 뿐이라면, 우리에게도 이런 책이 필요하다.


27. 무함마드 평전

: 위대해지고 싶었고, 마침내 위대해진 한 남자의 취향과 욕망 덕분에 수 억의 후대 여인들이 불행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책은 사실 더 큰 문제의식을 제공하지만, 글쎄 읽는 사람 입장에서 무함마드의 여자 문제는 너무 인상적이라 관심을 거의 다 빨아먹는 것도 같다. 나는 이렇게만 써놓고도 괜히 등골이 서늘한데, 부디 저자의 신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철학 / 인문 일반 3권



28. 오, 클래식

: 어찌 보면 빤한 글들인데, 무엇에 이렇게 감동을 받았을까? 음악의 이야기이면서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과 음악 사이에 있거나 있어야 할 것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29. 기술적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 정치 분야로 빼야 하나 한참을 고민했다. 이 책을 말로만 듣고 아는 척 하고 살다가 이제야 읽어본 것은 부끄러워 할 일이다. 읽기 전보다 읽고 나서 모르는 거이 더 많아졌는데 이것은 자랑스러워 할 일이다.


30. 하이데거

: 번개같이 쳐들어와서 번개같이 잊혀졌다...... 번개 맞은 나무 하나 덩그러니 남았다. 그거라도 붙잡고 시작해 보자.



미분류 / 설렁설렁 읽은 책 6권



31. 처음 만나는 파이썬

32. 시사IN 515

33. 시샤IN 516

34. 1년만 닥치고 영어

35. 잉글리시 팩토리

36. 베다 읽기



나는 왜 여름만 되면 미친듯이 권수를 늘리는 비만 독서를 하는 걸까. 작년 이맘때도 한달 100권 페이스로 읽었다. 그리고 그랬다는 추억만 남긴 채 그 모든 책의 기억은 요단강을 건넜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책을 만들었고, 책을 통해서 망각에서 구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책 때문에 스스로 망각의 동물임을 뼈저리게 깨닫는 나는 왜 구제자 명단에서 빠진걸까? 혹시, 인간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아무래도 문제는 쓰기에 있는 것 같다. 읽기만 하고 도대체 쓰지를 않으니 쓸데 없는 읽기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닐까. 읽기를 줄이고 쓰는 시간을 더 가져봐야겠다. 한 번 보자, 뭐 어떻게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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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10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많이 읽었네요 쇼님. 저는 8월달에 아직 한 권도.....(시무룩)
잘자요!

syo 2017-08-11 07:00   좋아요 0 | URL
얼른 책귀신 페이퍼귀신 다락방님으로 돌아오셔요 ㅎㅎㅎㅎ

단발머리 2017-08-11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 저도 그 책에서는 <옥수수와 나>가 제일 좋았어요. 북플로 읽다가 syo님의 깝치지 말아야겠다,에 밑줄 긋고 싶었어요 ㅎㅎ
8. 은 왜 제목만 있고 평이 없을까요. 궁금합니다^^
많이 읽으셨어요. 완전 부지런하십니다~~
전 느림보라 부러운 마음뿐이예요^^

syo 2017-08-11 08:13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 안녕하세요 ㅎㅎㅎ

기사단장 죽이기는 2권까지 다 읽고 뭐라도 써야지 했거든요. 근데, 1권을 다 읽은지 5일이 되었는데 아직 2권을 펼치지도 않아서 아무것도 쓰지 못했습니다....
, 라고 쓸 것을 그랬네요. 그렇게 쓰는대로 또 의미가 있을 뻔 했는데.

37권을 읽고 쓰는 이런 똥글 쓰는 저보다 한 권 한 권 알차게 리뷰 남기시는 단발머리님이 더 부지런하신 걸요. 전 그게 더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17-08-11 08:17   좋아요 0 | URL
아니예요 아니예요 아니예요
제가 더 부럽단 말이예요~~~ ㅎㅎㅎㅎㅎㅎ

syo 2017-08-11 08:23   좋아요 0 | URL
아니예요, 아닌 것 같아..... 다툴까요!!
ㅎㅎㅎㅎㅎ도대체 지금 뭐하는 거람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8-11 14:25   좋아요 0 | URL
여러분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 ㅋㅋㅋ

히히 여기 제가 좋아하는 두 분이 다투시니(응?) 마음이가 좋으네요. 히죽히죽
 

1

 

젖은 셔츠를 입고 도서관 앞 계단에 앉은 남자의 뒷모습이 이제 슬슬 비어가는 그의 정수리처럼 해 지는 방향으로 조금씩 옅어지는데 보기 아쉬웠는지 매미 매섭게 울고 바람도 슬며시 돌아갔지만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등은 아직 더 작아질 일 남은 돌멩이 같아 어쩐지 눈 떼지 못하고 나도 조용히 기다려 보다 문득 등 뒤에 수 만권의 책을 쌓아 놓은 저 남자 수 천개의 갈림길을 건너온 저 남자 수 백개의 이름을 궁글려 빚은 저 남자의 셔츠는 무엇을 기다리다 젖고 말았나 궁금해 하고 있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 차갑고 굳은 쇳덩어리 달리는 틈바구니를 잘도 파고 들어 여기까지 들리는 부르는 소리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세상 가장 커다란 사람이 되어 계단을 내려갔다. 

