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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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깨나 읽고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이언 매큐언을 모른다고 할 리가 없다. 아, 이언 매큐언, 알지. 잘 알지.《속죄》. 좋지. 조오은 작가지. 그게 나의 대답이었다. 그리고는 입을 다물고 기도했다. 어느 부분이 마음이 들었는지, 어떤 등장인물에 가장 쉽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그런 거 제발 묻지 않게 하소서. 신은 있다. 내가 이언 매큐언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는 것을 온 세상이 모른다는 것이 그 증거겠다. 무려,《속죄》의 이언 매큐언인데. 


그리하여 내게는《넛셸》이야말로 이언 매큐언의 첫 책이자 유일한(아직까지는) 책인 셈인데, 딱 그 정도 아는 서먹서먹한 사이에 이런 말 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이 양반, 웃긴데?


이 책은《햄릿》이다. 햄릿이긴 햄릿인데 나이가 음수(陰數)인, 식사 시간에 포크와 나이프 대신 탯줄을 사용하는 '배냇햄릿'인 셈이다(쓰고 보니 영어 이름 같기도 하다. Bennett Hamlet. 구글링해 보니, 이런 사람 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태아인데, 어떤 태아인가 하면 엄마 뱃속에서 시대별 건축 양식과 희귀종 우표의 이름들을 좔좔 꿰고 있는 태아다. 북한 인민들의 참혹할 실상도 알고, 드뷔시와 부동산 업자간의 차이도 숙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나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장막스 로제 상세르'라는 와인의 심오한 맛도 멋드러지게 표현할 줄 아는 아주 되바라진 놈이다. 게다가, 자꾸 인용하는 걸로 미루어 보면 이 자식은 무슨 수를 쓴 건지《율리시즈》도 벌써 다 읽은 것 같다. 이쯤 되면 독자는, 혹시 나는 바퀴벌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쐐기를 박듯, 그 많은 지식을 팟캐스트를 통해 익혔다고 고백함으로써 내 알량한 대학 졸업장을 처참히 불싸지르고 동시에 수천 수만 개 대학교 커리큘럼을 장쾌하게 폭파한다. 도대체 팟캐스트로 르네상스적 인간이 되는 게 가능하다는 말인가. 백만 년만에 팟빵에 접속해 즐겨찾기 되어 있는 방송을 확인했더니, 영어 단어. 영어 회화. 영어 문법......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쟤는 벌써 영어로 된 팟캐스트를 듣고 있잖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고 그건 절대적이다. 나를 버리려는 어머니의 계획에는 동의할 수 없다. 추방되는 것은 내가 아닌 그녀일 것이다. 나는 이 미끄러운 탯줄로 그녀를 묶어둘 것이다. 내 생일에 기진맥진한 신생아의 시선으로, 외로운 갈매기의 울부짖음으로 그녀의 심장에 작살을 꽂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강압적인 사랑에 굴복해 나의 충실한 유모가 되고 그녀에게 자유는 멀어져 가는 고국의 해안을 의미할 것이다. 트루디는 클로드가 아닌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나를 버리는 건 그녀의 흉곽에서 젖가슴을 뜯어내 배 밖으로 던지는 일일 것이다. 나도 무정할 수 있다. (65)

아주 이렇게 되바라진 놈이다. 문장을 따라 가노라면 이 이름도 없는 녀석이 되바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보이는데, 그것은 이언 매큐언이 어마무시하게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그 유려한 글솜씨로는 도저히 되바라지지 않은 주인공을 탄생시킬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작가도 얼마나 고충이었을까. 팟캐스트로 현자가 되었다는 택도 없는 변명을 띡 던져놓고서는.


이야기하는 놈이 간단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다. 햄릿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엄마가 택한 태교 방법이라는 게 삼촌과의 잦은 섹스, 아빠를 죽이려는 음모부터 실행까지의 전 과정이라는 점이 햄릿의 고민거리인 동시에 이 소설의 이야깃거리다. 이 엄마는 작가의 창작노트에서부터 이미 아빠를 죽이려는 의도를 지닌 채로 탄생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왜 엄마가 아빠를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하게 되었는지 직접적으로 알 길이 없는데, 아빠라는 작자의 말본새를 보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다. 


......실패와 슬픔의 연회장을 떠도는 옛 행복의 유령이지.그래서, 난 망각의 바람에 맞서 진실의 작은 촛불을 켜고 그 빛이 얼마나 멀리까지 닿는지 보고 싶어. ....... 우린 영웅과도 같았어. 그 누구도 현실에서든 시에서든 오른 적 없는 정상에 우리 둘만 서 있다고 믿었으니까. 우리의 사랑은 너무도 멋지고 장려해서 우리에겐 하나의 보편적 원리였지......

미루어 보건대, 아빠의 죄목이자 사인은 다름 아닌 중2병이다. 이 만성 중2병 말기 환자는 싫다는 아내를 붙잡고 시를 읊어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고 있는데, 평상시 말을(건배사라서 좀 더 힘주긴 했을 것이다) 저 따위로 하는 걸 보면, 그 시라는 것은 또 얼마나 지독했을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라는 것은 원래 공인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사회에서 지정하는 특정한 장소에서만 읊어야만 하는 특수한 물건이다. 자격과 장소 요건을 갖추지 않은 시 낭송은 사람들에게 간접 흡연에 준하는 불쾌감을 안겨 주는 부도덕한 행동인 것이다. 내 여자친구는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내 고등학교 동창에게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는 횟수의 소개팅을 주선해 주었는데, 동창놈은 그 모든 여성들과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소개팅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다음 소개팅을 요구하는 동창놈을 보며 혀를 차던 여친은, 마침내 자기가 소개해 준 여성들 중 한 명에게 재고의 여지도 없이 동창놈을 깐 이유를 심문했다.