 

 

2

 

저녁은 먹었어요 하는 대답에서 배고픈 냄새가 났다고 말할 수는 없어서 그저 바라본 것이었는데 들켰다는 듯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 보는 아이는 무엇을 바라 여기에 왔는지 말하고 싶은 듯도 하고 말할 수 없는 듯도 하고 영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도장처럼 허공에 찍어댔고 그것은 모두의 눈에 생생히 보였으므로 우리는 다 같이 배고픔을 느꼈지만 이 배고픔을 아무리 모아 팔아도 너를 배불리지 못하겠지 깨달은 사람들 역시 하나 둘 고개를 숙이고 콩콩 바닥을 차는 사이 학생은 휴게실의 문을 열고 어두운 바깥으로 나갔는데 그제서야 사람들 다시 고개를 들어 저 어두운 바깥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고 아이의 미래 되지 않도록 아무런 이름도 짓지 마시기를 기도 드리는 동안 떼꾼한 침묵들이 바닥으로 고였다.

 

 

3

 

물으면 대답해 줄 것 같아 일부러 하지 않은 질문들 중에는 가끔 쓸만한 것들이 나왔으므로 묻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밤 내일도 오늘의 얼굴로 돌아올 밤 도대체 당신은 왜 이 밤까지 남아 그 슬픈 눈으로 허공을 디디는지 왜 그 눈을 따라가면 내 눈에도 정적이 보이는지 오늘은 한 번 물어볼까 망설이다 보면 폐관을 알리는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고 오늘의 물음을 내일로 던진 것이 어쩐지 홀가분하여 슬쩍 웃어보았는데 그 슬픈 눈이 내게 너는 내일도 묻지 못할 것이라고 그것은 네가 이미 그 답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내일도 모레도 그 어떤 날에도 나는 허공을 정적을 슬픈 것을 그 어떤 것도 이미 묻지 못하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4

 

 

결국 우리는 스스로 꿈결에 제조한 폭탄을 제각기 품에 안은 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죽음이라는 먼 곳으로 담소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닐까. 다만 무엇을 그러안고 있는지 타인도 모르고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한 거겠지.

 

_나쓰메 소세키『유리문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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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8-09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 ‘알랭 마방쿠‘의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라는 소설 혹시 읽어봤나요? 오늘 제가 읽은 쇼님의 이 페이퍼는 대뜸 이 책을 떠올리게 만드는데요, 이 아프리카 술집 외상은 어림없지 라는 소설도 역시 문장에 마침표가 없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 도서관 가보시면 도전!!

syo 2017-08-09 08:53   좋아요 0 | URL
도전!!
그치만 이 글에는 마침표가 있어요 ㅎㅎㅎ 문법적으로 마침표 찍어야 될 데는 다 찍었는데, 문도덕(?)적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는 상황이로군요....

쇼코 2017-08-09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에서 3의 글들이 다 하나의 문장들이고 적절한 자리에서 조사가 생략 되어서 그런지 산문시를 읽는 기분이었어요. 두번, 세번 다시 읽어 볼 만큼 내용도 그 도서관 풍경의 소리나 촉감이 들리고 느껴질 것만 같았고요. 4번에 달아 놓으신 책은 읽지 못해서 위의 글들과 정확히 연결시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알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ㅎㅎㅎ

도서관 풍경 속 사람들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참말로 좋습니다. 저 또한 낯선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담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오늘도 좋은 글 고맙습니다^^

syo 2017-08-09 12:01   좋아요 1 | URL
ㅠㅠ 몸둘 바... 제 몸둘 바를 돌려주세요.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는 정말 유리문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고 그린 그림 같은 산문이지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고, 그의 눈에 포착되면 타인이나 세상이 조용한 가운데 어쩐지 쓸쓸함이 자꾸 묻어나는 것 같아요. 저 책 읽고 나름 감동 받아서 저도 한 번 사람들을 쓸쓸하게 바라보는 연습을 해봐야지 했을 뿐이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습니다ㅎ

오늘도 역시 글보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쇼코 2017-08-09 12:12   좋아요 0 | URL
유리문 너머로 보는 조용하고 쓸쓸한 세상, 저도 같이 보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작가라니 꼭 읽어보고 싶어요. 다음 번 책 살 때 이 책도 함께 받아보겠군요. ㅎㅎ 좋은 작가 알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1

 

아침에 열람실 문을 당기고 들어가면 매일 그 시간, 매일 그 자리에 앉아있는 매일 그 분들과 매일 눈이 슬쩍 마주치곤 한다. 인사라도 할까? 우리가 무슨 사인데 인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진 않을까? 앉고 싶은 자리를 선택할 수 있을만큼 일찍 오는 사람들의 동료의식 같은 게 은근 있다는 생각은 나만 하는 걸까? 전완미남, 용감한 부부, 헛되도다 영감님, 볼빨간 삼촌, 온도의 지배자, 벗지마오 그 모자, 빨간 형과 파란 동생, 킹 오브 배바지...... 내가 혼자 별명 붙이고 혼자 맘 속으로 불러보는 수많은 도서관 크루들은 나를 뭐라고 부르고 있을까. 쪼리 신은 원숭이? 물 먹는 미어캣? 텀블러 사무라이? 가장 먼저 먹는 자? 궁금하다. 그 사람들이 불러주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골고루 섞여서 나일텐데. 각자도생하는 자들의 21세기 도서관은 혼자이고 싶은 사람에겐 너무 시끄럽지만, 가끔은 함께이고 싶은 사람에겐 또 너무 조용하다.

 

드러내지 않기와 공적인 장은 이중적인 상호전제 관계에 있다. 공적인 장이 있어야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거기서 물러나거나 접근하거나 할 수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공적인 장을 예정된 파괴에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공적인 발언이 경청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해야만 고독이 고립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

 

_피에르 자위《드러내지 않기》27쪽

 

 

2

 

열람실 안쪽, 두 벽이 만나는 모퉁이 가장 으슥한 자리를 잡는 아저씨는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모기약을 꺼내 분사한다. 선풍기 바람을 타고 내 자리까지 모기약이 넘어온다. 와, 상큼한 오렌지향이다. 덕분에 매일 아침 향수를 뿌리고 올 필요가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렇다고 향수 값이 굳고 그걸로 책을 한권 더 사거나 하는 이득은 없다. 그건 내가 원래 향수를 쓸 줄 모르니까 그렇지. 아, 갑자기 생각나는 문장. 골수 좌파 아나키스트(-_-??)인 나는 어쩐지 뿌듯하네. 오렌지 향 모기약도 좋아하는 나의 무취향이.

 

취향은 그 분야에서 어느 정도 소비를 해야 비로소 생겨난다. 어떤 것에 끌리는 경향이야 타고날 수 있지만 세밀한 취향은 절대소비량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취향은 자본주의적이고, 개인과 도시의 탄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_이현주《읽는 삶, 만드는 삶》44쪽

 

 

3

 

요즘처럼 산산한 아침 저녁이 이어진다면 여름이라는 계절도 그리 못된 놈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건물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크고 작은 개미도 보고, 굵기가 엄지손가락 만한 지렁이도 보고, 축 늘어진 나무 줄기들 사이로 보일듯 말듯 지은 거미줄도 본다. 이렇게 안 쓰다가 혹시 까먹을까 봐 금연 안내문을 읽으면서 서울말 연습도 한다. 우리 도서관은 국민건강진흥법에, 음, 국민겅강, 국민건강진흥법, 음음. 서울 사는 사람 아무도 서울말이라고 인정해주지 않는 나의 서울말. 나만 아끼는 나의 서울말. 새끼 고양이 야옹야옹 우는 소리가 들린다. 에이, 저 아이도 내 서울말을 들었나 본데.

 

다른 사람이 쓰는 표현을 피하라. 누구나 하는 말을 그저 전달할 뿐이더라도 자신만의 화법을 생각해 내라. 인터넷과 거리를 두려고 노력해라. 책을 읽어라.

 

_티모시 스나이더《폭정》78쪽

 

 

4

 

내가 내일도 도서관에 갈 예정이듯, 오늘 도서관에 왔던 사람들은 내일도 오겠지. 우리는 매일 스치고, 서로의 조각을 한 줌씩 주워 내 안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빚으며, 그렇게 아무말도 나누지 않고 친해질 것이다. 어쩌다 하루 안 보이면 빈 자리가 눈에 들고, 며칠 안 보이면 몇 초쯤 걱정을 하기도 하고, 길게 만나지 못하면 아, 합격했나보구나.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며 부러움과 축하를 반반 잘 버무려 넘겨짚기도 할 테지. 조금 어색하지만, 어쩌면 이것도 사람이 사람과 사는 방식이겠거니 한다.