여친 : 얼굴이 마음에 안들었니? 

소개팅녀 : 아니 그건 아닌데..... 

여친 : 그럼 성격이 빻았니? 

소개팅녀 : 아뇨, 딱히..... 

여친 : 그럼 혹시 돈을 안 썼어? 

소개팅녀 : 펑펑 쓰시더라구요...... 

여친 : 그럼 도대체 이유가..... 

소개팅녀 : 저..... 

여친 : 부담없이 말해도 돼, 걔한테 말 안 할게.

소개팅녀 : 저..... 그 분이요.

여친 : 그래, 그 분이.

소개팅녀 : 시를..... 읊더라구요.

여친 : ..... 실을 어째?

소개팅녀 : 아니오, 실이 아니라, 시요.....


즉시 우리는 소집 되었고, 가열찬 추궁 끝에 동창놈은 모든 소개팅녀를 대상으로 낭독회를 가졌음을 자백했다. 여친은 동창놈에게 차라리 실을 뜨지 도대체 왜 시를 읊고 말았냐며 따지고 들었지만 동창놈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가 한 행동은 일종의 테스트였다는 것을. 자격과 장소요건을 갖추지 못한 시 낭송을 참아낼 수 있는 천사가, 살인이나 가정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인들 용서치 못하겠는가. 나의 짐작은 몇년 후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달 그 동창놈은 근 3년의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했는데, 결혼 전 청첩장을 주러 나온 자리에서 여친이 신부될 사람에게 물었다. 혹시 저놈이 시를 지어 읊지 않더냐고. 예비신부는 수줍은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동창놈은 득의양양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엄마는 아빠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빠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만약 이언 매큐언이 그 시를 작품에 실었다면, 독자들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 위대한 작가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을 수 있다. 결국 독자에게 그 시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데서 우리는 이언 매큐언의 고고한 인류애를 엿볼 수 있다. 그랬다면 물론 이사를 가고, 인간관계를 정리하고, 트윗을 탈퇴해야 했겠지만, 우리의 친절한 이안은 할려면 충분히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띨띨하고 욕정에 똘똘 뭉친 삼촌 또한 이야기에 즐거움을 더하는 캐릭터다. 시종일관 평범함과 멍청함의 경계선 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그의 청순한 뇌는 중요한 순간마다 빛을 발하고, 독자는 도대체 엄마가 어떻게 저런 모질이를 믿고 아빠를 죽일 계획을 세우는지 의아해진다. 이언 매큐언은 엄마가 삼촌과 동업을 선택한 근거로 언뜻 섹스를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현명한 독자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원인은 시다. 시. 아빠는 시를 읊고 삼촌은 시를 읊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놈의 개똥같은 시만 아니면 누군들 좋겠는데, 섹스까지 맞으니 잘 된 것이다. 섹스는 거들 뿐.


이쯤되면 마치 내가 시 혐오자처럼 보일 수 있으니, 나야말로 한 달에 다섯 권이 넘는 시집을 읽고 착실하게 페이퍼를 작성하는 국내 몇 안 되는 독자 중 하나임을 밝혀 두겠다. 


어쨌든 이 모든 과정에서 되바라진 햄릿은 과연 햄릿다운 고민을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러니까 태어나느냐 마느냐 하는 실존의 고민을. 결국 되바라진 햄릿은 트래디셔널 햄릿처럼 복수를 선택하는데, 태아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게 뭐가 있을까. 태어나는 것이지. 엄마가 죄값을 치르게 될지 말지는 아직 모르지만, 남편 없이 혼자서 아이를 키워야 하는 스물 여덟 살 청상의 운명 앞에 놓인 장애물이라는 것이 뻔하지 않은가. 영국이니까 당연히 보낼 수 밖에 없는 영어유치원에, 수학 과학 과외는 이름 있는 선생 불러다 시켜야 되고......  


내 말은 요컨대, 은근히 웃을 곳 많은 책이니 우리, 웃으면서 읽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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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 2017-08-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속죄>도 궁금했는데 이 책도 궁금하고
그런데 읽는 건 몇 년 뒤에나 가능하겠으니
리뷰.. 쌩유. ;

(근데 영어 공부는 열심히 하십셔. ;
하십시오. 하셔야 합니다. 하십디다?;)

syo 2017-08-11 22:07   좋아요 1 | URL
안 돼요. 이거 읽구 책은 몇 년 후에 읽으신다면 몇 년 동안이나 이 책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갖고 살아가시는 일이 될지도 몰라요 ㅋㅋㅋㅋㅋㅋ

하십디다 재밌었어요. 그걸로 고를게요.

2017-08-1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7-08-12 06:44   좋아요 2 | URL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공인 자격과 공인 장소가 필요합니다 ㅎㅎㅎㅎㅎ

다락방 2017-08-16 15: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 리뷰 너무 재미있어요. 리뷰 좋아요. 박수!!

그런데 쇼님, 저는 이 책 사놨으니 읽을 준비가 되어있고 말입니다, 이언 매큐언 소설 중에 [칠드런 액트]를 추천합니다. 이거 읽어보세요. 저는 이거 읽고 진짜 이언 매큐언 너무나 우아하다!! 감탄에 감탄을 했습니다요. 쇼님은 이거 읽고, 저는 넛셀 읽고, 그리고 우리 다시 만납시다. 여기, 이곳에서 말입니다.
(어쩐지 시적인 표현이다..)


syo 2017-08-16 16:03   좋아요 0 | URL
《칠드런 액트》를 획득했음을 일려드립니다.