 

나는 생각했다. 저 문장은 얼마나 이상한 문장일까. 얼마나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 얼마나 이상한 삶들이 얼마나 이상한 내용을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한 문장일까. 그리고 만일 저 길고 긴 문장을 손본다면 어떤 표기가 맞고 어떤 표기가 그렇지 않은지는 또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내가 들어내거나 고치거나 다듬어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_ 김정선《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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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03 22:04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최고예요. 어디 다른데 가기가 귀찮을 지경이니까요....

에디터D 2017-08-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도서관을 거의 매일 다녀서 그런지 syo님의 글이 반갑네여 ㅎ

syo 2017-08-03 22:49   좋아요 0 | URL
혹시 리제님도 도서관에서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이시나요? 저만 그런건가요.....
 

 

1

 

봄은 잠깐 앉았다 이내 가고 무더운 여름이 길게 이어진다.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가을은 쏜살처럼 스쳐 지나가고, 추위와 함께 온 겨울이 오래 머문다.

 

 

 

2

 

우리 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고 배우며 자랐다. 요즘 아이들도 그렇게 배우는지 모르겠다. 교과서는 이 땅의 일년을 같은 크기로 네 조각 내서 3월부터 봄, 6월부터 여름, 9월부터 가을, 12월부터 겨울이라고 가르쳤는데, 실제로 몸이 계절을 그렇게 감지하고 있었으니 퍽 진실한 지식이었다. 그런데 잠깐 국어, 영어, 수학에 한 눈을 파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른이 되어 보니 이 나라는 여름과 겨울이 유난히 부지런을 떠는 곳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리벙벙 10년을 더 살면서, 더 중요하고 더 엄혹한 진실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었다. 여름과 겨울이 봄 가을을 갉아먹는 일이 비단 땅의 사건만은 아니라는 것을.

 

 

 

3

 

삶의 봄은 언제까지일까?

 

열 살짜리 아이에게 삼각함수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마련해야 겨우 앞이 보이던 스물 몇의 나날들을 내 삶의 여름이 시작된 지점이라 짚어 본다. 그때 나는 내 팔자 기구한 줄만을 알았는데, 생각해 보면 내게 삼각함수를 배워야 했던 그 아이의 여름은 벌써 열 살부터는 시작이었구나 싶다. 그리고 내가 지나가야 할 여름이 아직 한참 남았듯이, 어딘가에서 0.5점의 평균을 올리기 위해 새벽과 건강을 땔감처럼 태우며 살고 있을 그 아이의 여름도 아마 길고 뜨겁게 이어지겠지. 십 년? 이십 년? 아니면 삼십 년?

 

가을은 도대체 언제쯤 오는 것일까? 오면 꽤 있다가 가주긴 할까? 잠깐 앉아서 한숨 돌릴 시간도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4

 

어쩌면 이런 말씀이 희망이 될까?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돼."

 

_ 박준,《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63쪽

 

아니면 좀 더 아름다운 이런 말씀은 또 어떨까?

 

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되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_안도현〈가을의 소원〉전문

 

 

 

 

5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지 않는 날, 가을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전언이다. 가을이 와도 가끔은 혼자 울 것이며, 울다 스러질 때까지 초록의 날들을 되짚어 그리워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처방이다. 가을은 멀고, 그냥 오는 듯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서, 나한테는 아직 여름이 한참은 더 남았다는 진단이다.

 

솔직히, 여름이 길고 잠깐 본 가을의 맛이 아직 혀끝에 남았건 말건 가차없이 곧바로 긴 겨울을 살다 가야하는 이 침울한 배분이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에게 마치 팔자의 모델 하우스처럼 제공되는 것이 다 우리 탓은 아닌데, 로또가 아니라면 마냥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빡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은 물론 지구온난화가 주범이겠지만, 나는 우리 삶의 여름과 겨울이 길어진 것 역시 공범이나 최소한 종범쯤은 되지 않나 의심한다. 삶의 사계절이 공평하게 사등분을 회복하는 순간, 여름은 6월에 와서 세 달 있다가 가고, 겨울이 9개월 뒤에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며 2월 말에 깔끔하게 물러가는 기적이 도래할 거라는 미신적 희망도 가져본다.

 

어쨌거나 기왕 비집고 열어나가야 할 여름이라면, 여름 안에서나마 조금은 듬성듬성 살고 싶다. 어쩌다 바람 시원해 잠깐 멈춰 선 자리가 눈과 귀에 아름다운 곳이라면 더 걸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천천한 걸음으로 살 '수 있'고 싶다. 곳간이든 마음자리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채우며, 혹은 비우며, 여름 위에 둥둥 떠서 가을이 올 때까지 이리저리 흔들흔들 부유할 수 있다면 그것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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